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비둘기를 보려면/ 도심으로 들어와 시청광장쯤에서 팝콘을 뿌리지요/ 순식간에 몰려드는 비둘기 떼/ 겁 없이 손등까지 올라와….' 김유선 시인은 1980년대 비둘기 모습을 그린 시 <김광섭 시인에게>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시를 읽은 광화문 인근 직장인 남모(28)씨가 말했다. “이것도 다 옛날얘기지. 요즘은 도심에 비둘기 없어요. 주변에 모이 주는 사람도 없잖아요?”
‘도심에 비둘기가 없다‘는 이 말을 검증(?)해보기 위해 지난 2일 서울역 광장을 찾았다. 부슬비가 잠시 그친 광장 한편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아스팔트 바닥을 부지런히 헤집고 있었다. 50m쯤 떨어진 다른 곳에선 두 마리가 땅에 걸터앉아 빗물에 몸을 씻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비둘기 예닐곱 마리가 눈에 띄긴 했지만, 수십 마리가 군집을 이룬 채 길가를 점령하고 아이들 과자를 강탈하던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비 오는 날이면 비둘기가 자주 찾던 역사 천장의 빈 공간은 언젠가부터 철제 그물이 설치돼 있었고, 광장에는 모이를 주는 사람도 받아먹는 비둘기도 없었다.
종로구 마로니에 공원과 숭례문, 용산구 효창공원도 사정은 마찬가지. 삼삼오오 모여 다리를 쉬이는 녀석들만 드문드문 눈에 띌 뿐, 떼를 이뤄 돌아다니는 비둘기는 없었다. 효창공원 앞 한 매점 주인은 “아침에만 잠깐 보이고 오후에는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 했다. 숭례문 앞에서 20년 넘게 과일 장사를 했다는 한준희(60)씨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언젠가부터 비둘기가 싹 없어졌네. 십 년 전만 해도 비둘기들이 이 앞에 수십 마리씩 진을 치고 살았는데. 도대체 그 많던 비둘기가 다 어디로 갔대요?”
◇서울시 ‘집비둘기 민원' 4년 새 네 배 넘게 폭증
비둘기는 한때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산성인 비둘기 배설물 때문에 문화재와 공공시설이 훼손됐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자란 탓에 전염병을 옮길 우려도 있었다. 종로구 탑골공원에 있는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비둘기 배설물 때문에 부식이 우려돼 유리 보호막에 갇힌 신세가 됐다.
비둘기 수가 폭증한 건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에서 각각 비둘기 3000마리를 날려 보내면서부터다. 야생의 비둘기는 보통 연 2회 번식하고 한 번에 두 알을 낳는다. 하지만 도심에선 매 같은 천적이 없고, 먹이 공급이 활발해 번식 횟수가 연 5~6회까지 늘어난다. 2009년 서울시 전수조사 결과 서울시에만 비둘기가 3만5000여 마리가 살고 있었다. 비둘기로 인한 피해가 늘자 환경부는 결국 2009년 비둘기를 유해 동물로 지정했다. 이후 지자체들은 공공시설에서 비둘기 둥지를 제거했고, 먹이를 주지 않도록 권고했다. 주요 서식지에는 조류 기피제도 설치했다. 요즘 공원에서 비둘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 지난 10여 년간 비둘기의 개체 수가 줄어든 걸까. 정확한 실태 조사는 없지만 환경부와 서울시, 전문가의 말을 종합하면 오히려 개체 수가 늘었을 가능성이 높다. 환경부 관계자는 “주요 시설에서 비둘기를 쫓아낸 것이지, 포획 등으로 직접 개체 수를 조절한 것은 아니라서 줄었다고 보기 어렵다.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서울의 한 구청 관계자도 “매년 비둘기 관련 민원이 폭증하는 걸 보니 비둘기는 오히려 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유해 집비둘기 관련 민원 발생 건수는 2015년 126건에서 2019년 682건으로 4년 사이 네 배 넘게 늘었다. 특히 2019년 민원의 62%(424건)가 주택가에서 발생했다. 반면 공원(18%)과 철도 역사(5%), 교량(5%)의 민원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2009년 조사 당시에는 1㎢당 공원에 사는 비둘기(35마리)가 가장 많았고, 주택가에 사는 비둘기는 16마리에 불과했다.
국립산림과학원 도시숲연구센터 박찬열 박사는 “일종의 풍선 효과”라고 했다. “비둘기의 주 서식지였던 공원과 교량에서 비둘기를 쫓아냈잖아요. 그런데 서울은 워낙 먹이 공급이 활발해 비둘기가 어디서든 살 수 있거든요. 공원에서 쫓겨난 비둘기들이 주택가에 둥지를 튼 거죠.”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되면 허가증을 받아 포획할 수 있지만, 대다수 지자체는 비둘기 포획에 소극적이다. 도시 한복판에 덫을 놓거나 엽총을 쏘기 어렵고, 무엇보다 포획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환경부는 유해 비둘기의 범주를 ‘서식 밀도가 너무 높아 문화재 훼손이나 건물 부식 등 재산상 피해를 주거나 생활에 피해를 주는 집비둘기‘로 한정했다. 아무 비둘기나 포획하는 경우 오히려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 성북구청 관계자는 “구청 차원에서 비둘기를 포획한 적도, 구민이 비둘기 포획 허가증을 발급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주택가로 몰려간 비둘기…비둘기 퇴치 업체는 성업
서울 마포구 공덕동 14층 아파트에 사는 이모(42)씨는 얼마 전 비둘기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비둘기 한 쌍이 베란다 화분 옆에 둥지를 틀더니, 곧 알을 깐 것이다. “배설물 냄새도 심하고, 무엇보다 비둘기가 밤새 울어대는 통에 시끄러워 잠을 못 잤어요. 둥지를 치우려고 나가면 어미가 노려봐 치우지도 못하고…. 결국 몇 달을 같이 살았죠.” 이씨는 새끼들이 둥지를 벗어난 틈을 타 둥지를 치우고, 비둘기가 앉지 못하도록 난간에 케이블 타이까지 설치한 뒤에야 비둘기 지옥에서 벗어났다.
이씨처럼 집에 비둘기가 둥지를 틀어도 지자체의 도움을 받긴 어렵다. 서울시 관계자는 “야생동물로 인한 피해 전부를 시가 부담할 수는 없다”면서 “주택은 개인 재산이기 때문에 스스로 보호 조치를 하는 게 맞는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민들은 직접 조류 기피제를 사서 설치하거나, 비둘기 퇴치 업체를 찾고 있다. 비둘기 퇴치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서울에만 40여 곳. 비둘기가 주로 둥지를 트는 실외기를 소독·약품 처리하고 비둘기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물을 설치한다. 바닥에 뾰족한 버드 스파이크를 깔기도 한다. 이 과정에 25만~50만원이 드는데도, 문의는 매년 급증하고 있다. 비둘기 퇴치 전문 업체 반짝반짝열매 황승배 대표는 “근래에는 퇴치 문의 전화만 하루에 40통씩 오는데, 상당수는 시간이 없어 거절한다”고 했다. 이 업체는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연간 1600여건 정도 의뢰를 처리한다고 한다. 비둘기 기피제 제조 및 판매 업체 이지플렉스 황창영 관리이사도 “포털 키워드 검색을 통해 홈페이지에 유입되는 인원만 하루에 60~70명”이라면서 “재작년보다 50% 이상 늘어난 것”이라고 했다.
비둘기 개체 수를 줄일 방법은 없을까. 박찬열 박사는 “주택가의 처마 아래 틈처럼 비둘기가 둥지를 틀만한 곳에 미리 그물을 쳐 서식을 방해하는 ‘존 디펜스(지역 방어)’ 방법을 써야 한다”고 했다. 조류 기피제는 “인간에게 이로운 새까지 쫓아낼 수 있어서”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립생태원 진선덕 선임연구원은 “도심에 비둘기 아파트를 만든 다음, 비둘기가 아파트에 낳은 알을 가짜 알로 바꾸고 진짜 알은 폐기하는 방식으로 번식 개체군을 조절해야 한다”고 했다. 비둘기가 가짜 알을 부화시키는 데 시간을 쏟도록 유도해 번식 활동을 방해하자는 것이다.
비둘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건 외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2003년부터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면 벌금 50파운드을 부과한다. 2007년 리버풀시는 비둘기를 쫓으려고 대당 3700달러(약 440만원)짜리 ‘로봇 매’까지 설치했다. 스위스는 번식 방지를 위해 비둘기집의 알을 가짜 알로 교체하고 있고, 벨기에는 그물로 비둘기를 잡아 불임 시술한다. 프랑스는 둥지를 흔들어 부화를 방해하거나 심지어는 비둘기를 사살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비둘기에게 먹이를 제공하면 벌금을 매기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환경 보호 단체 등의 반발로 시행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