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오전 8시 30분 찾은 서울 용산구의 ‘레거시 키친(legacy kitchen)’. 주말 이른 아침부터 20~30대 봉사자 12명이 점심으로 노인들에게 전달할 도시락 재료를 한창 손질하고 있었다. 목표는 도시락 314개. 이들은 양파를 까고, 닭을 손질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 참가자는 양파를 썰던 눈이 매워 키친에 비치된 고글을 쓰면서도 칼을 놓지는 않았다.
빈곤 노인들을 위한 도시락을 만드는 이 행사는 봉사 단체 ‘코리아 레거시 커미티(Korea Legacy Committee·KLC)’가 열었다. 이 단체는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미교포 출신 마이크 김(40·한국 이름 ‘김진’)씨가 2015년 만들었다.
김씨는 한국의 노인 빈곤 문제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2015년 겨울 한국에 왔는데, 잠실역에서 박스를 깔고 앉아 껌을 팔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보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그분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한국이 유산(legacy)처럼 존재하는 건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걸 해결하고자 KLC를 만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2020년 기준 4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초창기에는 도시락을 구매해서 무료 급식소에 보냈었다. 그러다 2022년 6월에 ‘레거시 키친’을 열고 나서는 운영진과 봉사자들이 한달에 6~10번 정도 직접 도시락을 만들어 몸이 불편하거나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주말에는 보통 300인분 이상의 도시락을 만들고 많게는 400인분도 제작한다.
KLC는 봉사자는 물론 후원금을 내는 주체도 20~30대 위주로 꾸려진 MZ 봉사단체다. 2022년 8월부터 꾸준히 도시락 봉사 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KLC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준영(27)씨는 “펀딩을 하는 이들의 70% 이상이 2030 세대이고, 도시락 제작 봉사자도 대부분 젊은이들”이라고 했다.
이날 도시락 메뉴는 밥, 찜닭, 볶음김치, 얼갈이배추볶음, 메추리알조림이었다.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화구의 열기로 실내 온도는 45도까지 치솟기도 했다. 그럼에도 위생모와 팔토시, 장화 등을 갖춰 입은 참가자들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음식이 거의 완성될 즈음에는 “이제 마지막 판이네요, 화이팅”이라며 서로를 격려하기도 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던 직장인 변종규(27)씨는 “재작년 가을쯤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꾸준히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며 “치매를 앓고 계시는 친할머니에 대한 사회의 복지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나라도 어려운 노인들에 대한 복지를 실천하고자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외국인 봉사자도 있었다. 서강대 한국어교육원에 다니고 있다는 인도인 네하 본드베(25)씨는 “친구 소개로 올해 2월부터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봉사를 나오고 있는데, 혼자 살면서 끼니를 거르는 노인들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며 “인도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꾸준히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2시간 30분 남짓의 조리 시간이 끝나고 도시락 314개가 완성되자 배달이 시작됐다. 도시락을 받은 어르신 김모(65)씨는 “다리가 불편한 내게 젊은 친구들이 꾸준히 음식을 가져다 줘 고마울 따름”이라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달 정도 됐는데, 봉사자들이 주기적으로 찾아와주셔서 고맙고, 도시락도 정말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배달을 하는 봉사자들은 어르신들에게 “도시락은 꼭 2시간 이내에 드셔야 한다”며 “드시고 싶은 반찬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KLC는 행사나 기부에만 의존해 후원금을 모은다. 매년 10월에는 갈라파티를 열고 지난달 28일에는 ‘셰프스 나잇(Chef’s Night)’이라는 행사를 열었다. 이는 국내 유명 요리사들이 재료비만 받아 신청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재료비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기부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후원금 모집 행사다. 올해는 매달 개최하고 있는데, 신청이 금방 마감될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이날 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말 아침 시간을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의 끼니를 만드는 데 써서 보람차다는 반응을 보였다. 재료 손질부터 설거지까지 도맡은 김유빈(25)씨는 “올해 2월부터 매주 봉사를 나오고 있는데, 도보 배달을 할 때마다 어르신들이 고맙다며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큰 보람을 느낀다”며 “지금 우리나라의 기틀을 만든 어르신들께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돼주는 밥을 전달할 수 있어 뿌듯하다”고 했다. 경기 안양에서 약 1시간 20분이 걸려 이곳에 왔다는 대학생 안소현(24)씨도 “손목이 안 좋은데 닭 껍질이 잘 잘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면서도 “흘려보낼 수도 있는 주말 아침시간을 투자해 노인 빈곤 해결에 조금이나마 일조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마이크 김씨는 “청년들이 이런 봉사 경험을 통해서 책임감이라는 덕목을 배우고 이렇게 배운 자산들이 또 유산(legacy)처럼 후대에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