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서울 서초구 엘타워에서 열린 민사실무연구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전·현직 대법관들이 함께 기념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민일영·박일환·변재승 전 대법관, 서경환 대법관, 김용담·양창수·김재형 전 대법관. /민사실무연구회

“제 한 몸으로 흥행에 성공할 수만 있다면 해야죠.”

권영준(54) 대법관이 바이올린을 들고 서자 청중은 숨죽였다. 권 대법관은 세 곡을 연주했는데, 그중 한곡은 결혼식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사랑의 인사’였다.

지난 8일 서울 서초구 엘타워에서 열린 ‘민사실무연구회’ 창립 50주년 기념 행사의 ‘흥행’을 위해 용기를 냈다. 권 대법관은 “서경환 대법관께서 바이올린 연주를 제안했을 땐 순간 당황했다”며 “’사랑의 인사’는 제가 결혼할 때 직접 연주했던 곡이기도 하다”며 웃었다.

권 대법관은 바이올린이 ‘특기’다. 유년 시절 바이올린 활을 잡은 뒤 대구 청소년교향악단 단원으로도 활동했다. 법관으로 근무할 때도 음악가들과 함께 자선 공연에 참여했고, 수원쳄버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를 맡기도 했다.

민사실무연구회 창립 50주년 행사에서 권영준 대법관이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는 모습. /박강현 기자

올해로 50돌을 맞은 민사실무연구회는 1974년 7월 8일 방순원·이재성·김상원·윤일영·박우동 전 대법관과 이시윤 전 헌법재판관이 민사 재판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주제를 연구·발표하자며 만들었다. 법원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판사들의 ‘연구 모임’이다. 회원 수만 780여 명에 이르고, 지난달까지 무려 454차례 연구 발표회를 가졌다. 민사실무연구회 관계자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실무 법학 중심의 연구회”라고 했다.

이날 행사에는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서경환 대법관과 권영준·신숙희 대법관, 변재승·김용담·박일환·양창수·민일영·김재형·안철상 전 대법관 등 전현직 대법관 10명을 비롯해 회원 70여 명이 참석했다. 서 대법관은 “오늘은 저희가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행보를 다짐하는 뜻깊은 자리”라며 “창립 50주년 자리를 빛내준 회원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법조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조언도 이어졌다. 김용담 전 대법관은 축사에서 “돌이켜 보면 1974년에 우리나라의 법학이나 실무 수준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매우 빈약했다”면서 “그때의 환경을 생각하면 그분(창립자)들의 소박하지만 간절했던 소망과 결연한 의지가 읽힌다. 이 토대 아래서 우리나라 법학 실무 분야가 오늘과 같은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렇지만 사법에 대한 도전 또한 그치지 않고 있다. 법을 무시하고, 재판을 압도하려는 세력들이 기세와 횡포를 부리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선 더 거칠어졌다고 느끼게 된다”면서 “외부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용기 있고 올바르게 재판하기를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와 기세 또한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참석자 중 가장 원로 격인 변재승 전 대법관은 “역사상 최초로 인간은 변화 그 자체를 인간 삶의 영구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초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며 “인공지능이 재판 실무와 법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진 당장 예측하기 쉽지 않지만 인공지능의 시대엔 창의성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소통과 공감 능력이 앞으로 더욱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박일환 전 대법관은 “100주년에도 다시 만납시다”라고 건배사를 했다.

민사실무연구회 간사를 맡고 있는 박동규 대법원 재판연구관은 “권 대법관의 빼어난 연주 실력에 감탄했다. 섬세한 악기를 통해 교감해볼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며 “연구회가 앞으로도 실무 법학 연구를 선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