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생활 4년 차인 '판소리 유학생' 로르 마포가 '흥보가' 한 대목을 부르고 있다. 카메룬에서 태어나 열 살 때 프랑스로 입양된 그녀는 판소리의 매력을 알고 나서 30대에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판소리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덕목이 담겨 있다"며 "코로나 사태로 공연이 다 취소되고 월세도 몇 달치 밀렸지만 끝까지 공부를 완수할 것"이라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이 흑인 소리꾼은 카메룬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 중서부 적도 부근에 있는 나라다. 영국·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아 영어와 프랑스어가 공용어다.

로르 마포(Mafo·36)는 어머니가 둘이다. 열 살 때 프랑스에 사는 이모에게 입양됐기 때문이다. 카메룬에 사는 친모는 여전히 가난하다. 날마다 인터넷 전화로 안부를 묻는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대학을 졸업한 마포는 우연히 접한 판소리에 사로잡혔다. 직장에 사표를 내고 2017년 2월 국제선 비행기에 올랐다. 11시간을 날아 도착한 한국에서 ‘소리꾼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녀는 이듬해 10월 유명해졌다. 프랑스 엘리제궁에서 열린 한·불 대통령 만찬에 한복을 입고 등장한 것이다. 흥보가 중 ‘돈타령’(흥보가 돈을 갖게 된 후 기뻐하며 부르는 대목)을 불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에서 판소리 유학을 하며 무대에 선 경험이 많아요. 엘리제궁이라고 떨진 않았어요. 지난해 카메룬 고향에 가서 가족들 앞에서 공연할 때 훨씬 더 조마조마했습니다. ‘딱 1년만 판소리 공부하고 돌아오겠다’며 엄마한테 거짓말하고 떠났거든요(웃음).”

최근 서울 남산에서 만난 마포는 우리말이 유창했다. 판소리는 그보다 더 막힘이 없었다. 경기도 가평에서 이른바 ‘산(山)공부’를 하다 내려왔다는 그녀에게 춘향가 중 ‘사랑가’ 한 토막을 청했다. 이 소리꾼은 발성기관을 연장하듯이 부채부터 촥 펼쳤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판소리 나라에서 맞는 네 번째 추석. 이국적인 이 소리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입시를 준비 중이다. 추석 보름달을 향한 소원을 묻자 “가족과 친구 모두 건강하기를 바란다”며 “10월에 실기 시험을 치르는데 정화수 떠놓고 합격을 빌어야겠다”고 했다.

판소리 스승인 민혜성 명창(오른쪽)과 함께. 민혜성 명창은 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다. /로르 마포 제공

◇나는 왜 판소리에 꽂혔나

2015년 그녀가 삼성전자 파리 지사에서 일할 때였다.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며 동료가 주불 한국문화원에 초대했는데 마침 판소리 워크숍 기간이었다. 민혜성 명창(국가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이 들려준 소리에 빠져들고 말았다. 2주 동안 하루도 안 거르고 판소리 공연을 봤다. 마지막 날 질문했다. “판소리를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민혜성 선생님이 뭐라고 답하던가요.

“오페라를 배우려면 이탈리아에 가야 하듯이 판소리를 배우고 싶다면 한국에 와야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가면 가르쳐주실 건지 물으니 ‘오케이!’ 하신 거예요. 그렇다고 당장 결행할 순 없었습니다. 카메룬에 있던 오빠가 아팠는데 제가 돈을 벌어 병원비와 약값을 부쳐야 했어요.”

-왜 판소리에 매료됐습니까.

“처음 경험한 소리였고 사실 무슨 뜻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놀라울 만큼 즐겁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춘향가라면 창자(唱者)가 춘향과 몽룡 등을 들락날락하잖아요. 인물과 감정을 목소리로 다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멋졌어요. 남녀노소와 희로애락, 착한 사람과 나쁜 놈 등 경우의 수가 엄청나잖아요.”

-인생이 걸린 결정 앞에선 망설이고 의심하기 마련인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꿈이 뭔지,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뭔지 묻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까지 저는 답도 방향도 없이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랑가를 배우고 나서는 길을 걷다가도 흥얼흥얼 연습할 만큼 판소리가 재밌고 행복했어요. ‘내가 찾던 그 무언가가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직감이 온 거예요. 그렇다면 꿈을 향해 가야죠!”

-입양돼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니던 10대 시절은 어땠나요.

“특별한 꿈은 없었어요. 막연하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돈 많이 벌어 큰 집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판소리 공부하러 한국 간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특히 친엄마가 말렸어요. 제가 막내딸이에요. ‘1년만 배우고 오겠다’ 둘러대고 또 ‘선생님이 계시니 걱정 마세요’ 설득했습니다. 저도 한국은 낯선 곳이라 두렵고 고민이 좀 됐지요. 하지만 판소리를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어요.”

-손에 쥔 그 부채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판소리를 할 때 제가 의지하는 물건이에요. 소리며 감정을 극대화해 전달하는 확성기와 같아요. 함께 춤을 추기도 하고 발림(손짓·몸짓을 이용하는 표현)을 할 때도 꼭 필요해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나요.

“네. 엄마하고 매일 노래를 했어요. 방학에 할머니 집으로 가서 고된 땅콩 수확을 도울 땐 카메룬 전통민요를 불렀어요. 그러고 보니 카메룬 전통민요나 판소리나 원망과 슬픔 같은 한(恨)이 배어 있네요. 저도 겁나는 일은 뒤로 물러서는 편이에요. 그런데 판소리는 꼭 한국에서 배우고 싶었습니다. 인생을 통틀어 첫 도전이었어요.”

-삼성전자와 코카콜라에서 근무했다고 들었습니다.

“대학 전공은 경제학이고 직장에선 경영 코스트를 관리하는 일을 했어요. (대기업을 포기하고 판소리 유학을 온 게 경영의 관점에서 잘한 결정이었는지 묻자) 저는 판소리를 공부할 때 비용 대비 효과를 생각하지 않아요. 금전적인 부분만 따지면 판소리는 당연히 코스트 관리가 안 됩니다. 하지만 행복을 돈으로 계산하는 건 무의미해요. 판소리 유학은 제 삶에서 매우 가치 있는 결정이었어요.”

2019년 카메룬 공연 후 가족, 친구 등과 함께 찍은 사진. 로르 마포와 친어머니(안경 쓴 분)는 가운데 나란히 서 있다. /로르 마포 제공

◇한국과 한국인을 겪어보니

마포는 2019년 전국판소리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다문화 부문)을 받았다. 지난달엔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이사장 최정화)이 주최한 ’2020 문화소통포럼'에서 온라인으로 판소리 공연을 했다. 그녀는 “코로나 이후 일이 거의 다 취소됐다”며 “온라인 판소리는 관객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이라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요즘 경제적으로 쪼들리지요.

“몇 달째 월세를 못 냈어요. 언니(집주인)가 제 형편을 잘 알고 ‘나중에 갚아도 된다’고 배려해주셔서 공부에 전념하며 버티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형편이 괜찮다고 생각해요. 저희 동네 가게들, 문 닫은 곳이 많아서 안타까워요.”

-취미로 할 수도 있는데 직장까지 그만두고 온 걸 후회하진 않는지.

“후회 없어요. 진짜예요. 가끔 돈 문제로 고민하지만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잖아요. 나중에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곤경에 빠질 때마다 고맙게도 도와주는 분들이 있었어요. 저도 언젠가 남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판소리를 배웁니다.”

-밖에서 상상한 한국과 실제 살아본 한국, 어떻게 달랐나요.

“드라마나 영화로 본 한국과 크게 다르진 않았어요. 그런데 한국 사람은 판소리에 관심이 많고 추임새도 할 줄 알겠거니 했는데 아니더라고요(웃음). 공연할 때마다 제가 ‘얼씨구!’ ‘잘한다!’ 하면서 가르쳐 드립니다.”

-적응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라면.

“처음엔 버스 타기가 겁났어요. 정류장 이름을 까먹었는데 파리바게뜨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곤 ‘난 정말 똑똑하구나’ 우쭐했지요. 그 빵집이 보여서 재빨리 내렸는데 엉뚱한 곳이었습니다. 서울엔 파리바게뜨가 많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요. 하하하. (잠깐 생각하다) 한국 사람들은 회사원이나 학생이나 매일 10시간 넘게 열심히 하는데 가족끼리도 대화가 없고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모습이 좀 슬퍼요. 왜 이렇게 사나 이해하기 힘들어요. 카메룬은 가난한 나라지만 부모님께 고민을 다 털어놓거든요. 한국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론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이곳 생활이 외롭진 않나요.

“프랑스에서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한국에 있어요. 외로울 땐 판소리를 더 크게 연습해요. 그럼 기분이 좋아져요. 제가 또 뼈해장국을 좋아합니다. 한국에서 찾은 저의 솔 푸드(soul food)랄까요. 술은 못 마시고요. 아, 한국에서 지내면서 뭐가 가장 힘든지 이제 생각났어요. 양반다리요! 하하하. 다들 앉아서 판소리 연습하는데 저만 전용 의자가 있습니다. 뒤풀이하러 식당에 가면 좌식일 경우가 많아요. 방석을 10장 깔고 앉을 수도 없고 거참 괴로워요. 꼼지락거리다 에라 모르겠다, 좌탁 밑으로 다리를 쭉 뻗어요(웃음).”

-우리말 참 잘하네요.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저한테는 공부가 돼요. 처음엔 ‘오빠’와 ‘아빠’도 헷갈렸는데 한국 들어오자마자 연세대 어학당에 다녔어요. 지금 한국어 6급이에요(최고 단계는 8급이다). 그래도 판소리는 말이 너무 어려워요. ‘앞태를 보자 뒤태를 보자’도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프랑스어로 먼저 번역해 뜻을 새기면서 외웠는데 한자 공부도 필요해서 얼마 전부터 시작했습니다.”

로르 마포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와 춘향가 중 사랑가를 이렇게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춘향가에 이몽룡이 춘향이에게 나타나 ‘춘향아, 내가 왔으니 정신 차려라’ 하는 대사가 있잖아요. 안숙선 명창은 어릴 적 그걸 ‘춘향아, 내가 왔으니 점심 차려라’로 알고 흉내 내곤 하셨대요.

“위로가 됩니다(웃음). 안숙선 선생님과 지리산에서 산공부를 함께한 적이 있어요. 평소에는 개미 소리처럼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아낀 에너지를 판소리에 다 쓰시더라고요. 저는 고통스러운 개인사를 잊으려고만 했는데 정말 좋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면 그 고난을 보편적인 소리로 담아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오늘도 산공부를 하다 왔다고 했는데 폭포 아래에서 득음하는 연습이었나요.

“요즘엔 그렇게 안 해요. 안전하고 큰 소리로 불러도 되는 산속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곤 판소리에 매진합니다. 각혈하는 사람은 못 봤어요. 민혜성 선생님도 피 안 토했대요.”

-어느 방송에 출연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엄마를 닮아 발라드를 좋아해요. ‘또 하루 멀어져 간다~’로 시작하는 그 노래를 프랑스에서 서른 살쯤 처음 들었는데 목소리에 감동을 받았어요. 대구 ‘김광석 거리’도 가봤습니다. 양희은이나 이문세 노래를 부를 때도 마음이 잔잔해져요.”

배우 소지섭을 좋아한다는 로르 마포는 한국 이름을 '소율'이라 지었다. 꿈 없이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그녀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막막해도 일단 뛰어들어야 한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저는 한국까지 와서 4년째 판소리를 공부하는데 그것보다는 쉽지 않겠느냐"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실패 두려워 말고 도전을

스승인 민혜성 명창은 “장담하는데 마포는 한국에서 판소리 배우는 외국인 중 으뜸”이라며 “일단 악기(울림통)가 좋고 음악을 표현하는 감각도 훌륭하다”고 말했다.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의미 전달과 발음은 좀 더 수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난 적도 있나요.

“다 부족하지만 발림도 그렇고 슬픈 감정을 노래하는 것도 아직 서툴러요. 하지만 선생님이 화를 내신 적은 없어요. 그런 분이었다면 제자가 되기 어려웠을 거예요.”

-소리꾼의 길은 험난합니다.

“선생님은 ‘판소리를 10년 하지 않았다면 아직 판소리를 시작한 게 아니다’라고 하셨어요. 마라톤으로 치면 저는 고작 10분의 1쯤 달린 셈이에요. 속도보다는 하나라도 정확히 밟고 가려고 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건 즐거움과 성취감이 있기 때문일 텐데요.

“권선징악 아시죠? 흥보처럼 착한 일을 하면 나중에 복으로 돌아온다는 교훈을 제가 좋아해요. 잘 안 되던 시김새(멋과 맛을 살리기 위해 원음을 흔들고 꺾고 굴리는 기술)가 마침내 됐을 때 선생님이 ‘그렇지!’ 하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요. 칭찬을 들으면 자신감이 붙고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지고.”

-낙관적이군요.

“비관적인 사람이었는데 여기 와서 바뀌었어요. 파리에 살 땐 집에서 생각만 많이 하고 행동으로 옮기질 못했죠. 지금은 일이 잘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판소리 안에 있는 다양한 인물, 감정, 이야기를 만나면서 달라진 것 같아요.”

-우리말 중에 좋아하는 단어가 있나요.

“음, ‘기쁨’요. 판소리가 저한테 기쁨을 줍니다. 재미있고 행복해요. (반대로 불편한 것을 묻자) 높임말이 좀 어려워요. 한국 사람들은 초면에 나이부터 물어요. 높임말을 쓸지 말지 확인하려는 거죠. 제가 나이가 많은 축이라 ‘로르 언니’라고들 불러요. 그럼 사이가 가까워진 느낌이 들긴 해요. 말이 잘못 나오는 바람에 선생님께 ‘언니’라고 한 적도 있어요.”

-꿈 없이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조언해준다면.

“프랑스어에 이런 속담이 있어요. ‘당신은 그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증명한 적이 없다.’ 저처럼 막막해도 한번 해보는 거예요. 물론 실패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길이 열릴 수도 있어요.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일단 뛰어드세요. 해봐야 아는 거잖아요.”

-궁극적인 목표는.

“우선은 흥보가를 완창(150분 걸린다)해야죠. 흥보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는 것과 같아요.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훌륭한 소리꾼이 될 거예요.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다양한 나라에서 공연하고 싶습니다. 안숙선 선생님은 농담으로 ‘로르야, 나중에 돈 벌러 갈 때 나 좀 데리고 가’ 하셨어요. 하하하.”

이력서(履歷書)는 ‘신발을 끌고 온 역사의 기록’이다. 카메룬에서 프랑스를 찍고 한국까지, 이렇게 길고 독특한 이력을 가진 소리꾼이 또 있을까. 지난 21일 밤에 통화를 하다가 귀동냥을 청했다. 그녀는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가장 좋아한다는 흥보가 중 ‘첫 박 타는 대목’을 들려줬다.

“흥보가 들어오며 ‘여보 마누라, 그리 울지만 말고 저 지붕 위에 있는 박을 따다가 박 속은 끓여 먹고 바가지는 부잣집에 팔아다가 어린 자식들을 살리면 될 것 아니요.’ 흥보가 박 세 통을 따다 놓고 우선 먼저 한 통을 타는디….”

추임새를 넣었다. 얼씨구, 좋~다!

영상미디어 양수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