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지 않을래요. 아파요. 지금 너무 신나고 행복해요. 지난 고생을 다 보상받는 느낌이랄까.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고생했어요.”
지난달 파리 올림픽에서 간절히 바라던 메달을 목에 건 여자 탁구 대표 전지희(32)는 감회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올림픽 끝나고 푹 쉬었다”면서 동메달을 꺼내 들고는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면서 웃었다.
“2022년 무릎 부상이 와서 계속 고생했어요. 소속팀 계약 문제로 상처도 많이 받았죠.(그는 당시 포스코에너지에서 미래에셋으로 옮겼는데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에 새 둥지를 찾는 데 애를 먹은 바 있다.) 은퇴까지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작년 남아공 세계 대회에선 대회 도중 통증이 심해져 복식 파트너 신유빈에게 “미안한데 더 하기 어려울 거 같다”며 중도 기권하기도 했다.
전지희는 “그래도 믿고 도와준 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은퇴를 고민할 때 지금 소속팀(미래에셋증권) 김택수 감독님께 전화가 걸려 왔어요. 대뜸 ‘할 마음 있냐’ 물으시길래 ‘탁구 하고 싶다’고 했더니 몸 상태 같은 건 묻지도 않으시고 ‘그럼 된다. 메달 딸 수 있다’ 하시는데, 그냥 믿어주시는 그 말에 힘이 번쩍 났어요.”
완치가 어렵다는 진단도 있었지만 더 강한 훈련과 회복 프로그램으로 통증을 관리하며 생애 세 번째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냈다. “마지막 단체전 단식 동메달 결정되는 포인트를 따낸 순간이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있어요. 많은 사람, 관중, 코치분들이 일어나서 환호하고 축하해 주는, 그 장면보다 더 멋진 화면을 만들 수 있을까요. 도와주신 분들도 행복하게 해드린 거 같아 너무 기뻐요.”
중국 허베이성 출신인 전지희 원래 이름은 톈민웨이. 중국 청소년 대표 2군까지 갔지만 18세였던 2010년 한국에 넘어와 대한민국에 귀화했다. 한국말도, 한국도 잘 몰랐지만 무작정 탁구를 위해 택한 길이었다. 전지희는 “당시 중국에선 국제 무대로 갈 희망이 안 보였다. 세계 무대에서 뛰는 탁구 선수가 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고 했다. “한국인이 되지 않았다면 탁구 선수 전지희는 없었을 거예요. 중국에 있었다면 생활체육 쪽에서 머무르지 않았을까요. 한국인으로 살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기쁘죠.”
한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귀화 선수는 당연히 한국 선수보다 월등히 잘해야 한다’는 말이 항상 따라다녔다. 전지희는 “한국도 탁구 강국이다 보니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면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고 했다.
생소한 한국 문화도 난관이었다. 처음 김치찌개를 먹고 연습을 하는데 위가 불타는 느낌이 들어서 깜짝 놀랐다. 그는 “중국은 선수들끼리 친구처럼 지내는 분위기라 한국 선후배 문화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선배가 되니 편한 면도 있다”고 전했다.
귀화한 지 어느덧 13년이 넘었다. 그는 “중국 탁구 인기가 워낙 높다 보니 사실 중국 팬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인터뷰에서 ‘한국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걸 본 어떤 중국 팬들은 ‘배신자’라고 하고, 또 중국도 좋다고 하면 한국분들 중에서 ‘역시 중국인’이라고 해요. 다 귀화를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지금은 많이 내려놨지만 아쉽죠. 정말 탁구만 보고 선택한 건데. 두 나라가 좀 더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국내 무대를 석권하며 한국 탁구 내 최강자로 올라선 전지희였지만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전성기라 생각한 도쿄 올림픽에서도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신유빈과 여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번 올림픽에선 단체전 동메달을 따내면서 숙원을 풀었다.
전지희는 “처음 만났을 땐 너무 꼬마 같고 아기였던 유빈이인데 이번 올림픽에서는 (오히려) 의지를 많이 했다”면서 “유빈이는 다음 올림픽, 다다음 올림픽에서 반드시 중국이라는 벽을 넘어줄 선수”라고 강조했다.
“톱 레벨 선수가 되려면 승부처에서 과감하게 치고 나가는 담대함과 용기가 꼭 있어야 돼요. 그런 면에서 유빈이는 대단한 자질을 갖고 있어요. 어떤 선수는 은퇴하기 전까지도 그런 과감한 승부를 못 해요.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보면 손을 벌벌 떠는 선수도 봤어요. 하지만 유빈이는 승부에서 정말 담대하고 강해요.”
요즘 좋아하는 음식을 묻자 ‘주먹밥’이라고 했다. “이번 올림픽 때 유빈이 어머님이 유빈이랑 선수들, 코치분들 드시라며 주먹밥을 손수 매일 해서 시합장에 가져오셨는데 너무 맛있었다”며 “뜨거운 밥으로 손수 주먹밥 하시느라 유빈이 어머님 손이 퉁퉁 부은 걸 보고 마음이 아렸다”고 말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선전했지만 한편으론 중국이라는 거대한 벽을 또 한 번 체감했다. 전지희는 “한국 선수들은 사실 연습 파트너를 구하는 게 참 어려운 반면 중국은 선수단이 다 같이 움직이다 보니 파트너 구하기도 쉽고 탁구 인기가 워낙 높아 그만큼 지원도 대단하다”며 “유빈이한테 트레이너, 회복 프로그램 등을 조금 더 보강해 주면 유빈이가 분명 더 좋은 색깔의 메달을 가져올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탁구 선수는 매일 승패를 다투니 행복감을 찾기가 쉽지 않죠. 그래도 패배를 잘 받아들여야 또 빨리 다시 나아갈 수 있더라고요.” 그는 “오는 10월 카자흐스탄에서 열리는 아시아 선수권 대회를 준비해야 한다”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