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영(40)씨는 골프장 예약 사이트 양도 게시판에서 웃돈 3만원을 주고 예약권을 샀다. 경기도에 있는 골프장의 10월 한 주말 예약이었다. 암표상인 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약이 열리자마자 5분 이내에 마감되는 탓에 최근 골프장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골프장에 갔을 때 그의 앞 팀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네 명, 뒤 팀은 3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여성 네 명이었다. 클럽하우스와 그늘집(골프장에 있는 휴식 공간)에 갔을 때도 지난봄과는 달라진 분위기. 강씨는 “예전에는 20~30대 여성은 네 명 중 한 명도 안 됐고, 대부분 남편이나 남자 친구, 가족과 왔다. 이번에 갔을 때는 클럽 하우스의 절반이 젊은 여성이었다”고 했다. “동남아와 같은 해외로 골프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국내 골프장을 이용해서 예약이 힘들어진 줄로만 알았는데 진짜 요인은 따로 있었네요. 몇 달 새 눈에 띄게 많아진 젊은 여성 골퍼들이 크게 한몫했군요.”

갓 골프에 입문한 젊은 골퍼, 일명 ‘골린이’, 그중에서도 여성 골린이가 늘어났다. 골프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골프장에서 열 명 중 두 명 정도를 차지했던 여성 골퍼가 지금은 절반 정도이고, 예전보다 연령대도 낮아져 이 중 대부분이 20~30대이다. ‘여유 있는 아저씨의 집결지’로 여기던 골프장이 왜 젊은 여성들의 ‘핫플’이 됐을까.

일러스트= 안병현

여성 라커 늘리고 떡볶이 팔고

지난 16일 증권사에서 일하는 김현정(37)씨는 업무가 끝나자마자 용인의 한 골프장으로 달려갔다. 여의도에서 함께 일하는 고교 동창들과 함께 야간 골프를 즐기려는 것이다. 그는 “예전에 골프를 잠깐 배운 적이 있지만,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코로나 이후에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아보다가 골프 연습장을 가게 됐다. 타석에 혼자 들어가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도 지킬 수 있고, 집에 와서 샤워해도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씨는 업무가 일찍 끝나는 금요일에 친구들과 종종 식당이나 술집에서 만나곤 했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에는 이런 모임이 거의 사라졌다. 대신 친구들끼리 다닐 수 있는 골프장을 선호하게 되면서 야간 골프나 주말 골프를 하게 됐다. 골프가 술, 식사 자리를 대신하는 친목 모임이 된 것이다. 김씨는 “집콕 기간이 길어지면서 무엇보다 야외로 나가는 것을 즐기게 됐다. 여성 동료나 친구들은 올 들어 등산 아니면 골프, 둘 중 하나를 시작했다”고 했다.

춘천 라데나CC의 문희종 대표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에는 골퍼 중 20~30대가 20%, 40~50대가 60%, 60대가 20%를 차지했다면 최근엔 20~30대와 40~50대가 각각 40%를 차지한다. 중장년층이 줄었다기보다, 청년층이 많이 늘어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여성이 많이 늘었다. 문 대표는 “여성 라커가 남성 것보다 적었는데, 최근 여성 라커를 늘렸다. 식당에서도 국물 있는 한식을 선호하는 중년 남성 위주의 종전 메뉴에 젊은 여성이 좋아하는 피자나 떡볶이, 어묵 등을 추가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젊은 여성 골퍼가 늘어난 데다 코로나 특수까지 겹치면서 가을 성수기 예약 잡기가 예년보다 힘들어졌다. 예약 사이트에서 웃돈을 주고 예약권을 거래하기도 한다. 세이지우드 CC(홍천)의 이두현 지배인은 “3주 전 예약을 시작한다. 전에는 성수기라도 마감에 2시간이 걸렸는데, 최근에는 10분 안에 다 찼다”고 했다. 이곳 역시 여성 비율이 5년 전만 해도 20%였다가 최근 50% 정도까지 늘어났다. 회원권 가격도 함께 올랐다. 강원도의 한 골프장 회원권 가격은 작년 6500만원이었던 게 최근 1억원에 거래되고, 다른 지역 회원권 가격도 8000만원에서 1억여 원으로 올랐다.


해외여행 대신 골프장?

29일 현재 인스타그램에서 #골프를 검색하면 상위 게시물 12건 중 10건이 젊은 여성이 골프장에서 셀카를 찍은 것이거나 샷을 날리는 자세를 잡은 사진이다. ‘골프스타그램’으로 검색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해외여행지나 바닷가, 수영장에서 사진을 찍어 올리던 인스타그래머나 인플루언서들이 코로나 사태 이후 골프장을 새로운 사진 배경으로 택한 셈이다. ‘고급’ 스포츠라는 골프 이미지까지 더해져 과시용으로도 쓰인다.

올가을 처음으로 골프장에 가본 문지혜(29) 씨는 “담쟁이넝쿨로 뒤덮인 클럽 하우스 앞이나 푸른 하늘 아래 쫙 펼쳐진 초록색 잔디에서 사진을 찍으면 잘 나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요새 여성스러운 옷차림이 대세가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 입기 어려운 짧은 주름치마 같은 것도 골프장에선 입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최근 골프장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오래 찍다가 뒤 팀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라운딩 한 번에 30만원은 족히 드는 비용은 부담스럽지 않을까. 그는 “어차피 해외여행을 가지 않아서 그 돈으로 골프복을 사고 골프를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부담스럽진 않다”고 답했다.

인스타그래머 사이에선 골프장마다 사진을 찍기 좋은 곳이 알려져 있다. 클럽하우스나 그늘집이 예쁜 곳을 서로 알려주기도 한다. 자동차에서 찍는 사진 구도와 자세가 정해져 있듯이 골프 카트에서 찍는 사진도 마찬가지다. 경북에 있는 한 골프장 매니저는 “여성 골퍼 중 90%가 사진을 찍는다고 보면 된다. 만약 골프장 사진 촬영 금지 같은 규정이 생긴다면 지금 오는 여성 골퍼의 절반 이상은 안 올지도 모른다. 우리도 다가올 비수기에 어떻게 하면 골프장이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꾸며볼까 고민 중이다. 요새는 골프장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핫스폿을 갖고 있느냐가 관건이다”라고 했다.

골프장 매니저들은 “사진을 찍겠다는 목적을 갖고 오기 때문에 여성 골퍼들이 골프복에 돈을 안 아낀다. 옷차림도 예전보다 훨씬 경쾌하고 세련되다”고 했다. 신세계 백화점에 따르면 올해 골프 관련 제품의 전체 매출이 전년 대비 8.16% 늘었는데, 여성 부문에선 21.4%가 증가했다. 올해 새롭게 선보인 신규 골프웨어 브랜드만 15종, 골프웨어 플랫폼은 4개에 이른다. 신세계 백화점은 골프 편집 매장을, 요가복 브랜드인 제시믹스와 20대를 겨냥한 스트리트 브랜드를 주로 판매하던 온라인 쇼핑몰 무신사는 골프복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기존 골프 브랜드도 젊은 세대를 겨냥한 브랜드를 따로 만들거나 수입한다. 귀여운 캐릭터와 파스텔 색상 위주의 디자인을 내세운 ‘피브베’라는 브랜드는 애초에 여성 골퍼 위주의 상품을 내놨다.

남성과 대등할 수 있는 운동

한 여성 세미 프로 골퍼는 “늘어난 여성 골퍼 중에는 유흥업계 종사자도 꽤 된다. 골프를 잘 하지 못해도 일단은 골프장에 나온다. 저마다 목적이 있다”고 했다. 유흥업계 종사자들이 코로나 사태와 기업의 접대 문화 변화로 어려움을 겪자 골프장에서 영업한다는 것이다. 이 중에는 아예 인플루언서로 전향하기 위해서 골프장을 찾는 경우도 있다. 골프복 브랜드를 갖고 있는 한 패션 업체 관계자는 “골프복 브랜드가 늘어나면서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많은 인플루언서에게 하는 협찬이 늘어났다. 이런 호재를 노리고 골프장을 찾는 것이다. 골프복 브랜드에서 협찬을 받으려면 골프를 한다는 것을 일단 알려야 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20대부터 시작해 지난 10년간 골프를 해온 변호사 서정민(38)씨는 “여성 골퍼가 늘어난 걸 허세나 과시로만 보지 말아 달라. 골프도 운동이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이 많지 않다. 농구나 야구를 함께하긴 어렵지만 골프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만약 회사에서 친목이나 접대를 축구로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저는 한 번도 못 꼈거나 고작 해야 옆에서 응원이나 했을걸요? 골프는 남녀가 함께할 수 있고,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어요. 이제 업무차 골프를 하러 갈 때도 여자가 많이 보여서 오히려 반가운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