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에 자리 잡은 호계서원. 1만㎡의 부지에 13동의 서원 건물을 보유한 경북 유형문화재 제35호다. /경북도 제공

400년 동안 지속돼 왔던 영남 유림들의 위패 서열 갈등(병호시비·屛虎是非)이 종지부를 찍게 됐다. 호계서원(虎溪書院) 내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의 위패 서열을 두고서다.

경북도는 20일 호계서원 복설추진위원회(회장 노진환)가 주최하는 ‘호계서원 복설 고유제’에 이철우 지사가 초헌관으로 참석한다고 19일 밝혔다.

이날 열리는 고유제는 호계서원의 복원 소식을 알리고 영남 유림의 대 통합과 지역의 정신 문화 발전을 기원하는 자리다.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부지에 자리 잡은 호계서원은 1만㎡의 부지에 13동의 서원 건물을 보유한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다. 아흔 두 칸으로 지어진 이 서원은 1575년(선조 8년) 백련사 옛 터에 여강서원으로 창건된 뒤 1676년(숙종 2년)에 호계서원으로 개칭했다.

호계서원은 안동의 두 가문의 400년에 걸친 갈등과 화해가 반복되는 사연이 숨겨져 있다.

호계서원의 시작은 퇴계 이황 선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퇴계가 세상을 뜨자 그의 제자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후손들은 안동 여강서원에 따로 퇴계를 모시기로 했다.

하지만 여강서원에 퇴계를 모시기로 했지만 류성룡과 김성일의 위패를 어떻게 배치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사당 중앙에 퇴계의 위패를 놓은 뒤 둘 중 누구의 위패를 상석인 퇴계 왼쪽에다 두어야 하느냐를 놓고 후손들끼리 논란이 빚어졌다.

류성룡의 후학들은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관찰사로 마감한 김성일 보다 벼슬이 더 높으므로 상석인 동쪽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성일의 후학은 생년이 빠른 김성일이 류성룡 보다 네 살 많은 선배이므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맞섰다.

당시 서애의 제자이자 대학자였던 우복 정경세(1563∼1633)가 ‘벼슬의 높낮이로 정해야 한다’며 영의정을 지낸 서애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1805년 당시 영남의 4현으로 불리던 서애와 학봉,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의 신주를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또다시 서애와 학봉 간 서열 문제가 불거졌다.

1812년에는 병호시비 3차 논쟁으로 서애 제자들은 호계서원과 결별했다. 이런 이유로 ‘병호시비’(屛虎是非)라는 이름까지 붙여졌다.

갈등이 깊어지면서 안동 최고의 서원이었던 호계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던 사당도 사라졌다. 호계서원에 있던 퇴계의 위패는 도산서원으로, 류성룡의 위패는 병산서원으로, 김성일의 위패는 낙동강변의 임천서원으로 옮겨졌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안동부사를 불러 해결 방안을 모색하도록 지시했다. 양쪽 유림 1000여명이 모여 화해를 시도했으나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격분한 대원군은 화해의 상징으로 양쪽 학맥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한 책 한 권씩을 골라 목판과 판본을 태우고 호계서원을 철폐하는 것으로 갈등을 봉합했다.

병호시비는 지난 2009년 양쪽 문중이 나서면서 해결의 전기를 맞았다. 문중 대표가 ‘류성룡 왼쪽, 김성일 오른쪽’이란 위패 위치를 합의하면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안동 유림들 사이에서 ‘이 문제는 종손 간에 합의할 사항이 아니라 학파 간에 결론 내려야 하는 것’이란 주장이 나오면서 대립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3년, 호계서원의 복원을 추진하던 경북도는 두 가문과 학맥에 기발한 중재안을 냈다. 류성룡을 퇴계 위패의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에, 그 옆에 김성일의 후학인 이상정을 배향하자는 제안이었다. 한쪽에는 높은 자리를, 다른 한쪽에는 두 명의 자리를 보장하는 화해안이었다. 두 학파가 동의하면서 400년에 걸친 병호시비는 결국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호계서원의 복설은 영남 유림들의 대통합을 통해 이뤄낸 성과”라며 “화합, 존중,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는 경북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