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결승에서 엘리슨을 만났다면, 컨디션 좋은 제가 이겼을 거 같습니다. 하하!” 2024 파리 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 금메달 주역. 결승에서 6발을 모두 10점을 맞힌 선수. 이우석(27·코오롱인더)이다. 그에게 사람들은 ‘주몽’이란 별명을 지어줬다.
하지만 남자 개인전 준결승에서 김우진에게 슛오프 끝에 무릎을 꿇었다. 아쉬울 법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동메달 결정전을 이겼다. 지난 13일 경기 안산 코오롱 양궁장에서 만난 그는 “준결승에서 후회 없이 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즐기는 마음으로 동메달전에 임했다”고 말했다. 그는 금1 동1로 첫 올림픽을 마쳤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이미 ‘신궁(神弓)이 될 자질’이라 불렸다. 그러나 이상하게 올림픽과 인연이 없었다. 2016 리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4위로 탈락했고, 2020 도쿄 때는 국가 대표로 뽑혔다가 코로나 사태로 대회가 연기되고 다시 치른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이번이 올림픽 3수다. 그는 “당연히 다음 LA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 따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축하 인사를 많이 받았을 텐데.
“요즘은 길 가다 보면 사람들이 알아봐 주시니 좀 놀랐다. 예전에 알던 친구들까지 모두 카톡이나 SNS(소셜미디어)로 메시지를 보내 너무 많아 못 읽는다.”
-올림픽에서 언제 가장 기뻤나.
“역시 단체전 금메달을 땄을 때였다. 힘든 순간은 없었다(웃음).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포기를 안 했던 게 제일 뿌듯하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나.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때 대표로 출전하지 못했다면 운동을 그만두려고 했다(그는 단체전과 혼성 단체 금메달을 땄다). 그 전까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스스로 정신적으로 이상해진다는 걸 많이 느껴서 이대로 가면 정말 심각해지겠다고 느꼈다. 항저우 가기 전 ‘이번이 정말 마지막 도전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때부터 잘 풀려 자신감을 얻었다.”
-어떤 정신적인 고통이었나.
“2018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 ‘하나라도 금메달을 따겠지’라는 생각으로 갔다. 그런데 단체전은 대만에 졌고 개인전은 은메달이었다. ‘내 자신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의심이 생겼고, 돌아보니 그 의심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연습을 해도 잘 쏘는 거 같은데 확신이 들지 않고 불면증까지 왔다. 이건 사실 부모님도 모르시는 얘기다.”
-단체전 결승전에서 6발 모두 10점을 쐈는데.
“사실 결승전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웃음).”
-긴장해서 그런가. 정말 무아지경이라는 경지에서 활을 쏜건가.
“긴장보다는 몰입했다고 해야 할까. 너무 몰입을 해서 그런지 지금도 기억이 잘 안나고, 경기 후 경기 영상을 보다보니 드문드문 기억이 조금 났다. 김우진 선배도 리우 올림픽 때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 집중을 많이 하면 단기 기억상실증처럼 시합 때 기억이 날아간다고 하더라.”
-단체전에서 서로 열심히 외치고 말하던데 어떤 말을 주고 받은건가.
“보기와 달리 양궁 단체전은 선수들의 합, 호흡이 정말 중요하다. 가령 첫번째인 제가 10점을 쏘면 ‘어디 방향 몇 점 조준하고 쐈는데 10점’이라고 알려준다. 그럼 2번 선수가 그걸 믿고 쏴야하고, 마지막 주자는 1,2번의 정보를 다 모아서 쏜다. 서로 그런 정보를 믿지 못하게 되면 불신감이 생기고 마지막 순번은 더 헷갈리게 된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 단체전은 우리 세 명의 합이 딱딱딱딱 맞아서 너무 좋았다. 처음에는 저희도 순번을 바꾸면서 합이 잘 맞지 않았는데 연습하면서 합을 맞추고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쉽게 비유하자면 축구에서 패스를 탁탁 정확하게 주고받아서 골을 딱 넣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힘든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3수만에 뚫었다.
“우리 양궁 선수들 실력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래서 정말 그날그날 컨디션도 중요하고 운도 조금 따라야 한다. 스스로한테 확신이 없으면 떨어질 확률이 크다.”
-올림픽 전 훈련 중에 가장 큰 도움이 된 훈련은.
“축구장에서 소음 대비 훈련을 했었다. 마침 그날 비가 많이 왔는데 남자팀이 여자팀과의 시합에서 완전히 깨졌다. 통상 남자 선수들이 평균점에서 여자 선수보다 높으니 우리가 원래 쏘던 평균 점수도 쏘지 못한 거다. 그 덕분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미리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양궁 국가대표의 공정한 선발 과정이 화제다.
“확실히 그렇다. 보통 대표 선발전을 ‘체력전’이라고 말한다. 처음에 막 잘하던 선수가 후반에 힘이 빠져서 밑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래서 체력 분배를 잘하면서 전략적으로 임해야 하는데, 그런 게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올림픽에 나가면 정말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 선발전에서 정말 고르고 고른 3명, 그 대회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선수를 선발하고 그만큼 지원을 해주니 선수들이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하는 것 같다.”
-양궁에 빠져들게 된 매력이 뭔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했는데 정말로 ‘양궁하면 치킨, 피자 사준다’는 말에 시작했다. 양궁의 매력은 국민들이 TV로 보실 때 화살이 10점에 맞을 때 느끼는 그 쾌감을 선수들도 똑같이 느낀다. 그 맛에 계속 활을 쏘게 된다. "
-양궁은 언제부터 잘한다고 느꼈나.
“중학교 때 대회에 나가서 스스로는 잘 못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선수보다 20~30점 정도 차이로 1등을 하면서 재능이 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방져보일까봐 어디 말은 하지 않았었다(웃음).”
-뛰어난 양궁 선수는 뭐가 중요한가.
“평정심. 평정심이 제일 큰 재능이다. 양궁은 경기에 들어갔을 때 화내면 다 무너진다. 기술적인 향상은 한계가 있다. 결국 최상위권에서는 생각에 따라서, 마음에 따라서 맞는 점수가 달라진다. 한국 선수들이 유독 외국 선수들보다 심박수가 낮은 건 반복된 훈련을 견디고 통달하면서 평정심을 찾는 것까지 발전한 것이다.”
-원래 긍정적인 성격이라는데.
“그런 부분을 양궁화시켰다. 상대방이 10점을 쏘면 나도 10점 쏠 수 있어. 이런 식으로 마음먹는다든지 계속 긍정적인 좋은 생각을 하면서 경기를 이어가는 거다.”
-양궁화를 따로 만들었다는데 뭔가.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이웅열 코오롱 명예회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회장님이 ‘골프는 골프화가 있고 테니스화도 있는데 양궁화는 왜 없냐’면서 아이디어를 제안해 개발해 주셨다. 의외로 양궁화를 신고 쏘니 점수가 선수들 모두 1~2점 높아지더라. 몸에 안정감이 들고 잔진동이 많이 잡히는 게 느껴졌다. 그런 세세한 도움들이 다 모여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
-김우진 선수한테 아시안게임에서 져서 군 조기 전역을 못했고, 이번에는 개인전 준결승에서 졌는데. 또 한편으로는 존경하는 선배이기도 할텐데.
“김우진 선배는 이번에 3관왕을 한 게 너무 늦게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될 만큼 굉장히 뛰어나고 그만큼 엄청나게 노력하는 선수다. 옆에서 계속 볼수록 배울 점이 너무 많고 재능도 대단하다. 존경해야할 부분이 훨씬 더 많은 선배다. 그래서 3관왕을 달성하셨을때도 오히려 더 많이 축하해줬다.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잘 아니까.”
-김우진을 메시, 본인은 음바페라고 했는데.
“김우진 선배는 메시와 비견돼도 손색이 없다. 난 사실 햇병아리다. 음바페라고 했던 건 메시를 쫓는 음바페처럼 김우진 뒤를 쫓아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롤 모델로 삼는 선수가 있나.
“오진혁 선배다. 런던 올림픽에서 힘든 상황에서도 개인전 금메달을 따는 모습이 멋졌다. 위기에서 더 빛난다고 해야 할까. 다른 종목에선 손흥민이다. 잘할 때나 못할 때나 훈련을 많이 하고 그런 부분에서 저도 따라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영감을 많이 받고 대단하다고 느낀다.”
-소속팀 감독님이 지독한 연습벌레라고 하던데.
“밥벌이니까(웃음). 농담이고 양궁이 제 직업이니 직업 정신을 발휘하는 거다. 그렇게 연습을 해야 실력이 늘고 유지되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 안 할 수가 없다. 쉬면 실력이 떨어진다.”
-평소엔 훈련장과 숙소만 오간다고 들었다. 쉴 땐 주로 뭘하나.
“컴퓨터 게임을 많이한다. LOL이나 축구 게임은 머리 아파서 못한다. 주로 총 싸움 게임을 한다.”
-양궁이 올림픽 때만 주목받는 게 아쉽지 않나.
“사실 올림픽 다녀오면 길어야 6개월, 짧으면 한 두달이면 잊혀진다는 인식이 양궁선수들 사이에도 있다.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성적을 잘 내려고 굉장히 열심히 준비하는데 매스컴을 많이 타는 건 올림픽이다보니 그런 듯 하다. 하지만 선수들은 항상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한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한다.”
-양궁 팬들 입장에선 평소에 어떻게 대회 같은 걸 챙겨볼 수 있나.
“대한양궁협회 인스타와 유튜브를 구독하시면 된다. 대회 일정, 영상을 다 볼 수 있습니다, 하하!”
-양궁은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을 텐데.
“물론이다. 답답할 때도 많다. 노력보다 결과로, 단편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걸 다 이기고 선발된 선수들이라 당연히 견뎌내야 한다고 본다. 후배들에게도 압박감은 잊고 본인이 최고 퍼포먼스를 한다는 생각으로 준비하라고 말한다. 여자 대표팀이야말로 더 대단하다. 10연패라는 압박이 주는 무게감과 스트레스가 엄청 났을 텐데 훈련하면서 그걸 이겨냈다.”
-양궁 선수로서의 목표는 무엇인지.
“양궁선수로의 꿈은 올림픽 금메달이지만 최종 목표는 국가대표 양궁선수로서 사람들에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계속 꾸준히 대표팀에 선발되고 계속 올림픽에 나가야하지 않겠나. 당연히 다음 LA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 따는 게 목표다(웃음).”
인터뷰가 끝난 뒤 인사를 나누며 본 이우석 선수는 키 180cm가 훌쩍 넘는 모델처럼 보였다. 돌아와 프로필을 찾아보니 그의 키는 175cm. 키 178cm인 기자보다 월등히 커보였기에 분명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다시 연락하니 “1cm 더 자라서 지금은 176cm”라는 답이 왔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크게 보이게 했던걸까.
☞이우석
2024 파리 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동메달리스트. 인천인수초-만수북중-인천체고를 나와 2016년부터 코오롱 양궁팀에서 활약했다. 상무 시절 2018 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땄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금2 동1을 땄지만 올림픽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