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부르던 도라지 타령이 아직도 귀에 맴돌아요. 할머니는 한국어만 할 줄 아셨고, 저는 러시아어만 할 줄 알아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지만 할머니 한국어가 어찌나 듣기 좋았는지...”

지난 18일 정오쯤,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대 교수회관 세미나실에서 연수 중인 고려인 한국어 교사들이 참여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본선 경연이 끝나고 고려인 한국어 교사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보경 기자

지난 18일 오전 10시 한국외대 서울캠퍼스 교수회관에 한 여성이 잔뜩 긴장한 몸짓으로 단상에 오르자 청중 좌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청중은 직접 꾸민 머리띠를 쓰고 한 손엔 풍선, 다른 손엔 “우리 나탈리 최고” 등 문구를 써서 붙인 수제 포스터를 들고 발표자 이름을 연호했다. 발표자가 어색한 미소를 띤 얼굴로 첫 인사를 내뱉자, 환호하던 청중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두 손을 맞잡고 진지한 눈으로 발표 자료를 응시하는 청중 앞에서 발표자는 한국어 말하기 실력을 뽐냈다.

이날 열린 행사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4개 CIS(독립국가연합) 지역의 고려인 출신 한국어 교사들이 참가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본선 경연이었다. 재외동포청 산하 재외협력센터가 지난 5일부터 25일까지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대 서울캠퍼스에서 마련한 초청 연수 행사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2000년부터 진행된 초청 연수 행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및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되다, 5년 만에 대면으로 열렸다. 고려인 한국어 교사들은 연수 기간에 다녀온 한국의 명소나, 한국인의 ‘밥 한 번 먹자’는 ‘빈말 문화’ 등 직접 보고 느낀 한국에 대해 주로 발표했다.

발표가 끝난 후 만난 고려인 한국어 교사들은 “마음 아픈 이주 역사와 한국어가 우리의 뿌리”라고 입 모아 말했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이올가(29)씨는 고려인 5세대다. 이씨는 “할머니가 4살 때 (고조부모가) 기차 안에 있던 나무통에 이불을 깔고 그 위에 어린 6형제를 눕혀 추운 밤을 달려 왔다는 이야기를 아버지께 들었다”면서 “슬프지만 ‘우리가 왜 여기 있나’에 대한 이야기이고 한국이 뿌리라는 것이 자랑스럽기에 내 아이에게도 꼭 전해줄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에서 온 이나탈리야(50)씨는 “아버지는 강제이주 역사를 혼자 고통스럽게 간직하고 계시다가 내가 스무살이 되어서야 ‘너의 모국어는 한국어’라고 말해주었다”면서 “아버지가 복잡한 표정으로 꺼내 놓는 이주 이야기를 듣다 보니 원래 진학하려던 의대를 포기하고 한국어학과에 진학하기도 했다”고 했다. 가족 행사가 있는 날이면 이씨는 한국어로 축사를 한다. 이씨는 “’축하합니다’ ‘오래 사시길 바랍니다’ 같은 간단한 말만 해도 환호가 터져나온다”고 했다.

3~4세대 고려인 교사들은 한국어를 뒤늦게 배웠다고 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기 전까지는 러시아어만 배울 수 있었고, 한국어를 배울만한 한글 교실이나 시설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들로부터 전해 듣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한국에 대해 알 수 있는 전부였다고 했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김올가(46)씨는 “중학생이었던 1993년부터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웠다”면서 “한국어를 전혀 모르던 어릴 적에 할머니가 불러주시던 ‘도라지 타령’ 노래와 할머니의 한국어가 듣기 좋아 항상 한국어를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카자흐스탄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단체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계이리나(30)씨는 “역사 속 독립운동가들을 보며 나와 내 가족을 넘어 더 거대한 공동체의 평화를 기원하게 된다”고 했다. 계씨는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독립유공자 후손단체 일 하시면 별다른 생각 없이 아버지 일이니 도왔다”면서 “2017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연락해온 사람들이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이라며 아버지가 하신 일의 의미를 알려주자 비로소 나도 이 일을 이어야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재외동포협력센터가 올해 초에 파악한 ‘CIS(독립국가연합)’ 지역의 5개국에서 활동하는 고려인 한국어 교사는 263명이라고 한다. 이들은 한글학교나 비영리기관인 문화교육센터에서 봉사 차원으로 일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21년째 한국어 교사를 하고 있다는 박랴나(63)씨는 “부모가 먼저 한국에 와서 일하고 있으면, 그 자녀들이 한국어와 한국 예절 등 익힌 후 뒤따라 한국에 온다”면서 “형편이 어려우니 학교에 가지 않고 바로 일을 하겠다는 아이들도 있지만, 아이들이 한국에서 돈보다 지식을 앞세울 수 있는 어른으로 크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