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에 미국으로 떠난 소년은 46년 만에 미군 장군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지난 6월 주한미군 캠프헨리(대구) 제19지원사령관으로 취임한 진H 박(52·한국명 박진형) 준장이 주인공이다. 박 준장은 1957년 주한미군사령부 창설 이래 처음으로 부임한 한국계 장성급 사령관이다.
사령관 취임식에서 “같이 갑시데이”라며 어색한 경상도 사투리로 취임사를 마무리했던 박 준장은 23일 본지 인터뷰에서 “미 육군에 입대했을 때만 해도 19지원사령부와 같은 환상적인 부대의 사령관이 되어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나 같은 이민자가 장군이 되어 출신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나라는 세계 곳곳에서 한·미를 제외하고는 흔치 않다.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약사였던 박 준장 아버지는 1972년 그를 낳고 1년도 안 돼 박 준장 어머니와 함께 먼저 뉴욕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서 직장을 잡아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바람에 박 준장은 1978년까지 강원도 춘천에서 조부모 손에 자랐다. 그는 “어릴 때 하늘에 비행기가 보이기만 하면 나는 ‘와, 비행기가 미국으로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며 “언제나 부모님이 보고 싶은 어린아이였고 늘 미국에 가고 싶어 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6살이 되고 나서야 박 준장은 나 홀로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조부모가 스튜어디스에게 부탁해 보호자 없이 뉴욕까지 부모를 만나러 간 것이다. “당시엔 보호자 없이도 어린아이가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만 해도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모든 항공편이 중간 급유를 위해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했다. 박 준장은 탑승객들이 앵커리지 공항 우동 가게에 들러 함께 우동을 먹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고 했다.
박 준장은 “마침내 미국에 도착했을 때 매우 흥분했지만 언어, 문화, 관습을 익히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 극심한 향수병을 앓았다”고 했다. 그는 이후 초중고를 마치고 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94년 미 육사를 졸업한 그는 미 육군 소위로 임관해 독일,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근무했다. 2012년에는 제19지원사령부 예하 부대 대대장으로 3년간 한국에서 근무했다.
박 준장 아내 루시 여사도 9살 때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건너와 옷 가게와 식당 등을 운영한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나중에 교사가 된 아내는 박 준장이 과거 대구에서 근무할 때 미군 부대 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박 준장 아들은 현재 미 육군 중위로 복무 중인데 지난 5월 동료 장교로 복무 중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딸은 미 대학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있다.
박 준장은 최근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관련 “한반도의 안보 상황은 상황에 따라 기복이 있고 흐름이 있다”며 “결국 북한 도발에 대한 강력한 억제력을 제공하기 위해 미군과 한국군의 합동 훈련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지휘하는 제19지원사령부는 미군이 적시에 한국에 배치되도록 물자 수송 등의 후방 지원을 책임진다. 미8군과 한국의 제2작전사령부, 지상작전사령부, 국군수송사령부 등과의 통합 작전도 지원한다.
박 준장은 감자탕, 설렁탕 같은 모든 한국 음식을 즐긴다고 했다. 그는 “주한 미군은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주둔하는 손님”이라며 “미 정부를 대신해 미군들이 지역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사령부 차원에서 미군 가족들과 대구 지역 대학생 등이 주기적으로 만나 교류하는 ‘한미 친선 서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박 준장은 “친선 서클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을 이끌 젊은이들은 미국의 생활 방식을 접할 수 있게 되고 미군 지휘관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박 준장은 사령관 부임 후 틈틈이 짬을 내 아내와 함께 국내 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 춘천 친가와 서울 외가를 오가는 비포장도로에서 멀미를 했던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국을 여행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고 했다. 박 준장은 “과거 한국은 내게 향수병의 대상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한국민들이 여러 어려움과 도전을 극복하고 한국을 번영한 국가로 만든 점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