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전역 후 6년 넘게 ‘투 잡’ 뛰며 가족을 지켰어요. 다시 헬기 조종간을 잡게 됐다며 정말 기뻐하셨는데.”
23일 오후 충남 공주시 한 장례식장. 지난 21일 충북 청주 대청호 헬기 추락 사고로 숨진 고(故) 이효백(53) 부기장의 아들 풍현(23)씨는 활짝 웃고 있는 영정 속 아버지 얼굴을 보고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헬기 조종사로 20여년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이씨는 전투보다 더 힘든 구직 전선에서 비정규직을 오가며 6년 넘게 버텼다고 한다. 아내와 삼남매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묵묵히 일터로 향했던 우리 시대 아버지 중 한 명이었다. 어렵사리 민간 헬기 조종 일을 구해 최선을 다했지만, 1년 6개월 만에 추락 사고를 당해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사고가 발생한 것은 지난 21일. 오후 1시 24분쯤 충북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에서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 소방 당국 요청으로 산불 진화 헬기가 현장에 투입됐다. 충북도가 지난 1월부터 6월까지 대전의 한 민간 업체에서 임차한 미국 시콜스키사 S-76C+ 기종이었다. 화재를 진화하고 옥천 계류장으로 복귀하던 헬기는 추가 출동 요청을 받았다. 인근 문의면 품곡리 저온 창고에서 불이 났는데 산으로 옮겨 붙을 위험이 있으니 조속히 조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모(64) 기장과 이 부기장 등 2명이 탑승한 헬기는 비어 있는 물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인근 대청호로 방향을 틀었다. 담수를 시작하던 헬기가 오후 2시 57분쯤 갑자기 호수로 추락했다. 기장은 사고 직후 헬기를 빠져나와 구조됐지만, 부기장 이씨는 40여분 만에 물속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4형제 중 장남이었던 그는 초등학생인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일찌감치 가장이 됐다. 육군3사관학교를 나와 보병 장교로 임관했지만, 중위 때 항공 병과로 진로를 바꿨다. 공격형 헬기 MD500, 수송 헬기 UH1H를 조종했고, 우리 군의 주력 헬기로 ‘블랙 호크’로 불리는 UH-60P 부대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2013년 연말, 그는 24년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예비역 소령으로 베테랑 조종사였지만, 40대 중반 나이에 맞은 구직의 문은 좁디 좁았다. 퇴짜, 또 퇴짜. 한창 학교에 다니던 삼남매를 위해선 당장 먹고살 길이 급했다. 경비업체에서 근무했고, 낮에는 운전학원 강사, 새벽 시간에는 트럭 운전 등을 하면서 6년 넘게 버텼다.
그는 2019년 10월 민간 헬기 업체에 입사했다. 전역 후 조종사로서 가진 첫 직업이었다. 항공 화물 운반과 산불 진화를 지원하는 작업을 맡았다.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헬기 계류장이 있는 옥천에 따로 거처를 마련해 헬기 조종에 나섰다.
그의 아들 풍현씨는 “우리 가족에게 가장 좋은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고 했다. “산불 날 일 없잖아요. 아버지는 집에 오시면 할머니 먼저 챙기고, 네 살배기 외손녀와 놀아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셨어요.”
이 부기장이 숨진 날은 막내아들(21)이 첫 휴가를 받아 나오기 꼭 이틀 전이었다. 아버지 뒤를 따르겠다며 올해 육군3사관학교에 입교한 아들이었다. 유족들은 “막내 휴가 때 가족들이 모두 모여 등산 가고, 주말도 함께 보내기로 했다”며 “아버지는 휴가 계획을 짜며 매우 설레 하셨는데, 그게 생전 마지막 대화가 됐다”고 했다. 이 부기장의 아내는 “평생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남편은 마지막까지 국민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몸을 바쳤다”며 눈물을 흘렸다.
사고 현장인 대청호에서는 23일 오후 5시30분쯤 인양 작업을 통해 수심 20m 아래에 있던 추락 헬기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헬기는 김포공항에 있는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 시험분석실로 이송됐다. 조사위는 헬기 비행 기록 장치를 수거해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할 계획이다.
/공주=신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