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에서 바라본 용산 풍경. /김두규 제공

미군 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용산 개발에 관심이 쏠린다. 산(山)은 용(龍)이요, 용(龍)은 임금이다. 따라서 임금은 바로 산이다. 그러므로 그곳은 제왕의 땅[帝王之地]이다. 용산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得龍山 得天下].

용산이 수난의 땅이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피해자 관점이다. 임진왜란, 청일전쟁, 해방 이후 외국군이 주둔한 것도 땅의 이점[地利]를 알았기 때문이다. 용산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900여 년 전인 1101년(숙종 6년). 당시 고려는 풍수설에 따라 도읍지를 옮기려 하였다. 후보지로 용산이 주목받지만 북악(청와대·경복궁)에 밀렸다. 당시 도읍지 선정에 관여했던 최사추는 “산과 물을 꼼꼼히 살폈다[審視山水]”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북악산에 우뚝 솟은 봉우리만 보았지, 용산에 인접한 한강을 간과하였다. 실수였다.

역사학자 윤명철(동국대 명예교수)은 말한다.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한양은 방어와 경관에 적지이다. 그러나 산업과 상업 그리고 무역을 통해 대외적으로 진출하려면 부두를 가까이 두고 항구와 관련된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이점에서는 용산이 적지이다.” 폐쇄 국가의 도읍지로는 한양, 개방 국가의 도읍지로는 용산이 적절하다는 뜻이다.

실수는 한 번 더 있었다. 조선 건국 후 도읍지를 정할 즈음 태종의 측근 하륜은 북악보다는 무악(현재의 연세대 일대)을 제안했다. 마포를 통한 한강 조운의 이로움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륜의 주장은 채택받지 못하고 북악이 조선의 도읍지가 된다. 얼마 후인 1413년(태종 13년) 하륜은 “숭례문에서 용산까지 운하를 파서 배를 통행시키자”는 주장을 한다. 대다수 신하도 찬성하였다. 모래땅이어서 물이 새지 않을까 하는 임금의 염려에 대해, 토목·건축 전문가로 도성·궁궐·왕릉 조성을 주도한 박자청이 “토질에는 문제가 없으며, 인력 1만명으로 한 달이면 충분하다”는 의견을 낸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 운하가 개통되었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900년 전 최사추가 도읍지 후보로 살핀 용산의 풍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남산의 중심 산줄기[中出脈]는 하얏트호텔~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녹사평역~둔지산~미군 기지~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어진다. 풍수에서 산을 용이라 하였다. 용은 녹사평역에서 잠깐 엎드려 숨을 고른다. 용이 엎드린 곳은 고개(과협·過峽)가 된다. 과협은 길지를 만드는 필수 조건이다. 잠시 쉰 용은 이어 고개를 쳐들어 한강 쪽으로 머리를 들이민다[入首]. 미군 기지 내 둔지산은 바로 그 머리다. 큰 용이 물을 마시는 황룡음수(黃龍飮水) 형국이다. 용은 홀로 오지 않는다. 호위 용[방룡·傍龍]을 데리고 온다. 남산타워~해방촌~미군 기지~전쟁기념관으로 이어지는 방룡과 남산~매봉산~국회의장 공관~한남더힐로 이어지는 방룡이 그것이다. 풍수도를 그리면 다음과 같다<그림 참고>.

필자가 그린 용산 풍수도(風水圖). /김두규 제공

미군 기지 이전으로 이곳을 “공원화하겠다”는 이야기는 전부터 있었다. 이번 정부도 정세균 국무총리와 민간인을 공동 위원장으로 하는 용산공원 조성 추진위원회를 꾸렸다. 공원화에 대한 풍수 의견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둠[Let It Be]이 정답이다.

용의 부활에 시간이 필요하다. 기존 건물과 나무들을 유지·관리하되 아스팔트만 걷어내면 물길은 절로 살아난다. 오염된 땅도 시간이 흐르면서 정화된다. 제한된 산책로로만 이용한다. 100년 후 후손들은 노거수(老巨樹)들과 ‘역사 건물’들을 접할 것이다.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보다 더 훌륭한 서울의 ‘심장’이 된다. 지금 공원화 관련 전문가들이 할 일은 없다. 산은 용이요, 용은 제왕이라 하였다. 제왕의 땅을 100년 뒤 후손에게 넘겨줌이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