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유모(30)씨 부부는 국내 작가 중 작품 값이 가장 비싼 화가인 김환기 화백 그림의 주인이다. 작년 말 3억8000만원에 거래된 김환기 화백 작품 ‘Untitled 10-V-68 #19’를 샀다. 얼마 전까지는 한국 근현대 대표 작가 중 하나인 천경자 화백의 ‘금붕어'(거래가 550만원)도 집에 걸려 있었다. 재벌 2세일까?

“3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에요. 김환기 그림은 500만원 주고 다섯 조각, 천경자 그림은 50만원 주고 다섯 조각 샀어요.” 유씨가 말했다. 다섯 조각? 그림 단위가 ‘점(點)’이 아니라, ‘조각’이다. 퍼즐처럼 그림을 조각내 가지고 있단 얘기인가.

2030 밀레니얼 세대에서 ‘그림 공구(공동 구매)’가 인기다. 여러 사람이 십시일반으로 한 작품을 공동 소유하는 방식. 유명 가수 콘서트 티케팅 기다리듯 컴퓨터 앞에 앉아 ‘광클’한다. 구매 링크가 열린 지 1분 만에 1억 넘는 돈이 모이기도 한다. 미술 콜렉터 하면 떠오르는 재벌가 ‘큰손’ 사모님들의 예술 쇼핑과는 전혀 다른 방식. 이른바 ‘미술품 공동 구매 플랫폼’이 확산하고 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불특정 다수가 돈을 모아 명화를 구매하는 미술품 공동구매가 인기다. /일러스트=안병현

◇작품도 공구, 잘게 쪼개 그림 지분 산다

미술 공동 구매는 그림 원본은 놔둔 채 소유권을 수백~수만 조각으로 나눠 사는 방식이다. 투자를 목적으로 여러 개인에게 자금을 모으고, 발생하는 손익을 분배하는 ‘크라우드 펀딩’과 유사한 개념이다. 최소 10만원으로 이중섭·박서보 등 국내 작가들부터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살바도르 달리 같은 세계적 예술가들의 작품까지 소유할 수 있다.

유씨 부부가 산 김환기 그림(3억8000만원)은 소유권 380조각으로 분할해 1조각당 100만원으로, 천경자 그림은 55조각으로 분할해 한 조각 10만원에 판매했다. ‘그림 공구’가 등장한 건 2~3년쯤 전. 2018년 4월 스위스의 소셜 커머스 업체 코카(Qoqa)는 피카소의 1968년 작 ‘소총병의 흉상(Buste de mousquetaire)’을 200만 스위스프랑(약 25억9000만원)에 내놨다. 4만 조각으로 나눠 판 이 그림 소유권의 조각 당 가격은 50스위스프랑(약 6만4000원). 공동 구매에 무려 2만5000명이 몰렸다.

이 모델이 한국으로 넘어왔다. 아트앤가이드가 지난 8월 1300만원에 내놓은 요시모토 나라의 ‘Slash with a Knife’는 20초 만에 펀딩이 끝났고, 김환기 화백 그림 ‘Untitled 10-V-68 #19’에는 1분 만에 1억5000만원이 몰렸다. 아트투게더에서도 약 3억2000만원에 나온 이우환의 ‘점으로부터'(1983)를 268명이 나눠 가진 걸 비롯해 데이미언 허스트, 줄리언 오피, 무라카미 다카시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모두 팔렸다. 지금까지 국내 최고가는 아트앤가이드가 지난 3~5월 15억9500만원을 모은 이우환 화백의 ‘동풍'(1985)이다.

◇2030 ‘보는 미술’에서 ‘사는 미술’로

그림 공구에 나선 이는 대부분 2030 미술 애호가. 아트앤가이드를 운영하는 열매컴퍼니 김재욱 대표는 “20대부터 40대 초반까지 젊은 투자자 비율이 60%를 넘는다”면서 “미술에 관심이 많지만 고가 작품을 구매하기는 부담됐던 젊은 층이 많이 이용한다”고 했다. 아트투게더도 사용자 66%가 20~30세대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미술관과 갤러리, 전시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보는 미술’에 익숙해진 2030세대가 ‘사는 미술’까지 취향을 넓힌 것”이라고 말한다.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는 “이 세대는 어릴 때부터 부모와 미술관에서 명작을 감상하거나 유수 작가의 전시를 접할 기회가 많아 기성세대보다 예술 작품을 향유하는 데 익숙하다”면서 “SNS로 전시 인증샷을 남기며 취향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등 미술 전반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2030세대는 이미 미술 전시에선 주 소비층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작년 관람객 274만명의 연령대를 조사해보니 20대가 전체 관람객의 29%를 차지했고, 그 뒤를 30대(18%), 40대(18%)가 이었다. 개방적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문턱 높은 갤러리 문화도 바꿔놓고 있다. 과거엔 그림 살 사람만 가는 곳으로 인식됐던 갤러리가 지금은 미술을 즐기는 놀이터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 방문객들이 작품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도록 포토존을 운영하거나, 작가와 함께 와인을 마시며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등의 문화 프로그램을 도입한 곳도 많다. 2030세대 방문객이 절반 이상이라는 삼청동 아줄레주 갤러리 박서영 관장은 “젊은 세대는 갤러리 문화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다.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인증샷을 남기며 관람을 즐긴다”면서 “작가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등 이색 프로그램을 특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갤러리로선 잠재 고객을 위한 투자다.

◇원화 대신 작품 확인서 걸어둬

미술품 공동구매 플랫폼 '아트앤가이드'는 그림 사본을 담은 작품 확인서를 온·오프라인으로 발급해주고 있다. 사진은 오프라인으로 제공되는 작품 확인서. /아트앤가이드

직장인 류현우(31)씨는 아트앤가이드에서 김환기, 유영국, 이우환 등 유명 화백 작품 여러 점을 공동 구매했다. 공구한 그림을 집에 걸 수는 없다. 대신 류씨는 업체가 보내준 B4용지 크기의 작품 확인서를 액자에 넣어뒀다. 확인서에는 그림 이미지와 함께 작품 정보와 소유권을 보증하는 증서가 들어 있다. 원래 미술을 좋아했다는 류씨는 “어릴 때부터 팬이었던 작가들의 그림을 일부나마 소유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라면서 “그림 공동 구매는 취미 생활이자 재테크”라고 했다.

공동 구매가 끝난 작품은 충분히 값이 오르면 소유주들 동의를 받아 재판매한다. 아트앤가이드가 공동 구매한 김환기의 ‘산월'은 2개월 만에 수익률 22.2%를 기록했고, 아트투게더가 공동 구매한 이우환의 ‘대화’도 6개월 뒤 20.67% 오른 가격에 팔렸다. 팔리기 전까지는 회사가 작품을 관리하면서 소유주만 방문할 수 있는 프라이빗 갤러리에 전시해두거나, 기업·레스토랑 등에 빌려주고 수수료를 소유주들에게 나눠 준다. 아트투게더 관계자는 “렌털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은 투자금의 4~6%”라면서 “임대 수익만 생각해도 적금보다는 나은 수준”이라고 했다.

공동 구매뿐만이 아니다. 젊은 세대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찾거나, 온라인 경매에서 유명 작가의 판화나 아트 토이 등 상대적으로 싼 작품을 구입하기도 한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에 따르면 국내 주요 경매사의 올 상반기 매출은 약 411억원. 전년 동기(721억원) 대비 약 43% 줄었지만, 코로나 악재 속에서도 중저가 작품을 찾는 이는 꾸준히 늘고 있다. 올 상반기 케이옥션의 500만원 이하 낙찰작은 3893건으로, 전년 동기(2355건) 대비 65% 늘었다. 같은 기간 서울옥션도 1133건이 낙찰돼 전년(1140건)과 큰 차이가 없었다.

경매사들도 미술 시장에서 급부상한 젊은 고객을 붙잡기 위해 변화하고 있다. 서울옥션은 운동화나 아트 토이 같은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을 경매하는 ‘블루’를 2016년부터 운영 중이다. 케이옥션도 2018년부터 수십만~수백만원대 작품을 경매하는 ‘위클리 온라인’을 시작했다. 이호숙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공동 대표는 “미술품 구매 연령층이 확연히 젊어졌다. 카우스(KAWS)처럼 아트 토이를 주로 제작하는 작가가 메이저 경매에서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등 작품 선정에서도 종전 틀을 벗어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샤넬 백 대신 그림을 산다’를 쓴 윤보형(33) 변호사는 “대학생 때부터 한정판 포스터나 판화, 아트 토이 등 저렴한 작품을 모았다”면서 “명품 가방을 사거나 해외여행 갈 돈으로 좋아하는 작가 작품을 모으면서 나중에 시세 차익까지 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림, 감상 아닌 소유가 우선?

미술품을 공동 구매하는 데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한 미술 큐레이터는 “예술품은 소장하고 감상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인데, 실물을 보지도 않고 값이 오르기만을 기대하면서 돈을 붓는 것은 미술을 주식이나 부동산 취급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재테크 수단으로 전락한 걸 안 작가들이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정연심 교수는 “한국 미술 시장은 규모가 크지 않아 환금성이 낮다. 작가에 대한 평가가 갑자기 바뀌면서 작품 값이 급락하는 경우도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위험 요소도 있다. 아직까지 미술 작품의 공동 소유권을 명확히 규정한 법령이 없다. 미술품은 동산(動産)으로 취급돼 집처럼 등기 등록을 할 수도 없다. 미술품 공동 구매 플랫폼들이 블록체인처럼 위·변조가 어려운 회계 장부를 도입하고 있지만, 법적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법 전문 김형진 변호사(법무법인 정세)는 “아직 미술품 공동구매는 감독기관도, 규제도 없는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 감정가액이 적절한지, 매각 절차는 안전한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림 공구, 블록체인이 왜 거기서 나와?

상당수 미술품 공동 구매 플랫폼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소유권을 관리하고 있다. 블록체인은 거래 내역 등을 기록한 장부(블록)를 체인 형태로 연결해 참여자 데이터를 분산 저장하는 데이터 위·변조 방지 기술이다.

블록체인에 미술품 거래 내역을 기록하게 되면 해킹 위협으로부터 소유권 장부를 보호할 수 있다. 미술품을 거래할 때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프로비넌스(provenance·소장 이력)를 투명하게 관리할 수 있기도 하다. 국내 미술품 공동 거래 플랫폼 아트앤가이드는 블록체인 플랫폼인 이더리움에 거래 장부를 기록하고 있고, 아트블록은 자체 개발한 ‘테사(TESSA)’ 앱을 통해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거장의 소유권을 담은 조각을 거래하고 있다.

미국 미술품 공동 구매 플랫폼 마스터웍스가 2018년 내놓은 앤디 워홀의 <1 Colored Marilyn(reversal series)>은 20달러 토큰 9만9825개로 나뉘어 판매됐다. /마스터웍스

◇암호화폐 사고팔듯 미술품 거래

해외는 좀 더 복잡한 증권형 토큰 발행(STO) 방식이 인기다. STO란 암호 화폐를 발행한 회사의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 있는 증권이다. 피카소, 모네, 워홀 같은 19~20세기 거장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는 미국의 마스터웍스(Masterworks)가 대표적 예시다. 마스터웍스는 그림마다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한 다음 투자자들에게 이 법인의 지분을 토큰화해 판다. 투자자들은 이 토큰을 주식 사듯이 구매해 그림에 투자하게 된다. 토큰을 갖고 있으면 그림 원본이 제3자에게 판매되기 전에도 지분을 코인 거래소 같은 2차 시장에 매각할 수 있다. 마스터웍스의 토큰 하나당 가격은 20달러다.

세계 최초로 암호 화폐 미술 시장을 만들어낸 메세나스(Maecenas)도 2018년 시가 560만달러(약 66억원)인 앤디 워홀의 ‘작은 전기 의자’ 14점의 지분 49%를 토큰 형태로 내놨다. 이 지분은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기존 암호 화폐와 메세나스가 자체 발행한 ART 코인을 통해 살 수 있다. 지분을 보유한 사람은 그림을 전시하거나 대여할 때 발생하는 수익을 나눠 가지거나, 코인 거래소에서 지분을 매각할 수 있다. 메세나스는 여기서 거래 수수료 1%와 미래 수익의 20%를 뗀다. 한국에서는 암호 화폐 규제 때문에 아직 STO 방식으로 미술품을 사고파는 플랫폼은 없다.

블록체인 매매는 온라인 공간에서 이뤄지다 보니 경매보다 수수료가 낮은 편이다. 경매 업체 소더비나 크리스티의 경매는 거래 수수료가 12~30%로 높은 데 반해, 메세나스 등 블록체인 기반 미술품 매매 플랫폼의 총수수료는 2~6% 수준이다. 복잡한 경매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구매할 수 있다 것도 강점이다. 문제는 거래량이다. 아직까지 미술품 소유권을 쪼개 매매하는 이가 극소수다 보니, 사고파는 수단인 암호 화폐 가격이 불안정하다. 발행 당시 개당 0.66달러였던 메세나스의 ART 코인은 현재 약 98% 하락한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예술계에선 위작 논란을 막을 대안을 블록체인에서 찾기도 한다. 블록체인 기반 미술품 매매 플랫폼 아르테이아(Arteïa)는 위·변조할 수 없는 전자 장부에 예술품 6만여 점을 등록했다. 아르테이아 사용자들은 작품마다 부여된 전자 코드를 확인해 작품의 위작 여부, 소유권 이전 여부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선 서울옥션이 한화시스템과 손잡고 경매에 나온 예술품 정보를 거래하는 데이터 플랫폼을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