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장항습지. 연둣빛 이파리를 뽐내며 군락을 이룬 버드나무 숲 너머로 탁 트인 한강의 푸른 물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발아래 습지는 짙은 회색빛 갯벌. 작은 동전 크기의 구멍이 곳곳에 뚫려 있었다. 말똥게의 집이다. 동물 발자국도 찍혀 있었다. 고라니 무리와 삵이 지나간 흔적이다. 최윤주 한강유역환경청 해설사는 “장항습지는 서울과 맞닿은 도심 속 밀림이자 거대한 생태계가 압축된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장항습지는 한강 강변을 따라 7.6km 정도 이어진다. 폭은 600여m로, 면적은 5.95㎢다. 전국의 내륙 습지 중 창녕 우포늪에 이어 둘째로 크다. 지난달 람사르 습지 목록에 국내에서 24번째로 등록됐다. 람사르 협회는 람사르 협약(습지의 보전과 현명한 이용을 촉구하는 뜻에서 이란 람사르에서 채택된 국제 협약)에 따라 1971년부터 보호할 가치가 높은 습지를 지정해 왔다. 전 세계적으로 171개 국가, 총 2421곳이 보호 습지로 지정됐다.
◇전국 최대 규모 버드나무 군락
버드나무 숲속 데크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갈대들이 ‘샤르륵’ 소리를 내며 물결쳤다. 말똥게 수십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갈대 사이로 떼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최 해설사는 “말똥게는 보통 낮에는 숨어 지내는데, 이날 오전까지 비가 내린 덕분에 몰려 다니는 드문 광경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장항습지 버드나무 군락은 전국 최대 규모다. 말똥게와 나무가 서로 돕는 상리공생(相利共生)을 이루며 공존한다. 말똥게는 천적인 철새를 피하려고 버드나무 숲속에서 나무 주변에 30~40㎝ 깊이 구멍을 파고 산다. 말똥게 배설물이 거름 역할을 하고, 파 놓은 구멍이 나무가 뿌리 호흡을 하는 데 도움을 주면서 우거진 숲을 이뤘다. 국립생태원 출신 한동욱 PGA 생태연구소 소장은 “온대기후인 동북아 지역에선 게와 나무의 공생 관계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장항습지에선 곳곳에서 발견된다”며 “보존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장항습지는 총 1000여 종의 생명체가 서식하는 생태 공간이다. 환경부가 지정한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저어새와 흰꼬리수리 등 천연기념물이 노닐고, 큰기러기와 붉은발말똥게 등 멸종위기 야생생물 30여 종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10월부터 이듬해 3월 사이에는 대륙을 넘나드는 약 3만 마리 새들이 떼지어 이곳을 찾는다.
장항습지가 철새들의 쉼터가 된 것은 기수(汽水) 지역이기 때문이다. 한강 하류에 있다 보니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염분 농도가 각기 달라 습지별로 생물종 분포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종류도 많아 철새들의 중간 쉼터로 제격이라는 것이다. 고양시가 철새 먹을거리 관리에 노력한 점도 한몫했다. 장항습지의 논 68만여㎡에 매년 볏짚을 남겨두고, 이 중 6만㎡에선 아예 벼를 수확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연간 4만㎏가량의 벼를 철새 먹이로 제공하는 셈이다.
◇대륙을 넘나드는 철새의 쉼터
국내에는 순천만 등 세계적 습지가 있다. 장항습지의 강점은 수도권에서 쉽게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철 3호선 마두역에서 차로 7분 정도 가면 도착한다. 한강변을 따라 조성한 자전거 길을 따라가도 장항습지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탐방을 하려면 사전에 한강유역환경청(031-790-2852)에서 전화 예약을 해야 한다. 평일 오후 1시와 3시에 탐방이 가능하다. 5㎞ 구간을 돌아보는 데 2시간 정도 걸린다. 이날 습지를 탐방한 최재훈(34)씨는 “서울 마포에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며 “겨울에 한 번 더 와서 철새 떼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물골 복원하고, 철새 관람대도 조성
장항습지는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덕분에 생태 환경을 보존할 수 있었다. 2008년 12월 고양시와 육군이 철책 제거 사업에 나섰고, 2018년 6월 이곳에 주둔하던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관람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매설한 지뢰들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어 대다수 구역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요즘도 홍수나 폭우로 습지가 범람할 경우 지뢰 수색 작업을 거친 뒤 탐방로를 개방한다.
고양시는 장항습지를 통해 친환경 도시로 거듭날 계획이다. 버드나무 숲에 있는 물골 33개를 복원하는 작업에도 나선다. 물골은 습지 안으로 물이 흘러 육지화 현상을 막는 역할을 한다. 현재 2개 있는 철새 관람대도 추가로 조성한다. 47억여 원을 투입해 장항습지센터를 짓고 있다. 내년 12월 완공하면, 관람객을 대상으로 습지 견학과 교육 활동을 벌일 계획이다. 이재준 고양시장은 “장항습지를 한강생태공원, 호수공원 등 주요 관광 자원과 연결하고, 생태 관광의 거점 지역으로 조성할 방침”이라며 “김포나 강화 등 다른 지역 습지와 함께 공동 보존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