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주노초 총천연색으로 물든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 산길 따라 1시간쯤 걸어 올라갔다. 졸졸 흐르는 맑은 개천 맞은편 붓글씨 잔뜩 걸린 건물이 단풍 속에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속리산의 숨은 명소 ‘비로산장(毘盧山莊)’이다.
57년 전인 1963년 문 연 국내 몇 남지 않은 민간 산장. 등산객을 위한 숙소이자 응급 대피소 역할을 해왔다. 정·재계 인사가 많이 찾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도무문(大道無門)’이 탄생한 곳이자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이 작고하기 한 달 전 머문 곳으로도 이름났다. ‘인생 상담소’이기도 했다. 산장을 세운 고(故) 김태환·이상금씨 부부는 사업 실패, 배우자와 불화, 시험 낙방 등으로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며칠이고 무료로 먹이고 재우며 새로운 인생을 찾게 하는 보시를 베풀었다.
부부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막내딸인 화가 김은숙(56)씨가 대를 이어 산장을 관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김씨는 “봄에는 새순, 여름에는 그늘,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흰 눈… 여기는 사계절 다 좋다”고 했다.
―아버님이 어떻게 산장을 짓게 됐나요.
“아버지가 친구들과 속리산에 놀러 왔다가 반해버린 거예요. 그때 아버지는 40대 초반으로 (충북 청주) 미원면에서 공무원을 하고 계셨는데, 그길로 공무원 그만두고 ‘속리산에서 사업하겠다’며 할아버지·할머니에게 시골(고향)에 있는 땅을 팔아 달라고 조른 거야. 그때는 수학여행 단체가 묵는 큰 여관마다 기념품 상회가 있었어요. 속리산 사진 앨범, 배지 등 기념품 납품하는 도매상을 크게 차린 거예요. 경험 없이 장사를 하다가 3년 만에 수금을 못 해 쫄딱 망하셨어요. 지금 산장 자리에 표고버섯 재배장 인부들이 잠깐 쉬는 움막이 있었어요. 시골 돌아가기 창피하고 망했다는 소리 듣기 싫었던 아버지가 (땅을 소유한) 법주사에서 허락을 받아 움막을 사서 살게 된 거예요.”
―처음엔 산장이 아니었군요.
“비 새지 않게 천막 사다가 지붕 뚫린 곳 막고 지내고 있으니 사람들이 들어오더래요. 그때는 무전 여행하는 이들이 있었어요. 이런 분들 오면 찬밥 나눠 먹고 했어요. 어머니는 평생 ‘그냥 가세요’ ‘형편껏 주세요’라고 하셨지, 장사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일하던 아줌마들이 보다 못 해 대신 돈을 받아주기도 했어요. 배 고픈 사람은 밥 주고, 어두우면 자게 해주고, 조난자 생기면 수색을 도왔어요. 1970년대 속리산이 국립공원이 되면서 불법으로 지은 집 등을 정리했는데, 공무원과 스님들이 ‘여기만큼은 좋은 일 많이 했으니 살려야 된다’고 나서 주셨어요. ‘살리되 정식으로 다시 지으면 좋겠다’고 결정이 났지요. 본채가 45평인데 모래 여덟 트럭이 올라왔어요. 트럭이 600m 아래 세심정에 모래를 쏟아 놓으면 인부들이 쌀자루에 담아서 지게에 지고 올라왔어요. 그렇게 시멘트도 올라오고, 벽돌도 찍어가면서 지은 거예요.”
1970년대 대한산악연맹과 집권 공화당 산악회는 대피소 기능과 등산 교육·훈련을 위한 산장 건립을 추진했다. 1970년 도봉산 도봉산장과 보문산장 등 13동, 1971년에는 21동이 추가돼 모두 34동이 전국 명산에 설립됐다. 2000년대 들어 자연 생태 복원과 노후로 인한 안전사고 위험 등을 들어 산장을 단계적으로 철거하고 있다.
―부모님이 돈은 좀 버셨나요.
“집 지으려고 빚 내고, 큰오빠가 직장 다니며 모아놓은 돈도 다 가져오고, 사채까지 쓰게 됐어요. 1980년대 말에야 사채를 갚고 조금 살 만하니까 IMF가 터지더라고. 그러더니 펜션이 생기고 해외여행이 잦아지며 손님이 뜸해졌어요.”
―비로산장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1970년대 초반요. 신혼부부들이 여기서 자고 싶어 산 아래 마을 여관에서 대기할 정도였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 산장이 예쁘고 독특했으니까요. 고시 공부 명소로도 이름났었어요. 한 방에서 두 명씩 지내며 공부했어요. 많이 합격했어요. 주방에서 일하고 서빙하고 도와주던 언니들 하다못해 아르바이트 하던 애들도 변호사·공무원·사업해서 잘살고 있어요. 아무래도 여기가 열악한 환경인데 견뎌낸다면 세상 못 할 일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형제분들도 잘 되셨나요.
“평범한 소시민? 우리가 위로 아들 셋 아래로 딸 셋 육 남매인데 모두 건강하게 살아있는 게 성공한 거다, 이렇게 생각해요. 요즘은 젊은 사람들도 암으로 죽고 그러잖아요.”
―육 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여기서 태어나셨죠.
“온 가족이 시골 할아버지·할머니 집에 있었는데,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아범이 마음이 약한데 망했다고 이상한 마음 먹으면 안 되니까 네가 가서 위로해주라’며 보내셨대요. 그러다가 내가 태어난 거지(웃음)."
―근처에 함께 놀 또래가 있었나요.
“개울에서 물놀이도 하고 혼자 잘 놀았어요. 일하느라 바쁜 엄마 치맛자락 잡고 있으면 아버지가 번쩍 업고 절에 자주 데려갔어요. 저는 법당에 앉혀 놓고 아버지는 스님이랑 얘기하고 그러셨어요. 아버지가 되게 자상했어요. 늦게 낳았으니까 더 그랬겠죠.”
―언제까지 여기 살았나요.
“초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어요. 4학년이던 언니까지 전학 와서 같이 다녔어요. 아버지가 짐 자전거에 박스 얹고 스폰지·방석 깔아서 우리를 태워서 매일 등교시키셨어요. 그러다가 보은에 이어 대전으로 ‘조기 유학’ 갔어요. 그때는 이 주변이 관광지라 아무래도 교육하기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거든요.”
―어떻게 산장을 이어받게 됐나요.
“서울에서 일하다가 서른일곱 살 때 왔어요. 주말에 부모님 뵈러 왔더니 해결해드려야 할 일이 있었어요. 2~3일 있어볼까 하다가 3~4년이 갔어요. 부모님은 연로하신데 사람들은 계속 오고,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있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예요.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 10년 들어와 살았고 돌아가신 후 또 10여 년을 버텼네요.”
김씨는 숙박 손님은 받지만 과거 부모님이 운영할 때처럼 식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과거처럼 직원을 많이 둘 수 없어 음식까지 준비할 여력이 없다. 손님이 즉석밥이나 라면 등 간단한 요기거리를 직접 준비해와야 한다. 부지런히 쓸고 닦아서 깔끔하지만 50년 넘은 건물이라 낡은 건 어쩔 수 없다. 돈도 돈이지만 국립공원 안에 있어서 관청·국립공원·사찰 등에서 수리 허가 받기가 쉽지 않다.
―여기 살면 뭐가 제일 좋은가요.
“공기가 달아요. 우리는 아랫마을만 내려가도 공기가 다른 걸 느껴요. 물도 좋아요. 아토피가 싹 들어가요. 저는 ‘곰보 되는 거 아닌가’ 걱정할 만큼 피부가 나빠서 고등학교 때부터 피부과 다녔는데 여기 살면서 없어졌어요. 세조도 여기 와서 피부병을 고쳤다잖아요.”
비로산장은 건물 안팎으로 붓글씨가 빼곡하게 걸려있다. 서예와 서각으로 이름났던 김태환씨가 직접 쓰거나 소문 듣고 찾아온 서예가들이 써 주고 간 글씨들이다. 비로산장 현판은 서예로 일가를 이룬 소암 현중화 선생의 글씨를 김태환씨가 새겼다. 정·재계 유명 인사가 남긴 글씨도 많다. 본채 안방에 걸린 ‘大道無門(대도무문)’은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필 사본이다.
―여기가 김영삼 대통령의 좌우명 ‘대도무문’이 탄생한 곳이라면서요.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 대통령도 몇 번 오셨다고 해요. 아들 현철씨 데리고 오시기도 했고요. 아버지가 ‘여기 오시면 글을 다 남기신다. 총재님도 하나 써주시지요’ 부탁하니, 김 대통령이 머뭇거리며 ‘나는 글씨를 써본 적 없다’고 하더래요. ‘그래도 기념이니 써달라’고 부탁하니 어쩔 수 없이 중국 한시(漢詩)를 하나 쓰셨대요. 이 일을 계기로 김 대통령이 서예를 연습하셨나 봐요.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총리 등 다들 글씨를 쓰던 때였으니까요. 대선에서 패하고 다음 해인 1988년 김 대통령이 찾아오셨어요. 제가 직접 봤어요. ‘大道無門’이라고 써서 아버지께 주셨어요. 이때부터 비로산장이 김영삼 대통령이 서예를 하게 된 계기다, 대도무문의 산실이다 하는 말이 나온 거예요.”
비로산장 앞 개울가에는 작은 부스 하나가 설치돼 있다. 전기 주전자와 믹스 커피가 상자째 놓여 있다. 지나가는 등산객 누구나 마음대로 타 마실 수 있다. 바쁘지 않을 때면 김은숙씨가 직접 타주기도 한다. 돈은 받지 않는다.
―커피는 왜 공짜로 주나요.
“우리 엄마가 ‘이렇게 공기 좋은 데 살면서 딱 두 가지는 하자’고 하셨어요. 하나는 화장실 마음대로 쓰게 개방하자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목 마른 사람에게 물 주자는 거였죠. 요새는 물을 싸 가지고 다니니까 대신 커피를 내놓은 거예요. 엄마는 가마솥에 약차를 달여서 드리기도 했는데, 요새는 체질 따라 맞지 않는다고 드시지 않는 분도 있고 해서 커피를 드려요. 음식도 드리지 못하고 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내놨는데, 등산객들이 믹스 커피 하나로 감동하시더라고요. 어떤 분이 택배로 커피 한 박스를 보내주셨어요. ‘내가 한 박스 사면 많은 사람이 나처럼 마시지 않겠느냐’면서요. 그럼 누가 따라서 또 보내주시고. 릴레이가 돼요. 재밌어요.”
“거 봐. 얼마나 좋아!” 인터뷰를 마칠 때쯤 등산객 다섯이 등산로를 올라왔다. 김은숙씨가 “따뜻한 커피 좀 드세요” 하며 다섯 잔을 내놨다. 비로산장을 알려주겠다며 친구들을 끌고 온 박재륜(73)씨는 “55년 전 고등학생 때 법주사에서 열린 수련 대회 참석하러 처음 왔다가 반해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고 했다. “앞으로 오래 남아 있어주면 좋겠어.”
―앞으로도 계속 운영하실 거죠.
“하늘이 허락할 때까지, 국민이 허락할 때까지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