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시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안병훈이 할머니 송영희씨, 아버지 안재형, 어머니 자오즈민과 함께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KPGA

“골프 선수 고생을 고생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도 심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오랫동안 뒷바라지해주신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지켜보시는 가운데 우승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는 장타자 안병훈(33)이 두 여인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았다. 안병훈은 지난 27일 제네시스 챔피언십 최종일 연장전에서 김주형(22)을 제치고 우승한 다음 18번 홀 그린 옆에 기다리던 어머니 자오즈민(61)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 나서 클럽 하우스 앞에서 기다리던 할머니 송영희(83)씨 품에서 다시 울었다. 제네시스 챔피언십은 DP 월드 투어(옛 유러피언 투어)와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가 공동 주관하는 대회. 안병훈은 2015년 BMW PGA 챔피언십 이후 9년 만에 DP 월드 투어 두 번째 정상을 정복했다. 한국에서 우승한 건 2015년 KPGA 투어 신한동해오픈에 이어 두 번째다. 그는 한국과 중국 탁구 커플 안재형(59)과 자오즈민의 외아들. 탁구를 하기엔 순발력이 못 미쳐 골프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그는 열네 살이던 2005년 겨울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있는 데이비드 레드베터 아카데미로 골프 유학을 떠났다. 이때부터 가족의 공간은 한국과 미국, 중국으로 넓어졌다. 자오즈민은 중국에서 통신 사업을 하느라 중국에 자주 머물렀고, 안재형은 잠시 아들 캐디를 맡았지만, 이후엔 전문 캐디에게 넘겼다. 이후 탁구 대표팀 감독과 실업팀 감독을 지냈다. 그 공백을 할머니가 미국에서 돌봤다. 안재형은 “손자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할아버지가 2004년 갑작스레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모든 정성을 쏟았다”면서 “병훈이가 대회에 나가면 미국 집에 혼자 계실 때도 많았다”고 했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할머니는 2018년 안병훈이 결혼할 때까지 손자 뒷바라지를 했다.

안병훈은 지난해 하반기 도핑 성분이 든 감기약을 잘 모르고 사용해 3개월 출장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자오즈민이 건네준 아이들용 감기약을 붙이고 경기에 나섰다가 약물 검사에 걸린 것. 안병훈은 “어머니가 너무 미안해하셨지만, 오히려 쉬면서 나를 돌아보게 된 게 전화위복이 됐다”고 했다.

안병훈은 아마추어 최고 권위 대회 US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2009년 우승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2015년 DP 월드 투어 플래그십 대회(주요 대회)인 BMW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이듬해 PGA 투어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될 듯 될 듯 이후 우승과 좀처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준우승만 5번 했다. PGA 2부인 콘페리 투어로 떨어지기도 했다. 안병훈은 “PGA 투어 우승은 정말 많은 운이 따라줘야 하는 것 같다”며 “이번 겨울에도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 노력하겠지만, 우승에 집착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올해 안병훈은 PGA 투어 상위 30명이 겨루는 투어 챔피언십과 파리 올림픽, 미국과 세계연합팀의 골프 대항전 프레지던츠컵 출전이란 모든 목표를 이뤘다고 했다. “이번 우승은 보너스 같았다”고 했다.

안재형은 매년 안병훈 주니어 클리닉을 열고 있다. 프로 골퍼를 꿈꾸는 선수 3명을 1주일간 미국으로 초청해 함께 훈련한다. 지난해까지 5차례 주니어 골프 클리닉을 열었다. 코로나 사태가 심했던 2020년에는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다 직접 비용을 댄다. 클리닉에 참가했던 주니어들이 이번 대회에서 그를 성원했다. 올해는 11월에 자택이 있는 올랜도에서 할 계획이다. 2021년부터는 미국주니어골프협회(AJGA) 대회인 ‘안병훈 주니어 챔피언십’도 열고 있다. 안병훈은 “저도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골프를 익혔는데 주니어 골퍼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며 “어린 친구들의 순수한 열정을 보면서 골프를 배우던 시기의 열정을 다시 느끼고 배운다”고 했다.

안병훈은 세종초등학교 동창 최희재씨와 2018년 결혼해 아들 선우(4)와 딸 지우(1)를 얻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저를 키워준 부모님과 할머니의 고마움을 더 잘 알게 됐다”며 “내년에는 딸도 올 수 있는 나이가 되니까 온 가족이 한국에서 멋진 가을을 다시 보내고 싶다”고 했다. “미국에 있는 첫아이가 꼭 우승 트로피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 흐뭇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