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이 탁 트이고 요트가 그림처럼 떠다니는 바다가 아니다. 콘크리트 바닥에 녹슨 쇠기둥이 서 있고 크고 작은 낡은 배들이 수리를 하기 위해 계류장에 정박해 있다. 그 부근 골목길엔 쇠사슬 더미가 놓여 있다. 저 멀리 컨테이너 부두에 거대한 크레인들이 골리앗처럼 버티고 있다. 부산 영도의 바다다.

지난 21일 경기도 파주에서 부산 여행을 온 길에 영도 흰여울마을의 커피숍 ‘에테르’를 찾은 염자선(20)씨는 “영도 바다는 내 머릿속에 있는 그림과는 다른 희한한 바다”라고 했다. 염씨는 “영도는 전혀 다른 감성의 바다가 있는 ‘원더랜드(wonderland·동화나라)같다”며 “이런 바다를 보며 개성 있는 커피숍에서 특별한 커피 맛을 보니 치유와 행복의 알갱이가 몸 속에서 ‘톡’, ‘톡’ 터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지난 21일 오후 부산 영도구 영선동 '흰여울마을'에 있는 한 커피숍 테라스에서 손님들이 커피를 마시며 바다 풍광을 즐기고 있다. 영도구 동삼동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는 큰 통창을 통해 배와 크레인이 보인다(오른쪽 가운데 사진). 바닷가에 인접한 또 다른 영도의 커피숍에서 사람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오른쪽 위 사진). 흰여울마을의 바닷가 오래된 주택 사이에 현대식 커피숍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오른쪽 아래 사진). 2012년 7~8개였던 영도의 커피숍은 최근 220여 개까지 늘어났다. /김동환 기자

◊커피섬이 된 영도… 10년 만에 커피숍 30배 늘어

부산 도심 속 연륙도(連陸島), 영도가 ‘커피섬’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2012년 7~8개였던 영도의 전문 커피숍이 요즘은 220여 개로 늘어났다. 10년 만에 30배가량으로 늘어난 셈이다. 영도구 김혜숙 경제진흥팀장은 “2017년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지역 특색(local) 전문 커피숍들이 최근 3년여 동안 150여 개쯤 생긴 것으로 추산된다”며 “이 로컬 커피숍들이 풍광이나 커피맛 등에서 차별성을 인정받으면서 침체된 영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했다.

‘영도’는 중구 남포동 등과 인접한 면적 14.2㎢ 섬이자 부산 16개 구·군 중 하나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영도다리가 놓여 당시 부산 최고의 번화가였던 중구 중앙동 등과 연결되면서 ‘섬’에서 벗어났다. 국내 최초, 최대 조선소인 대한조선공사가 자리하기도 했다. 한국 조선 산업 발상지이면서 1960~1970년대 초반까지 대표적 조선 산업 기지였다.

그러나 ‘섬’이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어 발전 정도가 중·서·동구 등 원도심 지역 4구 중 가장 더뎠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 울산에 현대중공업 등이 생기고 1990년대 후반 영도의 수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인구도 줄어들었다. 1978년 21만4000여 명으로 정점을 찍은 인구가 2015년 13만2000여 명을 거쳐 2021년 말 현재 인구는 11만여 명으로 줄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빈집들이 200~300채씩 생겨났다. 길가엔 큼지막한 글씨의 색바랜 아크릴 간판들이 많아졌다.

4~5년 전쯤 ‘변화의 파동’이 시작됐다. 산복도로(산 중턱을 지나는 도로) 위의 40년 된 공장과 해안가의 50년 지난 목욕탕·주택들이 개성 넘치는 커피숍으로 변신했다. 건물 외관이나 내부가 바뀌고 현대적으로 꾸며졌다. 영도의 오래되고 낡은 건물을 개조하는 비용이 도심에 비해 싼 데다 초창기 들어선 커피숍들이 인기를 끌고 소문을 타자 커피숍이 유행처럼 확산됐다고 한다.

이들 커피숍은 노후 주택·건물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보석 같은 존재가 됐다. 사람들이 몰렸다. 현대적인 분위기의 커피숍에 앉아 출렁이는 바다와 40~50년 전 동네 모습이 어우러진 풍경을 보며 느끼는 ‘영도만의 감성’에 열광했다.

영도의 커피숍들은 ‘스타벅스’처럼 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대부분 자기만의 개성을 살린 ‘로컬(local) 브랜드’다. 220개중 지난해 3월 문을 연 스타벅스 영도대교점 등 20~30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세상에 ‘영도 그곳’밖에 없는 가게들이다.

50년 된 동네 목욕탕을 개조해 4년 전쯤 ‘볼트220′ 커피숍을 개점한 강경미(43) 대표는 “높다란 목욕탕 굴뚝을 원두 로스팅 연기를 빼내는 데 활용하면서 옛날 그대로 놔둬 우리 가게만의 ‘시그니처’로 만들었다”며 “’아메리카노’ 대신 남성용의 묵직한 ‘볼트’, 여성용의 상큼한 ‘와트’ 등 우리만의 맛을 가진 커피를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공장을 개조해 커피숍으로 만든 청학동신기산업’에서 만난 한모(43)씨는 “해운대에 살면서 일부러 영도의 커피숍들을 찾아 다니며 탐방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2019년 첫 커피 축제도 열어

이들 커피숍이 창출해낸 변화는 또 다른 파동을 낳았다. ‘커피 축제’다. 영도구는 지난 2019년 10월 영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영도대교 인근 봉래동 물양장(소형 선박이 접안해 계류하는 곳)에서 첫 커피 축제를 열었다. 로컬 커피와 국제명품 커피 등을 맛보고 구매할 수도 있는 부스를 운영하고, 생두 로스팅·핸드 드립 체험 등의 행사도 했다. 3일간 5만여 명이 다녀갔다. 2020년엔 코로나 탓으로 취소됐고 작년엔 11월에 같은 장소에서 3일간 개최됐다. 규모가 2년 전보다 축소됐지만 코로나 사태 와중에도 4만5000여 명이 찾는 성황을 이뤘다.

코로나 때문에 유동적이긴 하지만 올해는 10월 말쯤 장소를 동삼동 국립해양박물관 부근으로 옮겨 더 크게 개최할 예정이다. 김철훈 영도구청장은 “‘로컬 크리에이터(지역의 특성·자원을 활용해 사업적·사회적 가치를 창출해내는 활동가)’가 된 ‘영도 커피숍’들이 커피 산업을 영도의 대표 산업으로 만드는 또 다른 변화로 이어지도록 할 것”이라며 “현재 부산시와 함께 커피 R&D센터와 커피몰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