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하나가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었다. 덴마크에서 1971년에 출간돼, 2017년 한국에 소개된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얘기다. 이 책은 2019년 여성가족부가 선정한 ‘나다움 어린이 책’ 중 한 권이다. 여가부는 2018년 12월 “아동기의 성 평등 교육은 콘텐츠 부족으로 인해 교육 현장에서 어려움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며 ‘성 평등 도서’ 선정 사업을 시작했다. 초등 교사, 아동·청소년 문학가 및 평론가, 그림책 작가 등 전문가 6인으로 구성된 도서위원회가 ‘자기 긍정, 다양성, 공존’을 기준으로 지난 10여 년간 나온 책 1200여 종을 검토했다. 이를 거쳐 여가부는 지난해 134권, 올해 65권 등 총 199권을 ‘나다움 책’으로 선정해 초등학교 5곳에 전달했다. 여가부 관계자는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처럼 외국 책이나 오래된 고전도 있지만, 최근에 출시된 한국 책도 있다”며 “나다움 책은 정식 수업 교재가 아니라 추천 도서로 각 학교 도서관 등에 비치돼 담당 선생님 지도 관리하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 책들은 지난달 25일 국회 교육위원회에 등장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김병욱 미래통합당 의원이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등 일부 나다움 어린이 책에 대해 “초등학생에게 조기 성애화 우려까지 있는 노골적 표현이 있다”며 “그림도 보기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
여가부는 문제 제기 하루 만에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를 포함해 나다움 어린이 책 10권을 배포한 곳에서 거둬들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여가부 측은 “책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책이 지나친 갈등을 일으켜 사업 전체의 취지가 왜곡될 수 있어서 내린 결정”이라며 “아이들의 성 인지 감수성을 키우고, 나다움을 찾을 수 있게 돕는다는 사업 취지가 현장에서 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학부모 등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도 반영하겠다”고 했다.
50년 전 그림책이 2020년 한국에서 왜 소동인 걸까. ‘아무튼, 주말’이 아동 성교육 그림책을 둘러싼 논쟁을 들여다봤다.
◇조기 성애화 부추긴다
“아빠랑 엄마는 서로 사랑해. 그래서 뽀뽀도 하지. 아빠 고추가 커지면서 번쩍 솟아올라. 두 사람은 고추를 질에 넣고 싶어져. 재미있거든.”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의 일부분이다. ‘나쁜 교육에 분노한 학부모 연합(분학연)’은 지난 6월 유튜브에 이를 소개하며, “성관계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저자는 ‘재미있거든’이라고 표현하는데, 아이들이 ‘재미있으니 나도 저렇게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지난달 24일에는 ‘여성가족부가 초등학교에 제공한, 동성애를 조장하고 성관계를 외설적으로 묘사하는 동화책을 전량 수거 및 배포 금지하여 주십시오’라는 국민 청원이 청와대에 올라왔고, 지난 2일 오후까지 7만2000명이 동의했다. 맘카페 등에도 “성관계 묘사가 너무 자극적이다” “아이들이 일찍 성에 눈뜨는 조기 성애화를 부추길 수 있다” “유럽과 우리는 인종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등의 비판이 삽시간에 퍼졌다.
‘아이 심리 백과’ 등을 쓴 신의진 연세대 소아정신과 교수는 “성교육은 아이 성향별, 나이별, 성별에 따라 아주 세심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일반 문학 도서라면 모르겠지만, 성교육 책은 아동들에게 미칠 영향력이 큰 만큼 학부모를 비롯해 소아정신학회, 발달심리학회 등 다양한 전문가와 충분히 상의하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했다.
신 교수는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아이가 팬티를 3~4장씩 껴입는 문제로 외래 진료를 받으러 온 적이 있었는데, 유치원에서 받은 성교육이 무서워서 불안 증상을 보였던 것”이라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자기 몸에 대한 소중함을 배우고, 내 몸이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몸도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는 사회성 교육 등을 같이해야지, 성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성교육이 아니다”라고 했다.
성교육 강사이기도 한 ‘질 좋은 책: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은 진짜 성교육’의 정수연 작가는 “‘아이는 어떻게 태어날까?' 가 1970년대에 쓰인 책이다 보니 ‘아빠 성기가 커지면 넣고 싶어진다’ 등 지금 아이들에게 가르치기엔 남성 중심적 시선이 일부 있다”며 “또 임신 중에 엄마가 겪는 어려움이라든지, 출산 후유증 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정 작가는 “유럽은 성교육이 잘 돼 있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성관계를 하는 시기가 한국보다 빠르다”며 “유럽 성교육의 좋은 점을 가져오되, 신체에 해가 가지 않을 올바른 성관계의 시기나 서로 동의가 필요한 일이라는 점 등을 더 분명히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부모 눈이 아닌 아이 눈으로 바라봐야
‘나다움 어린이책 토론회' 등을 담당했던 비영리 민간 단체 씽투창작소 남윤정 대표는 “이 책은 유·아동 도서인 만큼 부모 눈이 아닌 아이들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며 “부모인 내가 민망하다고 해서 책이 외설적인 게 아니다”라고 했다. 남 대표는 “10세 이하 아이들에게 이 책은 ‘사실을 알기 쉽게 그린 그림책‘으로 인지된다”며 “성관계 사실을 전달하는 걸 피하는 게 오히려 성교육이 제대로 나아가는 걸 막는다”고 했다.
유네스코가 2018년 발표한 ‘국제 성교육 지침(CSE)‘은 9~12세에게 ‘성기가 질 속에 사정하는 성관계의 결과로 임신을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등을 가르치는 것을 학습 목표로 한다. 유네스코는 이런 지침이 성행동 시작 시기를 앞당긴다는 우려에 대해 “세계 각국의 연구는 성교육이 성행동 시작 시기를 앞당기는 일은 거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다”며 “오히려 시작 시기를 늦추거나 성적 행동에 더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갖게 한다”고 했다.
김서정 아동문학 평론가는 “지금 우리 사회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통해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폭력적인 태도가 만연해 있다”며 “이런 사회 현실에 대항하려면 건강한 성 인식을 심어주는 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며,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책”이라고 했다. 김 평론가는 “추상적 그림이나 언어로만 교육하는 건 이 시대의 아이들한테는 이제 먹히지 않는다”며 “세대가 완전히 달라졌는데, 어른들의 낡은 시선으로 바라봐선 안 된다”고 했다.
스웨덴 청소년 문제 정부 고문이자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 저자 인티 차베즈 페레즈는 “부모는 자녀가 성교육 전문가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얻기를 원하는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기를 원하는지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해결책 찾는 기회로 나가야
이번 기회에 우리 성교육 현실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기대 교육대학원 김대유 교수는 “어린이 책뿐 아니라 보건 교과서도 지난 몇 년간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며 “우리나라는 교육부 고시로 초등학교 보건 교과서를 통해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하게 돼 있는데, ‘성기가 너무 대놓고 노출돼 있다’ 등의 민원이 일부 단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됐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런 논란이 지속되면서 지난 11년간 보건 교과서 개정이 이뤄지지 않다가, 교과서 11종 중 1종이 최근 상황을 반영해 올해 개정됐다”며 “그러나 학교마다 채택하는 교과서도 다르고, 일부는 창의적 체험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보건 수업을 대체해버리기도 해 모든 초등학생이 새롭게 개정된 교과서를 쓰지는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아홉살 성교육 사전’ 등을 쓴 손경이관계교육연구소 손경이 대표는 “얼마 전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가 바나나에 콘돔 끼우는 수업을 하려다가 거센 비난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성교육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바나나가 아닌 다른 모형이라도 논란이 될 것”이라며 “더 큰 문제는 초·중학교 때 책임, 선택, 존중 교육이 부족한 채 고등학교 때 갑자기 피임 교육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손 대표는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학부모, 선생님, 각계 전문가 등 다양한 의견을 골고루 들어서 진짜 우리한테 맞는 우리식 해법을 찾았으면 좋겠다”며 “특히 성교육 대상은 아이들인 만큼 어른들의 시각으로만 해결하지 말고, 아이들의 의견이 반영된 성교육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