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쯤 김덕영 감독은 어느 저녁 자리에서 박찬욱 감독으로부터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일흔 된 루마니아 할머니가 헤어진 북한 남편을 수십 년째 기다린대요. 다큐멘터리로 한번 만들어보지 그래요?” 박 감독의 권유를 받은 김 감독은 반신반의 심정으로 할머니를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만난 주인공은 제오르제타 미르초유(당시 70세)씨. 할머니는 젊은 시절, 루마니아로 건너왔던 북한 아이들을 가르쳤다. 현지에서 촬영을 마치고 나서려는 김 감독에게 할머니가 말했다. “그런데 김 감독, 알고 있어요? 아이들은 루마니아에만 있었던 게 아니에요.” 북한 전쟁 고아들의 눈물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 20년 추적의 시작이었다.
6·25로 부모를 잃은 북한 고아들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판이 25일 개봉한다. 2020년 6월 공개했던 내용에 최근 입수한 자료를 추가해 다시 선보인다. 김 감독은 아내 임수영 프로듀서와 함께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체코 등을 돌며 각국 기록보관소에서 먼지를 쓰고 있던 흑백 필름을 대거 발굴했다.
다큐는 미르초유 할머니의 사연과 북한 고아들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6·25 이후 북한 고아 5000여 명은 위탁 교육 명목으로 동유럽으로 보내져 집단 수용됐다. 동유럽에서는 공산권 연대를 과시하려 아이들을 받아들였다. 아이들은 1950년대말 동구권의 자유화 바람을 우려한 북 당국에 의해 전원 송환됐다. 수년간 현지 교사·친구들과 지내며 혈육 같은 애정이 자랐으나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아이들을 관리하던 루마니아 북한 학교 교사가 미르초유 할머니, 교장이 남편 조정호씨였다. 둘은 4년간 비밀 연애 끝에 1957년 북한과 루마니아 당국의 허락을 받고 결혼했다. 1959년 9월 귀국 명령을 받은 조씨를 따라 미르초유씨도 평양에 갔다. 그곳에서 딸 조미란(64)씨를 낳았다. 찰나의 행복은 긴 이별의 시작이었다. 숙청당한 남편은 탄광으로 끌려갔다. 생계가 막막해진 미르초유 할머니는 딸을 데리고 쫓기듯 루마니아로 돌아갔다.
남편은 1977년 ‘신산의 탄광으로 이주한다’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죽었다면 유골이라도 찾게 해달라”고 앰네스티 등 인권 단체에 호소문을 보냈으나 무소용이었다. 할머니는 남편이 보고 싶을 때마다 종이를 꺼내 한글 단어를 적었다. 한국말을 오래 안 쓰다 남편을 다시 만나면 말문이 막힐까 두려웠다. 눈물로 눌러 쓴 노트가 쌓이다 보니 어느새 단어가 16만개. 할머니의 노트는 ‘루마니아 한국어 사전’으로도 발간됐다. 김 감독은 “할머니의 한글 노트를 보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미르초유 할머니 얘기는 김 감독이 TV 다큐로 제작해 지상파에서도 방영했다.
애끊는 이별은 북한 고아들에게도 닥쳤다. 하루아침에 북으로 돌아가야 했던 아이들은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던 교사와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그들은 북송된 후 종종 편지를 보내왔으나 1962년 서신 교환이 금지되며 생사조차 알 길이 없게 됐다. 최근 발굴된 한 아이의 편지는 그 무렵의 간절한 심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머니, 아버지 도망치고 싶어요. 도망치려 했지만 국경선 넘어가니 너무 추워서 돌아왔습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김 감독은 불가리아 마을에서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옛 동창들을 만났다. 마리아 야말리에바씨는 “귀송 열차를 타고 떠나던 김진수와 껴안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불가리아 동창들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불렀다.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장군 만세’라고 흥얼거리며 “북한 아이들과 날마다 같이 불러 지금도 외울 수 있다”고 했다. 김 감독은 “아흔인 미르초유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신 걸로 알고 있다”며 “이 다큐를 통해 자유의 소중함이 더욱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