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낮 12시쯤 울산 남구 장생포항. 높이 8.5m의 하얀 고래 조형물(귀신고래 분수) 아래서 꼬마 3~4명이 뛰어놀고, 부모들은 사진을 찍고 있다. 항구에 정박 중인 고래바다여행선 옆으로 낚시객 20여 명이 난간에 서서 낚시에 열중했다. 고개를 돌리자 고래박물관과 고래생태체험관, 고래연구센터 등 ‘고래’라고 적힌 이정표와 간판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한겨울인데도 매표소엔 입장객들이 줄을 섰다. 국내 최대 포경(捕鯨) 기지였던 장생포 ‘고래마을’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고래가 연 1000마리씩 잡히고, 전국에서 고래 고기를 맛보러 오던 곳이다.
이렇게 잡고 먹던 ‘고래마을’이 보고 즐기는 ‘고래마을’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문화·체험 관광지로 방향을 바꾼 이후 지난해 총 150만3000명이 찾아 역대 최대 관광객 수를 기록했다. 울산 남구청 관계자는 “아쿠아리움이 아닌 바다에서 고래를 구경할 수 있고, 과거 고래와 엮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전국에서 장생포밖에 없다”고 말했다.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고래마을은 포경선 뱃고동이 멈추지 않던 곳이다. 포경선만 50여 척이 드나들고 주민도 1만명 가까이 됐다. 연간 1000마리 이상이 잡혀 국내 고래 고기 소비량의 80% 이상이 이곳에서 나왔다. 항구에서 바로 해체해 팔다 보니 고래 고기를 맛보려는 관광객으로 늘 북적였다. 과거 “장생포 포수(砲手)는 울산 군수하고도 안 바꾼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1986년 상업 포경이 금지되자 마을은 급격히 쇠락했다. 인구는 현재 660가구·1065명에 불과하고, 20곳이 넘던 고래 고기 식당도 6곳밖에 남지 않았다. 현행법에는 우연히 그물에 걸려(혼획·混獲) 죽어있는 고래만 유통이 가능하다. 살아있으면 놔줘야 하고, 참고래·혹등고래·참돌고래 등 해양 보호 생물종이면 혼획돼도 유통할 수 없다. 고래 고기 식당 주인인 안영경(50) 대표는 “손님이 없을 때는 온종일 한두 테이블이 전부일 때도 있다”며 “최근 작은 밍크고래가 7000만원에 낙찰됐다. 적게 잡히니 가격은 자꾸 오르고, 그렇다고 손님들한테 비싸게 팔 수도 없으니 장사를 접으려는 주인들도 있다”고 했다.
울산시와 남구는 자구책으로 정부에 요청해 고래마을 일대를 2008년 ‘고래문화특구’로 지정했다. 울산 남구청 관계자는 “불법 혼획 단속이 강화되면서 사실상 고래마을은 사라지는 분위기였다”면서 “특구로 지정된 이후 옛 명성을 되찾으려 시와 구청, 주민들이 안간힘을 썼다”고 말했다. 울산시와 울산 남구청은 매년 고래 축제를 열었다. 또 특구 지정 이후 10여 년 동안 700여 억원을 투입해 큰돌고래 4마리를 직접 볼 수 있는 고래생태체험관, 바다에서 고래 떼를 관찰하는 고래바다여행선, 실물 크기의 대왕고래·혹등고래·범고래 등의 조형물이 있는 고래조각공원, 모노레일, 어린이 체험 시설인 웰리 키즈랜드 등 각종 시설을 갖췄다.
관광객 발길이 다시 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고래문화마을 조성이 끝난 뒤부터다. 고래문화마을은 1960~1980년대 전성기 장생포를 재현해 놓은 일종의 테마파크다. 15m짜리 밍크고래를 해체하고 있는 조형물도 있고, 고래 고기를 삶던 고래막집, 고래잡이 선장 집 등이 만들어져 있다. 또 1층짜리 옛 장생포 초등학교와 문방구, 서점, 사진관, 식당 등 과거 장생포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놨다. 대구에서 온 윤모(69)씨는 “과거 장생포 부근에서 살았는데, 여기 와보니 진짜 옛 모습 그대로 꾸며놓은 것 같다”며 “이제 고래마을은 옛 추억을 되새기는 곳이 됐다”고 했다.
작년 11월 고래문화특구는 전국 우수 특구로 뽑혀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한국관광공사의 2023년 한국 관광 100선에도 뽑혔다. 앞서 같은 해 7월에는 고래를 주제로 한 미디어아트 전시관인 ‘웨일즈 판타지움’도 개관했다.
장생포 고래마을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하는 ‘남부권 광역 관광 개발 사업’ 대상에 선정됐다. 이에 따라 2027년까지 445억9000만원을 들여 스카이 라이드와 롤러코스터형 집와이어, 코스터 카트 등 다양한 익스트림 체험 시설을 조성하고, 옛 장생포 해군기지 부지에 게스트하우스도 만든다.
올해는 6월 엔드리스서머 등 수국 30여 품종 2만여 본을 선보이는 ‘장생포 수국 페스티벌’, 8월 ‘호러 페스티벌’, 9월 ‘차박 캠핑 페스티벌’ 등 다양한 축제를 곁들여 다시 관광객 몰이에 나선다. 서동욱 울산 남구청장은 “고래는 이제 울산의 문화 자산이 됐다”면서 “차별화된 콘텐츠와 인프라로 세계적인 ‘고래 도시’를 만들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