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이는 인생 사진 명소.’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경남 거제시 ‘매미성(城)’에 대한 설명이다. 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2003년 태풍 매미로 경작지를 잃은 시민 백순삼씨가 자연재해에서 작물을 지키기 위해 장목면 복항길에 오랜 시간 홀로 쌓아올린 벽. 바닷가 근처에 네모반듯한 돌을 쌓고 시멘트로 메우길 반복한 것이 이제는 유럽의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성이 됐다.’ 거제시에 따르면 지난해 약 40만명이 이 성을 찾았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에 있는 매미성 전경.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추석 연휴가 끝난 지난 5일 오전, 백순삼(66)씨를 만나러 매미성으로 향했다. 부산 하단역에서 2000번 버스를 타고 40여분을 달렸다. 허허벌판인 해안 도로 한복판에 버스가 섰다. ‘매미성 가는 길’ 표지판을 따라 해안 도로 안쪽으로 들어가니 다른 세상이다. 커피부터 핫도그·빵·주스 등을 파는 크고 작은 가게 10여곳이 길을 따라 쭉 이어졌다. 길이 끝나는 순간, 주먹만 하고 반질반질한 검은 몽돌이 빼곡히 놓인 해변이 나타났다. 그 해변 위에 화강암 2만여개로 지어진 매미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 건너편에는 부산과 거제를 연결하는 8.2㎞의 거가대교가 있다. 평일 이른 오전인데도 관광객 수십명이 저마다 다양한 자세로 사진 찍느라 분주했다.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

“아, 오셨습니꺼!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예.”

3층 높이 매미성 난간에서 백씨의 목소리가 먼저 날아들었다. 돌 사이로 백씨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가 사라졌다. 허름한 셔츠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장화, 챙 넓은 모자에 양팔 토시 차림. 그는 인터뷰 직전까지도 매미성 난간을 시멘트로 메우고 있었다.

지난 5일 매미성에는 평일 오전에도 수십 명이 찾아왔다. 백씨는 "사람들이 매미성을 찾는 건 누군가 이걸 17년간 했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기 때문"이라며 "사람들이 꿈을 꾸고 간다는 게 좋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여전히 성을 건축 중이신가 봅니다.

“제가 처음 생각한 설계의 70%도 아직 못 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다시 해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지금 바닥을 시멘트로 깔아놨는데, 사람들이 많이 밟으니 바닥이 다 일어나더라고요. 위에 돌 까는 작업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요.”

–이른 오전부터 작업을 하시네요.

“직장 생활 할 때는 오전 4시 반, 퇴직 후에는 오전 4시에 항상 일어납니다. 오전 5시 24분에 부산 지하철 3호선 배산역에서 첫차를 타고, 다시 1호선으로 바꿔 탄 뒤 하단역에 내려 2000번 버스를 탑니다. 집에서 매미성까지 2시간 정도 걸립니다. 남들보다 일찍, 남보다 먼저 내 할 일 하는 게 좋습니다.”

경북 영덕 출신인 백씨는 1981년 대우조선해양에 입사, 2014년 정년 퇴임했다. 선박 설계 일을 주로 맡았다. 직장 다닐 때도 항상 사무실 문을 가장 먼저 여는 직원이었다. 퇴직 후에는 아내의 지병 때문에 인근 대도시인 부산에 살고 있다.

–매미성은 어떻게 짓게 되신 건가요.

“은퇴 후에 가족들과 바다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작은 집 짓고 사는 게 꿈이었어요. 이를 위해 지금 매미성 부지(약 1800㎡·540여평)를 샀습니다. 당시에는 인적이 드물고 거가대교도 생기기 전이라 가격이 저렴했거든요. 산 땅을 놀릴 수는 없으니 고구마 심고, 콩 심고 깨 심고 하면서 주말농장처럼 가꿨습니다.”

–그러다 태풍 ‘매미’가 온 거군요.

“저희는 ‘땅이 없어졌다’고 표현합니다. 매미가 왔을 때가 추석 연휴였는데, 회사에 와보니 크레인이 다 넘어지고 완전히 엉망이에요. 여기(매미성 부지)는 도로가 무너져서 오려고 해도 올 수가 없었어요. 일주일쯤 되니 임시로 길을 복구했다고 해서 버스를 타고 와봤어요. 그런데 뭐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작물은 물론이고 땅에 있는 흙까지 다 쓸고 가서 바위가 다 드러났어요. 바위에 흙 붙은 자리만 겨우 남아있더군요.”

2003년 9월 발생한 태풍 매미는 전국적으로 132명의 인명 피해와 4조7800억원의 재산 피해를 냈다. 특히 당시 거제는 만조 시간대와 겹친 데다 바람이 초속 55m로 강하게 불면서, 사상자 39명이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피해를 본 매미성 부지의 모습. /백순삼씨 제공

–보상은 있었나요?

“당시 거제도 전역이 워낙 피해가 컸어요. 시에서도 몇 번 조사를 나왔지만, 큰 규모의 농사가 아니다 보니 저까지는 보상받기가 어려웠어요. 스스로 복구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태풍을 막을 제방을 짓기 시작한 건가요.

“두 번은 당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들어와서 건축해준다는 분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관광객이 많이 찾으니 아스팔트도 깔렸고 길도 좀 넓어졌지만, 예전에는 마을 주민들만 겨우 다니는 작은 흙길밖에 없었습니다."

백씨의 작업 과정은 이렇다. 경남 거창에서 화강암의 일종인 견치석을 산 뒤, 이를 대형 트럭에 실어 매미성 인근 큰길까지 온다. 이 돌을 다시 작은 차에 실어 매미성 바로 앞까지 여러 번에 나눠 옮긴다. 이 돌을 들어 성을 쌓는 건 오롯이 백씨의 몫. 기계의 도움은 전혀 받지 않는다. 백씨는 “지형이 험하고 바위가 많아서 포클레인이 들어온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고 했다. 백씨가 직접 돌을 쌓고, 시멘트로 사이를 메운다. 더 높이 작업해야 할 때는 돌로 계단을 만드는 것부터 한다. 스스로 만든 계단을 밟고 올라가 다시 돌을 더 높이 쌓는다. 마치 피라미드를 만들던 이집트 사람들처럼. 설계도는 따로 없지만, 머릿속에 그려 놓은 조감도는 있다고 했다.

–돌 하나 무게가 얼마인가요?

“보통 30~60㎏입니다. 같은 무게라고 해도 헬스장 아령과 달리 돌은 들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말 시키지 말라’는 팻말을 세웠어요(웃음). 이게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다칠 수 있거든요.”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손가락 좀 찍힌 거야 있지만, 아직 이 일 때문에 크게 다친 적은 없어요.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돼 근력 운동을 시작했거든요. 그렇게 안 하면 이 일 못 하겠더군요.

–제방은 어떻게 성이 됐습니까?

“이곳이 기본적으로 경치가 좋잖아요. 인위적으로 제방을 쌓더라도 주변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위에 남아 있는 흙의 곡선을 그대로 살려보자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점차 성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가우디(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가 지은 건물 가 봤느냐’고도 물어보는데···. 가보긴 뭘 가보나요(웃음). 물론 텔레비전에서는 봤죠. 가우디가 곡선을 잘 쓰잖아요.”

–그래도 손재주가 좋으신 편인가 봅니다.

“어릴 때도 냇가 가면 수석을 좋아하긴 했지만(웃음), 건축을 하는 건 처음이지요. 시멘트 섞는 건 인터넷에서도 찾아보고, 토목공사하는 사람들한테도 많이 물어봤습니다.”

인터뷰를 한 지난 5일에도 백순삼씨는 매미성을 손보느라 분주했다. 그는 허름한 셔츠에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지게로 부지런히 시멘트를 날랐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냐'는 질문에 백씨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없었다"며 "머릿속에 그려놓은 일을 실제 이뤘을 때의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매미성 로열티 안 받을 것

백씨가 17년간 쌓은 돌은 2만여장이다. 회사 다닐 때는 매 주말을 이곳에서 보냈고, 은퇴 후에는 매일 이곳에서 보낸다. 눈이 오고, 비가 내리는 날도 거르지 않았다.

–가족들 불만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집사람이 희생을 당했죠(웃음). 이게 집사람 이해 없으면 못 하거든요. 긴 세월 매달 재료비다 뭐다 하면서 월급에서 빼다 쓰는 데다, 여기 와서 또 이러고 있으니 미안하죠. 나야 뭐 직장 다니면서 해외 출장도 가고 했지만, 집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누가 물으면 ‘매미성은 내가 쌓았지만, 만든 건 집사람이다’라고 얘기합니다.”

–비용은 얼마나 들었나요?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습니다. 이 가치를 돈으로 따질 수도 없고요. 견치석 하나를 사 오는 데 5000원 정도가 들어요. 여기에 흙이며 모래, 시멘트 하며···. 인건비를 제외하고도 수억원이라는 정도만 밝히겠습니다.”

–정말 사모님이 바가지 안 긁으셨나요.

“이렇게 긴 세월 바가지 긁었으면 일할 수 있었겠습니까(웃음). 일시에 그 돈 썼다면 반대했을 수 있겠지만, 월급 타서 긴 세월 그렇게 했으니 사실은 저도 체감 못 했죠. 어찌 보면 노후 자금이랑 바꾼 셈이지요. 자식들은 ‘우리가 노후 대책’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매미성은 입장료가 없다. 백씨가 매미성 인근에 운영하는 카페나 가게도 없다. 매미성으로 인한 경제적인 이익은 전혀 없는 셈이다. 이날 인터뷰도 매미성 인근 공방에 자리를 빌려서 진행했다.

–매미성 주변에 가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17년간 고생했는데, 이익은 다른 사람들만 보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요.

“여기가 원래 바닷가 마을이라 혼자 되신 여자 어르신이 많아요. 제가 ‘이모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족같이 지내는 분들입니다. 지금 마을에서 가게 하는 분들은 대부분 그 2세들이에요. 매미성에 관광객이 많이 오니 고향에 돌아온 거죠. 이모님들이 좋아하십니다. 이 일대를 명품 마을로 만들어서 다 같이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유명 관광지는 결국엔 외부 자본이 잠식해 들어옵니다.

“이미 큰 길가에 있는 대형 커피숍들은 외지인들이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동네 안에도 외부 자본이 들어올 수 있겠죠. 그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주민들한테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오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걸 개발하자’고. 매미성이란 브랜드는 제가 얼마든지 공짜로 드리겠다고요. 그걸 개발해서 옛날 원주민들이 그대로 잘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끼리 아옹다옹하지 말고, 동네를 잘 가꿔서 명품 마을로 만들자고 얘기해요.”

–가게를 직접 내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최근에는 둘째 아들과 상의해서 작은 카페를 열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직장 다닐 때는 수입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은퇴하고 나니 예전처럼 매미성을 짓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요. 수입을 얻으면서도, 동네 사람들과 상생하고, 매미성을 유지할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입장료를 받는 게 가장 현실적이고, 쉬운 방법 아닌가요.

“입장료는 받고 싶지 않아요. 일단 입장료를 받는다는 게 뭔가 삭막하잖아요. 입장료 받는 사유지들도 있긴 하지만, 애초에 저는 그런 목적으로 만든 게 아니기도 하고요.”

거제시 관광진흥과는 “개인의 노력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며 “주차장이나 인근 도로 개선을 위한 작업을 계속 하고 있으며, 매미성 일대 관광 활성화를 위한 용역도 진행 중이다”고 했다.

매미성 성주 백순삼씨는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지하철 첫차를 타고 이 곳에 나온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나의 진정한 취미

–태풍을 막겠다는 목적은 달성한 건가요?

“달성했다고 봐요. 아직 매미만 한 태풍이 안 오기는 했지만, 지을 때 매미보다 더 센 태풍이 올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며 지었습니다. 한번은 토목과 학생들이 학교 과제를 한다면서 성을 보고 갔어요. 이후에 담당 교수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성을 둘러보더니 잘 지었다고 하시더군요. 뿌듯했죠. 제가 배 만드는 일을 한 사람이잖아요. 물에 대한 부분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물을 막을 수 있을지, 물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을지에 대해서요.”

공방 주인 김창섭(54)씨가 거들었다. “인근에 태풍 막겠다며 방파제 쌓은 곳이 있는데, 거긴 파도가 흙을 다 쓸어가서 한쪽이 무너져 내렸어요. 매미성은 끄떡없잖아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사실 여름에 정말 더울 때 빼고는 크게 힘들다는 생각도 안 했어요. 아침에 첫차를 타면 머릿속으로 오늘 할 일에 대해 그려봐요. 그게 그렇게 즐거울 수 없습니다. 상상 속의 일을 실제 했을 때의 성취감은 그 사람밖에 못 느껴요. 다른 것과 바꿀 수가 없습니다. 제 진정한 취미인 셈입니다."

–그림 같은 집을 짓겠다는 꿈과는 멀어진 것 아닌가요.

“이제 개인이 사는 집은 못 짓겠죠. 사람들이 와서 벌컥벌컥 문 열어볼 것 아닙니까(웃음). 그래도 40만명이 찾아주는 관광지가 돼 줘서 고맙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영덕이지만, 지금껏 제일 오래 산 곳은 거제거든요. 정부가 수십억 예산 투자해도 사람들 잘 안 오는 지방 관광지도 많잖아요. 지난 몇 년간 거제도 경기가 어려웠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쁩니다.”

–17년간 꾸준히 해온 비결이 있나요.

“우공이산(愚公移山·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이란 말이 있듯, 어찌 보면 제가 좀 무지한 편이랄까요. 예전엔 서울 같은 데서 까만 차도 많이 내려왔어요. 까만 차에서 까만 양복 입은 사람이 내려서 ‘여기 주인 안 계시냐’고 물어요. 나는 암만 봐도 행색이 인부인 거죠(웃음). 제가 주인이라고 하면 깜짝 놀란 다음, 조심스럽게 ‘이거 혹시 팔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요. 우리 회장님이 이런 데를 엄청 좋아하신다고요. 이런 제안을 열 번도 넘게 받았어요. 제가 현실적인 판단 하는 사람이면 돈 많이 준다는데 팔았겠죠. 그런데 이건 이제 더는 내 것이 아니에요.”

–누구 건가요?

“오는 사람들 거라고 제가 그래요. 물론 땅은 제 거죠. 그러나 성 자체는 오는 사람들 겁니다. 그 사람들이 보고 상상하고 즐기고, 각자에게 맞게 꿈을 꾸는 거에요. 저는 사람들이 뭔가 꿈을 꾸고 간다는 게 좋습니다.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매미성을 찾는 건 성이 아름다워서기도 하지만, 누군가 이걸 17년간 했다는 것에 용기를 얻기 때문일 겁니다.”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성실하게 살자(웃음)!”

49세에 첫 돌을 쌓기 시작한 그는 좌우명대로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까지 돌을 더하고 있다. 그 사이 그의 돌들은 성이 되었다.

재해지역에서 관광지가 된 매미성.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