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한모(52)씨는 소주병을 손에 들고 서울 송파구 천호대교 난간에 올라섰다. 식당 사업이 망한 뒤 서울역 주변에서 노숙 생활을 하다가 “이대로 살아서 뭐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던 한씨는 극단적인 선택 직전에 경찰과 소방의 도움을 받아 구조됐다. 이후 한씨는 노숙인 지원 센터와 거리를 오가며 지냈다. 그러던 중 지난해 6월 지원 센터 직원의 권유로 우연히 ‘인문학 수업’을 듣게 됐다. 서울시가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했거나 고아원 생활을 못 이겨 뛰쳐나온 노숙인 등을 대상으로 열고 있는 ‘희망의 인문학’ 강의였다. 한씨는 “신세 한탄만 하는 과거는 잊고 다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며 “이제는 인문학 책을 읽는 게 취미가 됐고, 인문학 강의 때 보조 강사 역할도 맡고 있다”고 말했다.
30일 오전 서울 동작구 숭실대 벤처중소기업센터에서 ‘2024년 희망의 인문학’ 입학식이 열렸다. 올해 입학생은 총 1000명. 6~9월까지 주 1~2회, 하루 3~4시간씩 강의를 듣고, 학생 식당에서 서울시가 마련한 무료 식사도 할 수 있다. 강의는 숭실대를 비롯해 서울시립대, 노숙인 지원 시설 등에서 돌아가며 진행하고, 강의 주제는 역사와 문학, 철학, 가족, 사랑, 체육 등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특히 올해는 수업이 끝난 뒤 바리스타나 호텔 청소 등의 일자리를 가질 기회도 제공한다.
서울시가 운영하고 있는 ‘희망의 인문학’ 강의는 2008년 “삶이 힘겨워 자립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오세훈 시장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박원순 전 시장 재직 기간 중단됐다가 오 시장이 다시 시장이 되면서 2022년 재개됐다. 지금까지 5000여 명이 이 수업을 수료했다. 오 시장은 “삶을 포기하다시피했던 취약 계층이 다시 일자리를 찾고 노숙 생활을 정리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고모(49)씨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가출하는 바람에 다섯 살 때부터 고아원에서 지냈다. 오빠도 고아원에서 도망치고, 함께 퇴소한 언니와는 헤어져 생사도 모르고 지낸다. 두 차례 결혼 실패와 가정 폭력으로 결국 세 살배기 아들과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노숙인 시설과 길거리를 전전했다. 그러나 지난 2022년 서울시립대에서 희망의 인문학 수업을 듣고서 새로운 꿈이 생겼다. 고씨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사를 들으며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며 “방 두 개가 있는 집에서 아들과 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강의도 신청해 경제 교육 특강을 들었고, 얼마 전부터는 은행 적금도 들었다.
40대 A씨는 스무 살 때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계모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고시원에 머물며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면 외톨이인 그에게는 모두가 경계 대상이었다. A씨는 신경안정제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로 예민하고 불안해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네, 아니요” 정도의 단답밖에 못 할 정도였다. 그에게 인문학 수업은 마흔이 훌쩍 넘어 대인 관계를 배우는 첫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수업 시간이면 손을 들고 스스로 발표를 할 정도가 됐다. 친구들을 만나면 웃으면서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도 한다. 최근에는 거동이 어려운 시설 친구의 팔짱을 끼고 병원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그는 “인문학 수업을 듣고 내 삶을 기록하는 에세이도 써봤다”며 “자존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아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