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자는 석학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는 분들이잖아요. 그분들의 열정과 방법론을 엿보고 싶었어요. 책 안에서만 세상을 보고 싶지는 않거든요.”
지난 8일(현지 시각) 스웨덴 스톡홀름 한 호텔 로비에서 마주친 포스텍(포항공과대) 산업경영공학과 4학년 박세혁(23)씨가 말했다. 지난 5~12일 노벨상 강연과 시상식 등 각종 행사가 이어지는 ‘노벨 위크(Nobel Week)’ 기간.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국내 언론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소설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던 때, 전혀 다른 이유로 이곳을 찾은 30명의 학구파 대학생이 있었다. 기말고사를 목전에 두고 출국한 학생들은 그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밤이 되면 널찍한 호텔 로비 작업 공간에 삼삼오오 모여 시험 공부를 했다.
같은 날 오전 9시 스톡홀름대 아울라 망나 대강당 앞. 일요일 오전인데도 캠퍼스는 노벨 물리·화학상 수상자 강연을 듣기 위한 인파로 북적였다. 길게 늘어선 줄 곳곳에 한국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이날 강연을 들은 화학공학과 4학년 조은서(23)씨는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단백질을 인공적으로 새롭게 디자인하는 내용이 흥미로웠다”며 “신경계로 접근해서 인공지능(AI)까지 뻗어나가는 것을 보고 결국에는 다 연결돼 있구나. 학제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포스텍은 지난해부터 노벨 위크 기간에 맞춰 학생 30명을 선정·파견하고 있다. 학생들은 노벨 물리·화학·생리학상 수상자의 강연을 들으며 세계적인 과학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스웨덴 웁살라대·왕립공과대(KTH) 등 현지 학생들, 유럽 현지에서 활약하는 동문과도 만난다. 학내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해 올해는 4.5:1 경쟁률을 기록했다.
노벨 위크 파견은 지난해 9월 임기를 시작한 김성근 총장의 구상이다. 지난해 6월 총장 예정자로 선임되자마자 그는 주한 스웨덴 대사관을 찾아가 “노벨 위크에 학생들을 파견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스웨덴 대사관에서도 ‘환영한다’며 반색했다고 한다. 김 총장은 “한국 대학이 학생들을 너무 좁게 가르치는 것 같다. 학생들에게 인사이트(insight)를 주고 싶었던 마음에 스톡홀름까지 대장정이 시작됐다”고 했다.
노벨상을 향한 포스텍의 열정은 1986년 개교 때부터 이어져 왔다. ‘철강왕’으로 불린 박태준(1927~2011) 포스코 명예 회장(포스텍 설립 이사장)은 1989년 노벨상 수상자 10여 명을 경북 포항 포스텍 캠퍼스로 초청해 기념 식수(植樹)를 했다. ‘강철거인 교육위인(鋼鐵巨人 敎育偉人)’이라는 문구와 함께 박 회장 동상이 세워진 이곳은 ‘노벨 동산’으로 불린다.
올해 노벨 위크 프로그램에 인솔자로 참여한 이상민 포스텍 화학공학과 교수는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베이커 미 워싱턴대 교수 연구실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재직했던 직속 제자다. 학생들은 식사 자리에서 격의 없이 “교수님 다음 노벨상을 기대한다”며 농담을 건넸고, 이 교수는 “여러분이 힘써달라”며 공을 넘겼다. 노벨평화상(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문학상(2024년 한강)에 이어 한국의 과학 분야 수상도 멀지 않았다고 보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의대 열풍’과 ‘수도권 집중화’ 현상은 쉽게 풀리지 않는 난제다. 포스텍은 이공계 인재 양성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정공법’을 대안으로 내놨다. 올해 2학기부터는 ‘패스파인더(Pathfinder)’라는 바우처 제도를 도입했다. 학부생 1명당 1000만원을 지원한다. 지원 범위에서 해외 단기 유학, 노벨 위크 파견, 미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CES) 참관 등을 선택해 참여할 수 있다. 생명과학과 4학년 이영진(22)씨는 독일 막스 플랑크 심장·폐 연구소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중 연차를 내고 노벨 위크에 참석했다. 이씨는 “두 프로그램 모두 너무 욕심이 나서 절절한 자기소개서를 썼다”며 웃었다. 최명용 포스텍 학생지원팀장은 “열정 넘치는 학생들 앞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