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서울 관악구의 한 식당에서 이순금(왼쪽에서 셋째)씨 가족과 이일해(가운데)씨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손가락 하트를 만들고 있다. 1983년 교통사고를 당한 이씨 가족은 이날 당시 도움을 받았던 이일해씨를 40여 년 만에 만나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현준 기자

1983년 11월 24일 새벽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파출부 일을 하던 이순금(당시 42세)씨가 환경미화원이던 남편 김일만(당시 46세)씨를 도우러 나갔다가, 부부가 함께 시내버스에 치여 중상을 입었다. 이 소식은 이튿날 조선일보 사회면에 자그마한 크기로 실렸다.

사고로 남편은 숨졌고, 아내는 1년 넘게 입원해야 했다. 부부에겐 2녀 2남이 있었다. 당시 신문은 ‘김씨 부부가 입원한 영등포구 신길동 성애병원에는 동료 청소원과 동네사람들이 찾아와 상심에 빠진 자녀들을 달래어 집으로 보낸뒤 대신 병석을 지키고 있다’고 전했다.

이때 성애병원 인근에 살던 이일해(78)씨가 신문을 보고 달려왔다. 공군 장교 출신으로, 공군 자녀 기숙사의 사감으로 일하고 있던 이씨는 숨진 김씨의 장례를 돕고, 아내 이씨가 교통사고 보상금을 받도록 도왔다. 특히 중고생이던 4남매의 끼니를 1년 넘게 챙겼다. 김씨 가족에게는 그야말로 의인(義人)이었다.

“덕분에 아이들을 이렇게 잘 키웠어요. 늦었지만 감사합니다.”

지난 3일 이일해씨와 김씨 가족들이 서울 관악구 한 식당에서 만났다. 40여 년 만에 첫 만남이다. 이순금씨는 여든이 넘었고, 자녀들은 쉰을 훌쩍 넘긴 중년이 됐다. 가족은 이일해씨를 보자마자 손을 맞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큰아들 종철(56)씨는 “앞날이 캄캄하던 우리를 구하신 분이다. 늦게나마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이순금씨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인 사감님이 우리를 왜 돕는지 이상하다는 친척도 있었지만, 진실된 모습에 결국은 모두들 감사하게 됐다”며 “사감님이 없었으면 엉망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씨 가족은 1979년 경남 거창군에서 농사를 짓다 4남매 교육을 위해 상경했다. 불과 4년 만에 불행이 닥친 것이다. 이씨의 사고 보상금으로 구한 봉천동 작은 빌라가 남은 가족의 터전이 됐다. 이씨는 반찬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어나갔고, 자녀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도왔다. 4남매는 반듯하게 자라 공무원도, 대기업 연구원도 됐다.

이일해씨는 “그저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달려갔는데 딱한 처지를 보고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면서 “어려운 환경에서도 4남매가 잘 성장해줘 고맙고,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줘서 더 고맙다”며 울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