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아상은 밀가루⋅버터⋅공기의 조합이다. 밀가루 대비 50%까지 함량이 올라가는 버터의 힘을 받아 속은 부드럽고 겉은 바삭하며 향기롭다. 버터를 넣어 만든 반죽을 몇 번 접고 발효까지 거치며 얇은 층이 몇백겹 부풀어 오른다. 그 사이사이로 공기가 들어가 특유의 식감과 맛이 나온다.

프랑스 본토 크루아상은 한국에서 먹는 것과 맛과 색, 향에서 차이가 난다. 버터는 나라마다 품질 차이가 크다. 밀가루도 마찬가지다. 각 나라에서 재배한 밀은 그 나라의 음식에 맞는 성질을 지녔다. 프랑스 빵은 역시 프랑스 밀가루로 만들어야 그 맛이 난다. 빵을 만들어 놓으면 결이 선명하고 탄성이 좋다.

지금은 프랜차이즈 식으로 냉동 생지를 사서 집에서도 크루아상을 굽는다. 그만큼 개성 있는 맛 찾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이는 직접 반죽을 치대고 접고 발효시켜 크루아상을 굽는다.

서울 청운동 '더마틴'의 하몬 젤라토 크루아상 샌드위치. 젤라토 전문점이지만 크루아상도 탁월하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합정동 양화진 역사공원 근처에 있는 ‘밤앤크루아상’은 이름대로 크루아상을 전문으로 한다. 짙은 쥐색으로 칠한 외관을 한 이 집에 들어서면 밝은 쇼케이스에 가득 들어찬 크루아상과 그 친구들이 있다. 코코아 파우더를 두껍게 뿌리고 깊숙이 초콜릿을 심어 넣은 ‘초코 뺑 오 쇼콜라’는 보기만 해도 죄책감이 드는 단맛이다. 헤이즐넛이 올라간 ‘초코 아몬드 크루아상’도 만만치 않은 퇴폐미를 지녔다.

주인공인 크루아상은 모양이 일정하고 볼륨이 잘 잡혔다. 빵을 굽는 과정이 정확하고 숙련되었다는 뜻이다. 맛도 모양을 어긋나지 않는다. 크루아상을 씹으면 풍만한 볼륨이 확연히 느껴진다. 단면에는 기둥처럼 빵을 지지하고 있는 얇은 층이 보인다. 건물의 단단한 골조처럼 빵을 지탱하는 이 층이 크루아상 특유의 식감과 맛을 만든다. 크기도 작지 않아 크루아상 하나면 아침 식사를 갈음할 수 있을 정도다.

한강을 건너 서초동에 가면 ‘모멍데모시옹(Moments d’emotions)’이 있다. 무스 케이크, ‘구움 과자’ 등을 파는 이곳에는 희끗한 머리를 짧게 자른 주인장이 홀로 가게를 지킨다. 하얀 선반 위에 고양이처럼 얌전히 앉아 있는 과자들을 보면 구매 충동을 참기 어렵다. 이 집의 과자들은 풍미가 진하고 식감이 두텁다. 그 중 ‘티오피 쇼콜라’는 이름만큼이나 임팩트가 강하다. 초콜릿과 초콜릿 무스가 몇 겹 올라간 이 과자를 부숴 먹으면 묵직한 맛에 눈이 크게 뜨인다. 링 모양으로 구운 슈 페이스트리 사이에 피스타치오 무스를 넣은 ‘파리 브레스트’ 역시 혈압과 혈당을 동시에 펌프질하는 맛이다. ‘더 이상은 안 돼’라는 내면의 소리침도 소용이 없다.

초콜릿에 담갔다 뺀 것처럼 초콜릿으로 뒤덮인 ‘쇼콜라 크루아상’은 버터와 초콜릿의 무한한 앙상블이다. 자장가처럼 거슬림 없는 단맛의 초콜릿을 지나 프랑스제 향수를 방불케 하는 진한 버터향이 뭉쳐 있는 크루아상의 속살을 만나면 작게 반짝이는 이 집이 지향하는 맛을 알 것 같다.

경복궁을 지나 청운동 자하문 터널 근처까지 가면 ‘더마틴(The Martin)’이라는 곳이 있다. 좌석은 없다. 사람 두셋이 겨우 서 있을 만한 공간뿐이다. 바 테이블 너머는 주인장의 주방 겸 작업실이다. 주 메뉴는 이탈리안 젤라토. 쌀, 딸기, 카망베르 치즈, 피스타치오 등 이 땅과 외국의 식재료를 총망라해 젤라토를 만든다.

주인장이 가진 재료에 대한 집착은 마니아를 넘어 기인(奇人) 수준이다. 밀가루와 버터는 프랑스산, 설탕은 파라과이, 소금은 안데스 것을 콕 집어 쓴다. 규칙 또한 특이하여 처음 온 손님은 무조건 젤라토 1컵과 시식을 해야 한다. 뒤에 긴 줄이 서 있건 말건 이어지는 차분한 설명과 모든 종류의 젤라토를 맛보는 시식을 하노라면 주인장의 차분한 말투 속에 숨은 열정이 느껴진다.

좁은 주방에서 구워낸 크루아상도 ‘도대체 이런 빵이 여기 왜’라는 말이 나온다. 프랑스산 버터의 향은 숨이 막힐 것처럼 그윽하게 기도를 가득 메운다. 젤라토와 하몬을 넣고 소금과 후추, 올리브오일을 친 크루아상 샌드위치는 또 다른 이야기다. 젤라토와 어울리도록 일부러 얇고 촘촘히 구운 크루아상의 결이 부서지고 차가운 감촉이 혀에 느껴질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듯 설레고 기쁘다.

누구에게는 그깟 빵 조각일지도 모른다. 별 차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작은 빵 하나에 주인장의 밀가루 묻은 두터운 손길이 담겨 있음을 안다. 이른 새벽과 늦은 밤의 선선한 바람이 담겨 있음도 안다. 알게 되면 다르게 보인다. 맛도, 사람도, 그리고 고소한 버터 향이 감도는 이 세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