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전 경북 안동시 경북도청 1층. 할머니 네 명이 교실로 들어섰다. 평소 직원들이 책을 읽으며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는 ‘미래창고’에는 커다란 칠판이 세워졌다. 칠판 앞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책·걸상도 마련됐고 천장에 태극기와 교훈까지 내걸린 풍경은 마치 60~70년대 교실을 옮겨온 듯했다.
이날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주인공은 일흔이 넘어 깨친 한글로 디지털 글씨체 ‘칠곡할매글꼴’을 만들어 관심을 끈 추유을(89)·이원순(86)·권안자(79)·김영분(77) 할머니였다. 다섯 할머니 중 이종희(91) 할머니는 건강 악화로 아쉽게도 불참했다. 이들 할머니들은 명찰을 달고 10대 시절에도 입어본 적 없던 교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자리에 앉았다.
이날 수업에 나선 일일 선생님은 이철우 경북지사였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 한때 수학교사로 재직한 이 지사는 40년 만에 교단에 섰다. 이 지사는 할머니들이 학교를 다니지 못한 한을 풀어줄 마지막 수업을 마무리 짓고 경북도가 운영하는 경북도민행복대학 총장으로서 졸업장을 수여하고자 교편을 잡은 것이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칠곡할매글꼴의 원작자 중 한 사람인 김영분 할머니가 반장을 맡았다. 김 할머니의 구호에 맞춰 할머니들이 인사하자 이 지사가 큰절로 화답하면서 수업이 시작됐다.
이 지사는 할머니들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출석 체크를 한 뒤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된 경북의 역사와 경북 4대 정신 등을 설명하고 대한민국 근대화에 헌신한 할머니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할머니들이 여행해 본 국가를 묻고 답하거나 새마을운동 노래를 불러보는 등 수업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수업 중 이 지사가 김영분 할머니에게 “경북 경주 인구가 더 많을까요, 대구시 인구가 더 많을까요”라고 묻자 김 할머니는 “경주가 대구보다 더 크니까 암만캐도(아무래도) 경주에 사람이 더 마이 안 있겠는교”라고 답해 폭소가 터졌다. 이어 김 할머니는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공부를 좀 해올 걸 그랬나”라고 멋쩍어하자 주변은 웃음바다로 변했다.
수업 말미에는 받아쓰기 시험도 치렀다. ‘화랑’, ‘호국’, ‘선비’, ‘새마을’ 등 이 지사가 단어를 읽으면 할머니들이 받아쓰는 시험이었다. 결과는 네 할머니 모두 만점. 이 지사가 공책에 붉은 색연필로 채점하고 ‘100점’ 표시를 하자 할머니들은 환호에 이어 박수를 쳤다. 이 지사가 “한 학생이라도 틀려야 나머지공부를 시킬 텐데”라고하자 재차 폭소가 터져 나왔다.
시험을 만점으로 통과한 할머니들은 상장과 졸업장을 받고 학사모도 썼다. 일부 할머니들은 상장·졸업장 흔들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이 지사는 “할머니들이 살던 시대는 글을 배우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고 문맹률이 70%에 달했지만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글을 아는 사람이 많은 나라가 됐다”며 “오랜만에 교사가 돼 보람 있었고 할머니들도 즐거웠을 것”이라고 했다.
이원순 할머니는 “이름 쓸 줄도 몰랐는데 한글을 배우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오늘 너무 즐겁고 좋다”고 말했다. `김영분 할머니도 “몰랐던 것도 많이 배우고 사람들도 만나고 교복도 입고 모든 게 너무 좋았다”며 “지금 내가 새라면 훨훨 날고 싶은 심정”이라고 전했다.
칠곡할매글꼴은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일흔이 넘어 한글을 배운 다섯 명의 칠곡 할머니가 넉 달 동안 종이 2000장에 수없이 연습한 끝에 2020년 12월 만든 글씨체다. 윤석열 대통령이 각계 원로와 주요 인사 등에게 보낸 신년 연하장은 물론 한글과컴퓨터, MS오피스 프로그램에 사용되고 국립한글박물관 문화유산에 등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