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틴과 BTS에 빠져서 한국어를 전공했어요.(아라키 미노리·22)” “일본 애니 특유의 감성이 좋아 ‘기미노 나와(君の名は·너의 이름은)’를 두 번이나 봤어요(노승언·26·충북대 의학과 졸업).”
지난달 22일 일본 오사카(大阪) 긴키대(近畿大) 히가시오사카 캠퍼스에서 한일 청년들이 만났다. 이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졸업·재학생 29명과 조선일보와 외교부가 공동 주최하는 ‘청년 신(新)조선통신사’ 한국 대원 20명이었다. 이들은 K팝과 일본 애니메이션 등을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금세 가까워졌다. 스즈카 나호(22)는 “재일교포셨던 할아버지와 동방신기를 좋아하셨던 할머니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청년 신(新)조선통신사’는 올해로 7회째다. 코로나와 노 재팬(No Japan) 운동 등 여파로 2019년 중단됐다. 신조선통신사 한국 대원들과 일본 청년들이 만나 교류한 것은 5년 만이다. 신조선통신사 청년들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파견됐던 조선통신사의 경로를 따라 지난달 20일 부산항에서 페리로 출발, 11시간 만에 일본 시모노세키에 닿았다. 이후 손승철 강원대 명예교수 인솔 하에 히로시마·후쿠야마·오사카·교토·시즈오카·하코네 등을 거쳐 도쿄에서 8박 9일 여정의 막을 내렸다.
16세기 동북아 판도를 바꾼 임진왜란(1592~1598). 조선이 비록 승전했지만 인구의 20%인 200만명이 희생됐다는 추산이 나올 만큼 처참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은 종전 9년 뒤인 1607년(선조 40년)부터 국교를 재개했다. 조선은 통신사(通信使·왕의 뜻을 전하는 사절단)를 1811년(순조 11년)까지 12회에 걸쳐 파견했다. 통신사가 가는 곳마다 성리학 등을 배우려는 일본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조선·일본 양측에서 남긴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긴키대 일본인 교수·학생들은 ‘최초의 한류’라는 평가를 받는 통신사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으며 ‘한일 친선’을 강조했다. 사카와 야스히로(50) 교수는 “약 30년 전 학부생 때 서울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와 지금도 교류하고 있다”면서 “오늘 단 하루에 그치지 않고 만남을 지속하면서 양국의 우호 관계를 수놓는 징검다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히가시 도모야(22)는 “공항 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다 만난 한국인들을 보면서 한국 패션과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 여행만 5번 이상 가봤다”며 “한국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후 대원들은 일본 시즈오카(静岡)현의 사찰 세이켄지(淸見寺)를 찾았다. 정원에 1643년 조선통신사 일행이었던 박안기가 남긴 ‘경요세계(瓊瑤世界)’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치조 분쇼 주지스님은 “이는 ‘두 옥구슬이 서로를 비춘다’는 의미로 조선과 일본이 서로 신뢰하고 교류하면서 좋은 관계가 되자는 의미가 있다”며 “이는 지금도 유효한 정신이다”라고 했다. 한국 대원들은 이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원들은 이에 앞서 23일 교토(京都)의 귀무덤(耳塚·미미즈카)을 방문했다. 임진왜란 때 희생된 조선·명나라 사람 12만6000명의 귀와 코가 묻혀 있다. 침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무장들에게 전공(戰功)을 증명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인 뒤 전리품으로 본국에 보내게 했다. 김호영(24·단국대 정치외교학과)씨는 “책으로만 접했던 역사의 참상이 생생하다”며 “오늘날 한일 친선의 뒷면에 이런 아픈 과거가 있다는 사실도 결코 잊으면 안 되겠다”고 했다.
윤덕민 주일대사는 “한일 관계가 최근 전방위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며 “양국 청년들의 교류는 후퇴하지 않는 한일 관계를 위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