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인천 왕산마리나 계류장 풍경. 요트들은 단단히 고정된 파일(땅속 깊이 박힌 철기둥)에 고박돼 있다. /박돈규 기자

“코로나로 답답한 나날들이었는데 요트에서 마스크를 벗는 것만으로 가슴이 뻥 뚫렸어요.”

구란(35·경기 화성)씨는 지난달 24일 산후조리원 동기들과 ‘요트 위의 저녁’을 만끽했다. 세 가족(어른 넷, 아이 셋)이 화성 전곡항에서 요트를 빌려 바다로 나갔다. 해가 수평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1시간 동안 요트를 타고 귀항한 다음엔 선상에서 일몰을 감상하며 바비큐 파티를 했다. 세일링부터 식사까지 3시간에 비용은 가족당 10만원. “가성비 좋은 고급 휴양지에 다녀온 기분”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지난 10일 인천 영종도 왕산마리나. 복합 해양 레저 공간을 마리나(marina)라 부른다. 레저용 선박이 즐비하게 정박한 해상 계류장은 풍경만으로도 이국적이었다. 흰 돛을 펼친 요트가 출항하고 있었다. 트레일러에 보트를 싣고 온 선주(船主)와 일행뿐만 아니라 주말 여행객도 많았다. 34피트(약 10m) 세일 요트를 즐기는 단품은 40분에 1인당 3만원. 파워 요트 전세, 낚시 체험, 일몰 요팅까지 메뉴가 다채로웠다. “이곳이 ‘노을 맛집’이에요”라고 한 방문객이 귀띔했다.

지난 3일 요트 구입과 여행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한 이일병 연세대 명예교수는 문제적 인간이다. 이 은퇴자의 도전은 평소라면 응원받았을 행동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해외여행 자제를 권고한 외교부 장관의 남편이라서 논란이 일었다. 방역과 자유, 공동체와 개인, 사회적 책임과 욜로(YOLO·현재를 즐기는 삶의 방식) 등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아무튼, 주말’은 물건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국 사회에서 요트란 무엇인가.

지난 10일 인천 영종도 왕산마리나. /박돈규 기자

◇한국에 상륙한 지 50년

요트(yacht)는 ‘사냥’을 뜻하는 네덜란드어 야흐트(jacht)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돛으로 움직이는 작고 날렵한 배로, 해적을 추격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날 요트는 돛이 있는 세일 요트와 돛이 없는 파워 요트로 크게 나뉜다.

국내 요트 역사는 ‘1971년 한강’에서 대학생 동호인들에 의해 시작됐다. 바야흐로 50년.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라지만 ‘수퍼 리치의 사치품’이라는 편견은 질기다. 다만 그 고정관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다면 인스타그램에서 ‘요트’를 검색해 볼 일이다. 미끈한 요트를 타는 청년들로 그득하다. 한국에서 요트는 2000년대 들어 동호회가 늘어나며 점차 대중화되는 추세다. 2016년 마리나 선박 대여업을 허가한 뒤론 탑승 문턱이 낮아졌다. TV에서는 태평양 항해에 도전한 남자들을 관찰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흘러나온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해마다 1000여명이 요트 조종 면허를 받는다. 요트, 모터 보트, 수상 오토바이 등 국내에 등록된 레저 선박은 2019년까지 2만3639척. 배를 대는 선석(船席)은 2355석으로 부족하다. 육상에 보관하는 경우도 많다. 서울 여의도를 비롯해 부산·여수·제주 등 전국 34곳에서 마리나가 운영 중이다.

대한요트협회는 대한조정협회 안에 있다가 1979년 독립했다. 김철진 전 대한요트협회 이사는 “선수 육성에 힘을 쏟다 보니 동호인 규모까지는 가늠이 안 된다”며 “요트를 한번 타봤다고 요트인이라 할 순 없고 기준을 정하기도 모호하다”고 했다. 지난해까지 요트 면허 취득자는 1만4515명. 업계는 국내 요트 규모를 4000~5000척으로 추산한다. 국민 1만여 명당 1척 꼴이다. 수십 혹은 수백명당 1척인 유럽에 비하면 아직도 한국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부산 수영만 요트계류장.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남자가 피해야 할 세 가지?

10여년 전 동호회에서 요트를 배웠다는 홍모(49)씨는 선주다. 가장 흔한 34피트 길이 요트를 중고로 3000만원에 샀다. 그는 “같은 크기로 비교하면 파워 요트가 세일 요트보다 비싼 편”이라며 “세일 요트는 옛날에 상선과 여객선으로 쓰다가 업무 현장에서는 퇴출되고 이젠 순수하게 노는 목적으로만 쓰이니 더 낭만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호사스러운 취미 아닌지 묻자 홍씨는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한다’고 답했다.

동호회나 요트학교에서 배우는 비용은 거의 안 든다. 중고 요트는 차 한 대 값인데 유지비가 문제다. 그냥 세워 놓아도 돈이 나간다. 34피트 요트 기준으로 해상 계류비는 월 60만원, 연간 약 700만원이다. 1년에 한 번 뭍으로 들어 올려 청소·수리하는 비용까지 합치면 1000만원 이상이 든다. 하지만 홍씨는 “자동차 하나를 20년 타는 사람은 드물지만 요트는 30년이 지나도 거뜬하고 감가상각도 덜하다”며 “장기적으로 보면 골프를 치는 것보다 요트 취미가 훨씬 싸다”고 했다.

요트 취득세와 재산세를 기준으로 하면 3억원이 넘어야 사치품이다. 조만석(67) 한국외양요트협회 회장은 1984년 국내에서 제작한 세일 요트로 아리랑 레이스(부산~후쿠오카)에 참가해 최초로 현해탄을 건넌 한국인이다. 1979년 요트에 입문했다는 그는 선수들이 타는 1~2인승 딩기(dinghy)를 타다 1980년대 초 부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당시 변호사)을 만났다. 오륙도요트클럽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조 회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스개로 ‘남자의 3대 로망은 별장, 요트, 세컨드(첩)’라던 시절이 있었어요. 거꾸로 말하면 남자가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인 겁니다. 요트도 소유하는 순간 고생길이 열려요. 정리하는 순간 홀가분해지고요. 돈 좀 있다고 폼 잡으려고 요트를 사면 애물단지가 됩니다. 함부로 덤비다 속된 말로 생똥싸요.”

부산 수영만 요트계류장.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요트 대여업은 ‘코로나 특수’ 누려

김은진(43)씨는 여성 요트팀 ‘레이디즈’에서 주장을 맡고 있다. 그녀는 “요트를 탄다고 하면 주변에서 ‘오~’라는 탄성부터 나온다. 아직도 ‘요트=럭셔리’로 인식하는 것”이라며 “선주가 아니어도 요트를 탈 방법은 많다”고 말했다. “크루들은 배 없이도 요트를 즐겨요. 회비를 내서 운영하기도 합니다. 네댓명이 배를 공유하기도 하고요. 사이클 타는 친구를 보니 장비값만 1인당 수천만원 들던데, 요트는 그렇게 비싼 취미는 아닙니다.”

김한울(46·대한요트협회 이사)씨는 지난 9일 전남 여수 바다 위에서 전화를 받았다. 2015~2016년 ‘클리퍼 세계일주 요트대회’에 한국인 최초로 출전한 그는 “손님들을 모시고 금오도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코로나 시대에도 1박 2일, 2박 3일 등 며칠 동안 요트를 통째로 전세 내 즐기는 수요는 늘고 있다. 김씨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세일링을 하는 소규모 모임은 더 활성화된 것 같다”고 했다. 한동안 비행기 타고 여행하는 게 어려워지면서 요트가 특수를 누린다는 분석도 있다.

전곡항에서 승객을 태우는 영업을 하는 박광섭(49)씨에게 요트는 생계다. 해수부에 따르면 2016~2019년 162명이 ‘마리나 선박 대여업’ 허가를 받았다. 극성수기는 9~10월이다. 그는 “해마다 손님이 늘고 있고 요즘 주말에는 미어터진다”며 “겨울 시즌만 빼면 벌이도 쏠쏠하다”고 말했다.

“은퇴한 사람이 부업으로 삼기 좋아요. ‘도시 어부’ 이후 낚시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었어요. 요트 하면 사치를 떠올리는데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저희는 4000만~5000만원짜리 배로 영업을 합니다. 어지간한 카페 인테리어 비용밖에 안 들어요.”

유튜브 영상 캡처

◇요트의 매력은

요트를 ‘남자의 로망’이라고 말하던 시대는 갔다. 요트 동호인 남녀 비율은 과거 10대1 이상에서 이젠 5대1쯤으로 좁혀졌다. 요트 면허를 따는 사람은 평균 50대 후반, 은퇴를 앞둔 이들이다. 그렇다고 전부 요트를 사거나 꾸준히 타는 것은 아니다. ‘장롱면허’도 많다. 김은진씨는 “그런데도 왜 취득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언젠가는 하고 싶다’고들 답한다”고 했다.

요트의 매력은 뭘까. 정채호 한국범선협회 회장은 “바다를 정복한다는 느낌으로 타면 세일링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며 “높은 파도와 비바람 등 역경에 맞서 함께 싸울 때는 동료애도 느낀다”고 말했다. 조만석 회장은 "변화무쌍한 자연 앞에 순응하는 법을 요트가 가르쳐 준다. 바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동호인들은 ‘엔진을 끄고 돛만으로 항해할 때 바람이나 조류 같은 자연과 동화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이 좋다’고 입을 모았다. 한 요트인은 “한국인은 아파트에 몰려 살고 제약이나 경쟁이 있는 환경에 익숙한데, 바다에서 요트를 타면 남 눈치 보지 않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했다. 바라면 언제든 요트를 탈 수 있다. 다만 날씨와 파도 등 자연이 허락해야 한다.

김승진씨는 50이 넘은 나이에 장장 209일간 4만1900㎞에 이르는 ‘단독 무기항 요트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는 동안 매순간이 고비였다”며 이렇게 썼다. “가장 위험했던 것은 내 안의 절망감이었다. 항해에서 포기는 곧 죽음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 이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목표다. 우리는 모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처음 가는 생의 모험가다.”

전국 마리나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