미국 국무부, 백악관, 미군과 중남미 주재 미 대사관 등에서 27년간 중남미 담당 업무를 전담했던 베테랑 전직 외교관 빅터 마누엘 로차(73) 전 주볼리비아 미국대사가 쿠바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해온 혐의로 체포·기소됐다. 미국 법무부는 로차가 약 40년간 쿠바의 정보기관인 총첩보국 비밀요원으로 활동해 왔다며 4일(현지 시각) 이같이 밝혔다.

빅터 마누엘 로차 전 주볼리비아 미국 대사가 쿠바 총첩보국 요원인 것처럼 위장한 FBI 수사관과 접선했을 당시 촬영한 동영상 장면. 1981년부터 2002년까지 미정부에서 중남미 담당 외교관으로 일했던 그는 국무부 입직 전과 은퇴 후를 포함해 40여 년간 쿠바의 스파이로 활동해 왔던 사실이 드러나 체포됐다. /AP 연합뉴스

공소장에 따르면 연방수사국(FBI)은 지난해 로차가 쿠바 측의 스파이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수사관을 쿠바 총첩보국 요원인 것처럼 위장시켜 은퇴 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살고 있던 로차에게 접근시켰다. 로차는 “칠레에서부터 우리(쿠바)를 많이 도와주신 것으로 안다”는 FBI 수사관의 말에 경계심을 풀고 만남에 응했다고 한다.

‘칠레’는 로차를 체포하기 위해 FBI가 내건 미끼였다. 로차는 국무부 재직 당시 도미니카공화국·온두라스·멕시코 등 여러 중남미 공관에서 일했지만, 칠레에서 근무한 적은 없었다. FBI가 로차가 과거 비밀리에 칠레를 방문해 쿠바 총첩보국과 관계를 형성했다는 정보를 알고 수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로차는 “칠레를 얘기하는 것을 보면 당신은 무슨 말을 들은 것이 틀림없다. 그 말에 신뢰를 갖게 됐다”고 말하며 FBI 위장 수사관에게 친밀감을 표시했다.

상대방을 ‘쿠바 총첩보국 후배’로 완전히 믿은 로차는 “몇 년이나 (쿠바 스파이로) 일했나”라고 묻자 “약 40년”이라고 답했다. FBI 위장 수사관이 ‘아바나’를 언급하자, 그는 “우리는 절대 ‘아바나’라고 말하지 않고 ‘그 섬’이라고 부른다”며 “만약 누군가 우리를 배신해서 적(미국)의 방첩기관에 말한다면…”이라고 상대를 조심시키기까지 했다. “국무부에는 어떻게 들어갔나”는 질문에는 “본부가 함께했다. 긴 과정이었고 쉽지 않았다”고 답했다. 국무부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쿠바 총첩보국에 포섭돼 있었다는 뜻이다.

콜롬비아 태생인 로차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공공행정)와 조지타운대(국제관계) 박사학위를 받고 1981년 국무부에 들어가 2002년 볼리비아 대사를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중남미통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특히 적성국가인 쿠바 관련 업무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기였던 1994년 7월부터 1년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남미 국장으로 파견돼 쿠바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1995년 7월부터 2년간 주쿠바 스위스대사관 내의 미국 이익대표부에서 부대표 역할을 했고, 국무부 은퇴 후인 2006~2012년에는 쿠바를 관할하는 미군 남부사령부의 자문역을 지냈다. 이 기간 로차가 무슨 정보를 유출하고 어떤 임무를 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그는 FBI 위장 수사관에게 “내가 했던 일들은 혁명을 공고화하는 것이었다”며 “우리가 한 일은 엄청났다. ‘그랜드 슬램’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로차는 FBI 수사관과의 대화에서 시종일관 미국을 “적”으로, 쿠바와 자신을 “우리”로 표현했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사령관’, 쿠바 총첩보국 연락관들은 ‘동지들’이라고 불렀다. FBI 위장 수사관이 “(쿠바 총첩보국) 본부는 당신이 여전히 ‘동지’란 점을 확신하고 싶어한다. 아직도 우리 편이냐”고 묻자, 로차는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화가 난다. 내가 아직도 남자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발끈할 정도로 쿠바 공산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는 또 “본부가 나에게 평범한 인생을 살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우익(right-wing) 인사로서의 인격(legend)을 창조했다”고도 말했다. 스파이 세계에서 ‘레전드’는 주변을 속이기 위해 꾸며낸 신원이나 인격을 뜻한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기였던 2015년 쿠바와의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재수교했다. 그러나 조 바이든 행정부가 2021년 5월 쿠바를 북한·이란·베네수엘라·시리아 등과 함께 대테러 비협력국으로 지정하는 등 미 정부는 여전히 사실상 적성국으로 대하고 있다. 메릭 갈런드 미 법무부 장관은 이번 사건에 대해 “외국 요원이 미국 정부의 가장 고위직까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침투한 사례 중 하나”라고 말했다. 앞서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스파이 사건으로는 FBI 방첩요원으로 일하며 1985년부터 2000년까지 러시아 스파이 노릇을 했던 로버트 핸슨이 있다. 지난 6월 감옥에서 숨진 핸슨은 영국 MI6에 침투해 소련의 간첩으로 일한 킴 필비를 동경해 14세 때부터 러시아 스파이를 꿈꿨으며, 미국의 핵전쟁 대비 전략까지 러시아에 넘겼다.

미국 국방정보국(DIA) 분석관으로 20년간 일하며 쿠바 내 미국 스파이 명단 등을 쿠바에 넘겨줬던 아나 몬테스(65)도 유명하다. 몬테스는 레이건 정부가 니카라과의 우파 반군을 지원한 데 분개해 쿠바를 돕기로 결심했고, 쿠바 측에 포섭된 상태에서 국방정보국에 들어가 2001년 체포되기까지 쿠바에 정보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