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부산 동의과학대에서 열린 ‘2023학년도 학위수여식’에 정명희(왼쪽)씨가 딸(오른쪽)과 함께 참석해 남편 권세영씨의 명예 학위 증서를 받는 모습. 정씨 부부는 지난 2022년 이 대학에 함께 입학했지만, 남편 권씨는 입학 후 1년을 못 채우고 구강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동의과학대

“처음엔 손잡고 입학했지만, 남편은 무엇이 급했는지 졸업도 하지 않고 먼저 하늘로 떠났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졸업식은 이렇게 함께할 수 있게 돼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지난 7일 부산 동의과학대 학위 수여식. 학사모를 쓴 졸업생 정명희(67)씨가 졸업식 연단에 올랐다. 정씨의 목에는 남편 고(故) 권세영씨 사진이 걸려 있었다. 부부는 지난 2022년 이 대학에 함께 입학했다. 하지만 권씨는 그해 12월 구강암으로 70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날 동의과학대는 아내 정씨에겐 학위증을, 남편 권씨에겐 명예 학위증을 수여했다. 김영도 총장은 정씨에게 학위를 전달하며 “부부가 나란히 입학해 명예 학위로 고인을 기린 것이 뜻깊다”고 했다. 이 대학에서 고인에게 명예 학위증을 수여한 건 1973년 개교 이래 처음이다.

수여식을 마친 정씨는 명예 학위증을 들고 남편이 봉안된 부산추모공원을 찾았다. 납골당에 학위증을 내려놓은 정씨는 “아픈데도 참 열심히 공부하셨나봐”라며 “자기가 내일모레 떠날 줄도 모르고”라고 했다. 권씨의 납골당 위패에는 자신이 적은 졸업 축하 카드를 꽂았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라요’라고 적었다. 정씨는 “우리 아저씨가 받는 졸업장인데 이 정도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지난 7일 부산추모공원에 있는 고(故) 권세영씨의 봉안당에 아내 정명희씨가 명예 학위 증서를 펼쳐 보이는 모습. 정씨는 이날 졸업식 직후 남편의 봉안당을 찾았다. /정명희씨 제공

정씨는 40년 넘게 부산 연제구에서 개인 미용실을 운영했고, 남편 권씨는 부산의 한 은행 건물에서 주차 관리 업무를 했다. 초등학교 졸업장만 갖고 있었던 부부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고 한다. 지난 2020년 부산 경호고등학교에서 운영하는 ‘성인 만학도 과정’에 함께 입학해 2년 만에 고등학교 6학기 과정을 이수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2학번’으로 동의과학대에 입학한 부부는 서로 다른 전공을 골랐다. 정씨는 한방약재과, 권씨는 사회복지요양서비스과를 선택했다. 정씨는 나이가 들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권씨는 요양 분야 전문 지식을 배우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 권씨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구강암 진단을 받았다. 권씨는 투병 생활 중에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업이 있는 토요일마다 아침 일찍 등교해 밤 10시까지 공부하고, 온라인 강의까지 들었다. 1학년 생활 내내 병마와 싸우던 그의 곁엔 아내 정씨가 있었다. 남편을 간호하던 그는 급성 녹내장을 앓고 한쪽 눈이 실명돼 시각장애인이 됐지만, 정씨 역시 학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미용실 손님은 이틀 동안 몰아서 예약받고, 일주일에 네 번 학교에 가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수업을 들었다.

지난 13일 오후 부산 기장군 부산추모공원에서 정명희(67)씨가 70세의 나이로 고인이 된 남편 고(故) 권세영씨의 봉안당에 명예학위증서를 올리고 있다. 고인은 입학한 지 1년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났다. /김동환 기자

정씨의 지도교수인 동의과학대 한방약재과 김현정 교수는 “권씨가 투병하던 1년 동안 성심을 다해 간호하던 정씨의 모습을 보며 안타깝고 짠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학위 수여식을 보며 눈물이 흘렀다”며 “시각장애를 겪는 와중에도 2년간의 학업을 마친 정씨의 사연이 다른 학생들에게도 전해져 동기 부여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씨는 대학에서 배운 한의학 지식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은 미용실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단순하게 약차(藥茶)를 대접했지만, 이제는 한의학 책을 한 번이라도 더 읽어보고 내어주게 된다”며 “몸이 불편하거나 한약에 관심 갖는 사람들에게 한방 지식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고 했다.

‘전문학사’ 학위를 받은 정씨는 앞으로도 학업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올해 신라대 음악대학 3학년 편입에 성공했다. 그는 “같은 클래식을 들어도 더 많이 배우고 나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더 넓어지지 않겠느냐”며 “나에게 맞는 악기를 찾아 공부하면 마음의 여유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중에는 대학원까지 꼭 다녀보고 싶다”고 했다.

정씨는 만학도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우리 세대에는 초등학교만 나오거나, 검정고시를 칠 여력이 되지 않아 원하는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며 “이 나이에도 대학에 다닐 수 있다는 걸 보여줘 꼭 용기를 주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