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현역으로 복귀한 축구선수 조원희, 포기하지 말자면서 외쳐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가야 돼!' 세리머니 포즈를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어! 가야 돼?” 광화문에서 지나가는 남자가 마스크 낀 조원희를 알아보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축구선수 조원희(37)가 넙죽 90도 인사한 뒤 두 주먹 불끈 쥐며 암호 같은 구호를 외쳤다. “가야 돼, 가야 돼! 와우, 와우!” 요즘 2대8 가르마만큼이나 유명해진 그의 세리머니다.

한물간 선수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요즘 조원희는 ‘도전의 아이콘’으로 제2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2018년 수원 삼성에서 은퇴한 뒤 지난 7월 2년 만에 현역 복귀했다. 복귀 팀은 수원 FC. 친정팀 수원 삼성과 연고지는 같지만 2부 리그인 ‘K리그 2’ 소속 팀이다. 한때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EPL)까지 진출한 스타가 기꺼이 2부를 택했다. 조원희는 “국내 프로 축구에서 은퇴한 선수가 현역 복귀하는 건 처음이라고 들었다”고 했다.

또 다른 도전은 유튜버. 지난 2월 유튜브 채널 ‘이거해조 원희형’을 열어 몸 사리지 않고 각종 미션을 치른다. 안정환·이영표·구자철 등 스타들과 일대일 대결을 펼쳐 구독자 17만명을 넘겼다. 조원희의 무한도전 축구 인생을 들었다.

◇기승전 도전, 내 인생은 무한도전

—왜 그라운드로 돌아왔나요.

“1년 8개월 정도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는데 잔디 냄새가 미치도록 그리웠습니다. 아직 축구가 고프구나 깨달았어요. 복귀를 꿈꾸며 몸을 만드는 중에 수원 FC로부터 선수 겸 코치 제안이 왔습니다. 주변에선 그간 쌓은 걸 무너뜨릴 수도 있다며 만류했지만 다시 뛰고 싶어 돌아왔습니다.”

—지난 8월 1일 안산 그리너스와의 경기로 복귀전을 치렀지요?

“615일 만에 밟는 그라운드였어요. 와….” 감탄사를 길게 뽑아 놓고 그가 말을 이었다. “그날 처음 볼 터치했을 때 느낌이 지금도 또렷해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선수로서 노력했는데 결과가 이것밖에 안 될까 움츠러든 적도 많았어요. 괜한 피해의식, 자격지심을 복귀와 맞교환한 기분입니다. 축구 하는 1분 1초가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이후 출전은 못 하고 있던데요.

“복귀 이틀 뒤 고속도로에서 뒤차가 박아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한 달간 재활했습니다. 축구인들이 은퇴하면 축구에 눈뜬다고들 해요. 저도 관두고 나니 그제야 경기 흐름이 읽히더라고요. 그렇게 축구에 눈떠 복귀했는데, 거참 몸이 안 따라 주네요. 하하.”

재활 후 복귀해 엔트리 18명에 꾸준히 들어가고 있지만 출전 기회는 못 잡고 있다. 대신 최고참으로 팀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한다. 후배의 승리 인터뷰 화면에 난입해 장난치고, 열다섯 살 어린 룸메이트와 숙소에서 피자 시켜 먹으며 실패담을 들려준다. “조원희 덕에 ‘K리그 2’를 처음 봤다”는 팬도 많아졌다.

수원 FC는 제주 유나이티드와 1부 리그 승격을 위해 치열한 선두 경쟁을 펼치고 있다. 조원희는 “겉은 허허 웃어도 벤치 앉아 있으니 속은 문드러진다”며 “땀에 젖은 유니폼 입은 채로 승리 기념 사진 찍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지난 7월 'k리그 2'에 소속 팀 수원 FC로 복귀한 조원희. 프리미어 리그까지 뛴 선수이지만 그라운드가 그리워 기꺼이 2부 리그 도전을 택했다. /사진제공=수원FC

복귀에 앞서 축구 팬들 사이 잠잠했던 조원희 이름 석 자가 꿈틀댄 건 지난 2월. 유튜브 채널을 열고 ‘이강인 크로스바 챌린지’를 시작했을 때였다. 이강인 선수가 몸을 풀며 크로스바를 연속 6번 맞히는 영상이 화제였는데, 그걸 따라 하는 도전이었다. 장난삼아 시작한 일이 커졌다. 눈보라 속에서 10시간 연습하고, 5시간 연달아 쉬지 않고 발에 피가 나도록 연습하는 풀 영상도 올렸다. 수만 번 도전 끝에 결국 두 달 만에 성공했다.

—예능 찍자고 한 도전이 어느 순간 다큐가 돼 있더군요.

“까마득한 후배가 성공한 걸 해서 뭐 하냐, 실패하면 체면만 구긴다며 말리는 사람도 많았어요. 몇 번이나 포기할까도 했죠. 그런데 도전 영상 틀어 놓고 그 시간 동안 초집중해 자기도 공부했다는 수험생, 고민 많았는데 저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취업준비생들 응원이 줄을 잇더군요. 단 한 사람의 응원이 있는 한 포기할 수 없다며 입술 꼭 깨물었습니다.”

—유튜브는 왜 한 건가요.

“제가 대중의 관심을 아주 많이 받은 톱 선수는 아니었죠. 관심을 조금 받은 선수인데도 은퇴해서 그냥 잊히는 건 싫었어요. 지난날 찬찬히 돌이켜 보니 삶의 방향키는 늘 ‘도전’이었습니다. 목표 세우고 도전해 성공했다가 다시 실패하고, 또 도전하고. ‘기승전 도전’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세상살이 힘든데 제가 조그만 거라도 도전해 성취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희망과 대리 만족을 주고 싶었습니다. 대학원(고려대 체육교육대학원)을 다니다가 휴학 중인데 동기들 보니 취업이 너무 안 되더라고요. 코로나 때문에 힘든 취업준비생, 무기력해진 회사원, 가게 사장님들, 모두에게 힘을 주고 싶습니다. 도전 무한 리필할 테니 저 보면서 포기하지 마세요. 힘들어도, 가야 돼!”

—무모한 도전을 하면서 스타일 구기는 게 두렵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이 안정환 형을 보면 범접할 수 없는 천재라고 생각해요. 차원이 다른 선수인 거죠. 조원희는 톱은 아닌데 어느 정도 레벨 이상은 넘어요. 실패도 종종 하죠. 왠지 조원희가 도전하는 거면 나도 마음먹으면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듯해요. 생긴 것도 어딘가 절실해 보이고, 측은해 보이잖아요? 도전 아이콘에 최적화된 외모 아닌가요. 으하하.”

—국가대표까지 했는데 겸손한 것 아닌가요?

“아들 친구 아빠도 그렇게까지 다 내려놓는데 괜찮으냐고 걱정하더라고요. 조롱당하면서도 웃음을 준다고 ‘타격감 기가 막힌다’는 지인도 있어요. 제가 선수 생활하면서 터득한 이치가 있습니다. ‘낮추면 높아진다.’ 자존감이 있으면 제가 몸을 낮춘다고 해서 상대가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조원희가 5시간 넘게 '이강인 크로스바 챌린지'를 한 장면. /조원희 유튜브 채널 '이거해조 원희형' 캡처
조원희가 안정환과 일대일 대결을 펼치는 장면. /조원희 유튜브 '이거해조 원희형' 캡처

◇낙폭 큰 축구 인생, 삶의 지혜를 주다

조원희는 자신의 축구 인생을 “애매한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무명 선수에서 2005년 ‘아드보카트 감독의 황태자’로 불리며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됐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됐으나 단 1분도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2009년엔 프리미어 리그 팀 위건 애슬레틱에 입단했다. 박지성·이영표·설기현·이동국·김두현에 이은 국내 6호 프리미어리거로 주목받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1년 만에 짐을 쌌다. 이후 중국 광저우 헝다, 일본 오미야 아르디자 등을 거쳐 수원 삼성으로 복귀, 2018년 은퇴했다.

“월드컵에서 단 1분도 못 뛴 게 그렇게 한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만약 1분을 뛰었다면 왜 1분밖에 못 뛰었나 했겠죠? 그러니까 후회하지 말고 가야 돼!”

국가대표팀 시절 조원희. 몸을 사리지 않는 투지의 화신으로 통했다. /조선일보 DB

팬들 사이엔 극과 극의 두 골로 각인돼 있다. 2005년 국가대표 데뷔전인 이란과의 친선 경기에서 수비수인데 시작 59초 만에 결승골을 넣었다. 1979년 이후 국가대표팀 골 중 최단 시간 득점 기록. 화려한 데뷔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골. 2017년 수원 삼성과 강원 FC 경기에서 헤딩으로 공을 걷어내다가 자책골을 넣었다. 팬들은 “자책골 아니었으면 푸스카스상(FIFA에서 매년 가장 멋진 골 넣은 선수에게 주는 상) 받았을 그림 같은 골”이라며 ‘조스카스’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안겼다.

—두 골이 낙폭 컸던 축구 인생을 보여주는 단면 같습니다.

“낙폭이 커도 너무 컸죠. 자책골이 미국 방송에서 해외 스포츠 토픽으로까지 나갔으니까요. 확 올라갔다가 훅 떨어지고, 성공 문턱까지 갔다가 미끄러지고. 한편으론 힘든 시기를 줄곧 헤쳐왔기에 사람들이 제 얘기에 귀 기울이는 것도 같습니다.”

가수 비가 실패작이었던 ‘깡’을 소환해 웃음 소재로 즐기듯 조원희도 이젠 자책골의 아픈 추억을 들춰 스스로 희화화한다. “비의 마음을 정확히 알 것 같아요. 저도 그땐 들추기도 싫었는데 이젠 도가 텄습니다.”

요즘 조원희는 유행어 제조기다. ‘조차박’ ‘가야 돼!’ 등이 축구 팬들 사이에 화제다.

—“가야 돼, 가야 돼!”라는 유행어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퍼졌던데요. ‘가자’가 아니고 ‘가야 돼’입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서정원 전 수원 삼성 감독님이 94년 미국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2대2 동점골을 넣었을 때 한 세리머니를 조금 변형한 겁니다. 서 감독님이 복귀할 때 힘을 많이 불어넣어 주셔서 감사 의미를 담았어요. 후배들 다독이면서 포기하지 말고 같이 가자는 제스처이기도 하고요. 입에 착착 붙어 자꾸 하다 보니 주문처럼 됐네요.” 얼마 전엔 김해 가야대에서 연락이 와 홍보대사까지 하게 됐다.

—논란의 ‘조차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축구 유튜버 ‘감스트’ 채널에서 손흥민, 차범근, 박지성 세 레전드 중 누가 최고인지 축구인들에게 묻는 이른바 ‘손차박 대전’을 열었다. 여기 참여한 조원희가 차범근, 박지성을 제친 적 있다며 ‘조차박(조원희·차범근·박지성 순)’이라고 말해 큰 웃음을 샀다).

“수원 삼성 시절 연습하다가 당시 차범근 감독님과 일대일을 했는데 제가 한 번 제친 적이 있고, 지성이 형은 대표팀에서 가끔 제친 적이 있었어요. 손흥민 선수는 같이 뛴 적이 없어서 언급 안 했고요. 농담으로 경험상 ‘조차박’이라고 내뱉었는데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서 빵 터지더군요. 그분들과 신뢰가 있기에 한 말이니 오해는 마시고요. 물의 일으켜 죄송합니다(웃음).”

축구 유튜브 채널 ‘슛 포 러브’를 통해 조원희를 만난 차범근 전 감독은 “원희 너는 나하고 지성이랑 레벨이 안 맞잖아?”라고 농담으로 받았고, 박지성은 “걔가 그러면 맨유를 왔겠지”라며 유머로 호응했다.

—선후배 관계가 좋은가 봅니다. ‘좀처럼 웃기지 않는 박지성도 조원희를 만나면 웃긴다’는 사람도 있던데요.

“국가대표 5년 하는 동안 이영표, 박지성 선배와 룸메이트를 했어요. 선배들이 막내라 예뻐하셨습니다. 솔직히 이영표 선배님과는 룸메이트 하고 싶지 않았어요. 20대 초반 자유분방한 조원희가 30대 초반 영표 형과 ‘어르신 대화’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식사는 평균 한 시간. 제 얘기 들어주는 시간보다 본인 얘기하는 시간이 많았죠. 물론 아시죠? 친하니까 ‘디스’하는 거(웃음). 여전히 의지 많이 하는 형입니다. 복귀 전까지 같이 철인 3종 준비도 했고요. 지성이 형은 방에 머리카락 하나 안 떨어져 있는 깔끔한 성격이에요. 형이 맨유에서 활약할 때 제가 위건에 있어서 가서 밥도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복귀할 때 누구보다 걱정했던 분이기도 하고.”

조원희는 자신의 축구 인생 키워드는 '도전'이었다고 했다. "성공 목전까지 갔다가 미끄러져본 경험들이 내 삶을 단단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난 사과나무의 잎 같은 존재

—“뭘 해도 될 형”이라는 댓글이 눈에 띄더군요.

“농담 삼아 보험회사 직원이면 보험 왕 될 자신이 있다고 해요. 근면, 성실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투지의 화신인 AC 밀란의 전설적 선수 젠나로 가투소에 빗대 ‘조투소’란 별명도 있죠. 근성은 어떻게 길렀습니까.

“중학교(배재중) 축구부 때 근면 성실을 몸으로 보여준 롤모델이 있었어요. 새벽 6시 30분이면 등교해 운동장으로 달려갔는데 아무리 일찍 가도 1년 365일 먼저 와 연습하는 형이 있었어요. 운동장 나눠 쓰던 3년 위 배재고 형이었어요. 그 형이 처음엔 큰 두각 못 냈는데 고3 때 전국대회 득점왕에 국가대표까지 되더군요. 노력하면 언젠가 된다는 걸 보여준 사람이었죠. 차두리 형이에요. 차범근 감독 후광 덕에 두리 형이 성공했다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형이 그 자리 오르기까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두 눈으로 봤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그걸 본 사람은 저하고 차로 새벽에 데려다준 저희 엄마밖에 없을 겁니다.”

—절실함이 몸에 밴 듯한 건 왜인가요.

“어렸을 땐 유복했는데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신사동에서 하시던 고깃집이 망했습니다. 3년 정도 부모님이 도피 생활하시며 일용직 노동도 하셨어요. 어쨌든 우리 집을 살려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2002년 울산 현대에 입단했다. 연봉 1200만원짜리 연습생이었다. “구단에서 100만원에 세금 제하고 매달 98만원을 준다더군요. 어머니한테 통장을 맡겼는데 88만원이 들어왔다는 거예요. 구단에 가서 왜 10만원이 덜 들어왔느냐고 따졌더니, 밥값 10만원을 뺀 거라면서 ‘너 같은 놈은 처음 봤다’고 하더군요(웃음). 이후 군대 다녀와 수원 삼성에 입단했더니 월급 앞자리는 같은데 ‘0’이 하나 더 붙었어요. 몇 년 고생해 부모님 빚을 다 갚아 드리고 예전 살던 동네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도 없고, 지금도 관계가 무척 살갑다. 트레이드 마크가 된 2대8 머리도 아버지 따라 동네 목욕탕 이발소에 갔다가 같이 한 머리”라고 했다.

—처음엔 공격수였다고요?

“공격수로 뛰다가 2003년 광주 상무 때 측면 수비수로 뛰기 시작했어요. 공격수 자리엔 이동국, 조재진 선배 등 자원이 많아 제가 들어갈 틈이 없었어요. 감독님이 수비수 전향을 제안했는데 게임을 뛰기 위해 무조건 하겠다고 했습니다. 프로에서 뛰는 수비수 중 80~90%는 공격수 출신입니다. 어렸을 땐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만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게 냉정한 현실입니다. 무조건 내가 있고픈 자리를 고집하기보단 내가 필요한 자리에 가서 빛을 내는 것도 중요하다. 축구가 가르쳐 준 깨달음이에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게 어렵지 않은가요?

“사람들은 사과나무의 주인공은 사과라고 생각해요. 가지에 달린 이파리는 안중에도 없어요. 그런데 이파리가 없으면 사과가 열릴까요? 저는 제 존재가 사과나무 이파리 같다고 생각해요. 뿌리나 사과만큼은 못 되지만, 그렇다고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존재.”

◇11년 전 실패한 조원희 마주할 것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에 운동하는 모습을 꾸준히 올려 공유하던데요. 선수들 사이에서도 체력왕으로 통한다고요?

“올 초 황의조, 이승우 등 해외파 선수들이 찾아와 함께 체력 훈련을 했어요. 승우는 근력 운동을 많이 했는데 벨기에로 돌아가 골을 터뜨린 뒤 ‘가야 돼’ 세리머니를 하기도 했죠. 저는 ‘축구는 피지컬’이라고 해요.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체력 없으면 못 뛰니까. 제가 기술이 부족한 선수라 체력으로 어필하는 것도 있지만(웃음). 그런데 체력보다 더 중요한 게 ‘멘털’입니다. 아무리 기술, 체력 좋아도 자신감 없으면 골을 피하게 돼요.”

조원희는 후배들의 심리 치유사를 자처했다. “수원 삼성 시절, 코치들이 출근하면 저를 불러 말했어요. ‘○○이가 아프니, 네가 좀 가서 치료해줘라’고.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는 얘기였습니다. 1군 있다가 2군 내려와 사기 떨어진 친구들, 뛰고 싶어도 못 뛰는 친구들…. 제가 실패한 경험이 많으니 후배들도 제 얘기에 귀를 기울이더라고요.”

—‘가야 돼, 가야 돼’ 외치는데 최종 목적지는 어딘가요.

“축구 인생 돌이켜 봤을 때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위건에서 버티지 못하고 돌아온 겁니다. 그땐 외국 선수들하고 눈도 못 맞췄어요. 잉글랜드 5부 리그부터 차근차근 도전해 그때의 트라우마를 깨고 싶어요. 유튜브, 현역 복귀도 실전을 뛰면서 레퍼런스를 차곡차곡 쌓고 기록해 다시 유럽 무대에 진출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최종 목표는 지금은 3부로 강등된 위건으로 돌아가는 것. “11년 전 스물여섯 조원희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서른일곱 조원희가 다시 도전하는 과정을 지켜봐 주세요. 무모한 도전이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성공 못 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안 멈추렵니다. 가야 돼, 가야 돼!!”

<아무튼주말> 축구선수 조원희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