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스윙이다. 하지만 보고 있는 내 허리가 다 아프다.”
지난해 1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골프 선수 최호성(47) 의 ‘낚시꾼 스윙’을 보고 한 얘기다. 2018년 최호성은 아시안 투어와 공동 주최로 열린 한국 오픈에 출전했을 때 스윙한 뒤 클럽을 낚아채듯 들어 올리는 동작을 선보였다. 이 모습이 방송에 중계되고, SNS를 통해 퍼지자 낚시꾼이 낚시대를 들어 올리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낚시꾼 스윙’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그해 말에 온라인 청원 전문 사이트 ‘체인지(change.org)’에는 “최호성을 피닉스 오픈에 초청하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이 올라온 지 한 달 만에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열리는 AT&T 페블비치 프로암 대회에 초청받았다. 컷 탈락을 했는데도 최호성을 알아본 팬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스윙 동작을 흉내 냈을 정도로 대회 내내 화제를 몰고 다녔다. 두 달 후엔 케냐 나이로비 카렌 컨트리클럽에서 열리는 유럽프로골프투어 케냐오픈에 초청을 받아 출전했다.
골프는 몰라도 최호성의 낚시꾼 스윙은 안다.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워서 사진 한 번만 봐도 인상에 남기 때문이다. 최호성에게 “왜 그런 스윙을 하느냐”고 묻고 답을 듣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가 참치 공장에서 일하며 엄지가 잘린 얘기나 뒤늦게 독학으로 골프를 배운 얘기부터 듣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몸이 뱅글뱅글 돌아가거나 허리가 뒤로 90도 가깝게 젖혀지기도 하는 그의 스윙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최호성과 인터뷰를 하기로 했을 때 그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포항 장기에 내려갔다. 8, 9월에 쭉 KPGA 투어 일정이 잡혀 있어서 최호성을 그의 고향 집 앞에서 만났다. 장기는 포항역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바닷가 마을이다. 그는 바위와 방파제를 가리키며 “어렸을 땐 여길 뛰어다니면서 노는 거랑 집에서 4km 떨어진 학교(국민학교)를 오간 거 말고는 운동을 따로 해본 적이 없다. 골프는 스물다섯 살에 난생처음 해본 운동이다”라고 했다.
–어렸을 때 골프를 전혀 접할 수 없는 환경이네요.
“아버지는 20년간 배를 타셨다가 나중에 농사와 바다 일을 같이 하셨고, 어머니는 최근까지도 가끔 물질을 하셨던 해녀입니다. 저희 삼남매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도와야 했어요. 밭일, 뱃일 거드는 건 물론이고 하루에 여덟 시간씩 어머니가 잡아오신 성게알을 바르고 그랬죠. 그때 골프라는 운동이 뭔지도 몰랐어요. 제가 커서는 포항에 골프 연습장이 생기긴 했는데, 지나가면서 ‘저건 닭장인가’라고 생각했어요.”
–어려선 뭘 하려고 했나요.
“바닷가에서 자랐고, 부모님이 다 바다에서 일을 하셨으니 저도 비슷한 일을 할 줄 알고 포항수산고 가공과를 갔어요. 졸업한 뒤 동원수산의 참치 하역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스무 살에 사고를 당했거든요. 전기톱으로 냉동 참치의 피 제거 작업을 했는데, 제 장갑이 언 참치에 엉겨 붙은 거죠. 눈 깜짝할 사이에 엄지 한 마디가 잘렸어요. 병원에 가서 복부 지방 이식을 했습니다.”
–이식 흔적을 찾기 어려운데요?
“(양손 주먹을 쥐고 엄지 손가락을 맞대더니) 오른손만 보면 그렇게 보이죠. 같이 보면 이렇게나 길이 차이가 나잖아요. 이건 그냥 지방을 붙인 거지 근육이나 신경이 없어서 힘이 들어가지 않아요. 사고 후 1년간은 오른손으로 물건을 잡다가 놓친 적이 많았어요. 손가락이 온전히 있단 생각을 했으니까요. 오른손잡이인데 오른손 엄지 첫 마디가 없으니 뭘 받치고 있질 못하기도 하고요. 처음부터 엄지 없이 골프채를 잡아서 거기에 적응을 하긴 했는데, 날이 좀만 추워져도 감각이 떨어지고 피가 나는 건 고역이죠.”
‐일종의 장애인 셈이네요.
“네. 일단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했고, 그때부터 제가 생각하던 대로 흘러가질 않았어요. 원래 신검에서 특급이 나왔는데, 수술 후 신검을 다시 받아야 한다고 해서 갔더니 면제가 나왔어요. 친구들 군대 갈 때 당연히 같이 가는 줄 알았는데 그걸 안 보내주니까 막막했어요. 해안 방위라도 가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된대요. 다니던 직장에도, 군대에도 못 가니까 그때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2년 정도 방황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닥치는 대로 하기 시작했죠. 쇼핑센터, 마트에서 배달 일을 했고, 광산에서도 일을 했고, 자판기에서 동전 수거하고 음료수 채워 넣는 일도 하고요. 엘리베이터도 없는 4~5층짜리 아파트에 생수나 쌀 같은 걸 배달하는 일을 많이 하긴 했습니다. 체력은 그때 키웠나봐요, 허허.”
–골프는 언제 시작했습니까.
“스물세 살 때 안양의 한 골프장에서 숙식 제공하는 일이 있다고 해서 갔죠. 현관에서 손님 골프백 옮기기, 그늘집 비품 채우기, 라커룸 청소 같은 걸 하는 일이었어요. 2년쯤 일했을 때 당시 정영달 부사장님이 직원들이 골프를 알아야 고객 마음을 안다면서 전 직원에게 골프를 치라고 하셨어요. 제 인생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을 때입니다. 이제까지 뭐 하나 잘한 게 없는데 이것만큼은 잘해야겠다, 이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서 2년도 안 됐을 때 세미 프로에 합격했습니다.
“그때는 일하는 시간 말고는 연습밖에 안 했습니다. 오전 근무 때는 오전 네 시 반쯤 일어나서 다섯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일을 한 다음에 골프장이 문을 닫는 밤 11시까지 연습을 했어요. 만약 오후 세 시에 출근하는 오후 근무를 하면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연습을 하는 거죠. 그땐 아예 골프장에서 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하루 6~8시간씩 골프만 연습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배웠나요?
“다른 사람이 치는 걸 곁눈질로 보고 따라 치는 정도? 독학이었죠. 그때 골프장에서 골프 잡지를 네댓 권 구독했는데 그게 제 선생님이었습니다. 타이거 우즈, 어니 엘스 등 유명 선수들의 자세를 사진으로 찍어 분석해놓은 것을 보고 어떻게 쳐야 하는지 공부했어요.”
–짧은 시간에 독학으로 세미 프로가 됐다면 그건 타고난 재능이 있는 거 아닐까요.
“오른손 엄지 없이 골프채를 잡아야 했고, 어떻게 골프를 치는 건지 알려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쉬는 날도 없이,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말고는 2년 동안 연습만 했어요. 저한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남들보다 노력은 많이 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스물다섯 살에 처음 골프를 시작해서 스물일곱 살에 세미 프로에 합격했다. 그 뒤로 골프장에서 6개월 더 일하다가 그만뒀다. 그는 “아마 골프장 아르바이트 출신 중 프로가 된 케이스는 내가 처음일 것이다. 동료들이 날 대하는 시선이 달라졌다. 내 갈 길(프로)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골프장을 나왔다”고 했다. 재워주고 먹여주던 일터에서 나와보니 오갈 데가 없었다. 서울에 사는 세 살 터울 누나의 집으로 들어가 어린 조카의 방에서 함께 잤다. 그는 “손가락이 잘렸을 때나 막노동을 할 때보다 이때가 더 힘들었다”고 했다.
–골프는 다른 운동 종목에 비해 돈이 많이 듭니다.
“저는 혼자 골프를 배워서 주위에 친구나 동료, 인맥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어려서부터 함께 친 선수들은 대부분 집에서 지원을 받는 경우였어요. 그들끼리 어울려 다니기도 하고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인맥도 있었죠. 저는 돈도 인맥도 없어서 막막했어요. 당장 연습장에 갈 돈도 없으니까요. 골프연습장에 가서 무작정 ‘저는 최호성이고 이번에 프로 시험에 합격했는데 여기서 공만 좀 치게 해 주십쇼’라고 얘길 하고 다녔어요.”
–레슨을 해서 먹고살 수 있지 않나요.
“제가 골프 잡지를 보면서 골프만 배운 게 아니라, 투어에 나가면 상금을 벌 수 있단 걸 알았죠. 우승한 선수들이 상금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보면서 투어에 진출해서 상금을 받는 프로 선수가 되려고 했어요. 그렇게 목표를 정해 놓고 나니까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보다는 연습을 많이 할 방법을 찾게 되더군요. 레슨을 많이 하다 보면 거기에 안주할 것 같기도 했고요. 연습장에서 아예 공짜로 칠 수 없으니까 회원 한두 명 레슨은 하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레슨도 많이 하고 사람들과도 어울려야 하는데 저는 제 공만 쳤으니까 ‘개인주의자’라고 눈총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제 갈 길이 있었고, 그 길을 가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맞춰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동냥 골프 같은 거네요. 그런 방법이 통합니까.
“아뇨. 안 치게 해주죠! 그래서 여기저기 전전하면서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운딩 나가는 건 돈도 돈이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돈이랑 지인이 다 필요하거든요. 저는 다른 선수들 열 번 나갈 때 한 번꼴로 나갔어요. 누구 한 명이 빠진다고 하면 자리를 메워주러 가는 경우죠. 한번 나가면 제가 평소 연습하면서 머릿속에 그려본 온갖 걸 다 해봤어요. 한 바퀴를 돌아도 열 바퀴를 돈 것처럼 해야 남들과 비슷해지니까요.”
–남들은 십대에 시작하는 운동을 이십대 중반에 시작했습니다. 출발도 한참 늦은 데다가 아무 지원도 없었습니다. 투어에 나갈 수 있단 자신감이 어디서 왔나요.
“그때 누나가 ‘주머니에 돈 한 푼도 없는 놈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러냐’고 하면서도 저한테 꼭 투어에 나가라고 했죠. 이미 골프장에서 일과 연습을 동시에 하면서 세미 프로에 합격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연습을 많이 하면 된다,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2001년 2부 투어에서 두 번 우승하면서 상금왕이 됐고, 2003년부터 정규 투어에 들어갔다. 2008년 코리안투어 첫 우승을 한 데 이어 2011년에 두 번째 우승을 했다. 2012년부터 일본프로골프 투어(JGTO)에도 진출해 세 차례 우승을 했다. 마지막 우승은 지난해 일본 오키나와에서 끝난 헤이와 PGM 챔피언십에서였다. 일본에서 그는 이름의 가운데 글자(虎)를 따서 ‘토라(호랑이)상’이라고 불린다. 현지 골프 전문 매체에서 주관한 인기 투표에서 1위를 할 정도로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에서 우승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낚시꾼 스윙 덕분이다. “고루한 일본 골프계에 신선한 충격과 재미를 줬다”는 반응이다. PGA 골프 스타이자 NBC골프 해설 위원인 폴 에이징어는 “스윙을 자유롭게 하는 법을 깨치는 그날만큼 골퍼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은 없다. 그게 어떤 모습인지 최호성이 완벽히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낚시꾼 스윙을 왜 합니까.
“저도 처음에는 남들 따라 쳤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하는 스윙을 했어요. 세월이 흐르다 보니 어릴 때 시작한 선수들보다 유연성이 떨어지고, 나이가 들면서 힘도 떨어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관절 부상을 피하면서 비거리를 늘리거나 유지하는 방법을 찾다 보니 2018년쯤에 그런 스윙이 나왔어요. 또다시 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거죠. 어차피 처음부터 남한테 배운 게 아니라서 바꾸는 데 대한 거부감이나 어색함은 없었어요.”
–곱게만 보는 건 아니던데요. 일단 정석이 아니니까요.
“사람 얼굴이 다 다른 것처럼 몸도 다 달라요. 같은 한국인이어도 키 다르고, 체중 다르고, 몸의 비율이나 근육 생김새도 같은 구석이 없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똑같은 스윙을 합니까. 스윙의 정석? 우리가 사는 데 정석이 있나요? 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맞춰 사는 거지, 정석이란 게 뭔지 누가 정해주나요.”
–낚시꾼 스윙이 쇼맨십 때문이란 얘기도 들었을 겁니다.
“지금 제 목표는 두 아들(중2·중1)이 군대에 갈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는 겁니다. 한 타, 한 타가 가족의 생계이자 저의 생존입니다. 그런데 관심을 끌려고 하거나 장난을 치기 위해서 스윙을 하다뇨. 필드뿐만 아니라 어느 일터에서나 아마추어는 없습니다. 다들 프로로 일하고 있지 않나요.”
–지난해 일본에서도 낚시꾼 스윙을 하면서 우승을 했습니다. 다시 한번 묻지만, 당신의 성과는 노력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겁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게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골프장을 전전하면서 연습할 때 뉴서울 CC의 조광연습장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예전에 골프장 직원 시절 골프백을 자주 옮겨드린 분인 거예요.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 그분 차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차가 완전히 퍼졌는데, 제가 비를 맞으면서 타이어를 갈아드린 적이 있어서 잊을 수 없었죠. 그걸 얘기하자 절 기억하시고 골프장에서 연습을 하게 해주셨어요. 저는 생수 배달을 할 때나 골프장에서 일할 때나 골프 연습을 할 때나 최선을 다했어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골프는 예민하고도 섬세한 스포츠입니다. 한 타에도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한 타를 칠 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죠. 그런데 바람이나 비처럼 자신이 바꿀 수도 없는 환경 탓만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샷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저는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최선을 다한다고 최선의 결과가 나오나요.
“사람마다 주어진 환경이 다 다르니까 각자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도 자신의 인생으로 책임을 져야죠. 그렇게 산다고 언제나 원하는 결과를 얻는 건 아니지만, 한두 번쯤은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저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