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로 보이는 자매님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가난한 가정에서 컸어요. 식당에서 설거지, 청소, 홀 서비스 등 궂은일을 하면서 살아왔어요. 은행 계좌도 없어요. 대신 돈이 생기면 금을 샀어요. 금을 모으는 것이 저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두 힘든 시기에 저만 생각할 수는 없더라고요. 이걸 팔아서 당신의 친구들을 위해 사용하세요.’ 자매님은 작은 상자를 건넸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받은 상자에는 반지, 목걸이, 열쇠 등 금붙이가 들어 있었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금보다 더 가치 있는 마음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게 기적입니다.”
김하종(63) 신부 입에서는 “기적” “경이롭다” “놀랍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이탈리아에서 농부의 아들 빈첸시오 보르도(Bordo)로 태어난 김 신부는 1987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90년 오블라티 선교수도회 소속으로 한국에 왔다. 존경하는 김대건 신부의 성(姓)과 ‘하느님의 종’을 따서 김하종으로 개명했다.
1992년 경기도 성남에서 빈민 사목을, 1993년부터 독거노인 점심 급식소를 운영했다. IMF 이후 급증한 노숙인을 돕기 위해 1998년 ‘안나의 집’을 열었다. ‘안아 주고 나눠주고 의지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노숙인 급식소와 기숙사, 자활 센터, 가출한 아이들을 돌보는 청소년 쉼터로 이루어져 있다.
매일 오전 5시 일어나 밤 9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쉴 새 없이 일하는 김 신부는 코로나 사태 이후 일기를 썼다. 275일 분량을 모아 낸 책이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니케북스)이다. 김 신부는 “코로나 이전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며 “코로나가 터지고 난 다음부터 일어난 기적처럼 아름답고 놀라운 현실을 기억하기 위해 일기를 쓰게 됐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책으로 냈다”고 했다.
―지난 22년간 안나의 집을 운영하면서 코로나보다 더 큰 위기가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메르스, 사스 등은 일주일, 길어야 한 달이었어요. 코로나는 벌써 9개월, 거의 10개월이 돼 가는데 여전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잖아요. 2~3월이 가장 힘들었어요.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새로운 상황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죠.”
―후원금과 자원봉사자도 줄었죠.
“성당을 다니며 후원을 받았는데, 코로나로 미사가 중단돼 후원금이 급격히 줄었습니다. 코로나가 오래갈수록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분도 많아지면서 기부를 끊기도 하고요. 코로나 감염 우려 때문에 자원봉사자도 줄었습니다. 한 기업에서는 임직원이 단체로 자원봉사 오기로 했다가 당일 오전 11시 ‘직원들이 두려워한다’며 갑자기 취소하기도 했어요.”
―찾아오는 노숙인은 반대로 늘었죠.
“서울 등 전국 급식소 대부분이 문 닫으면서 우리를 찾아오는 (노숙인) 친구가 더 많아졌어요. 원래 550명이 식사했어요. 3~4월에는 800명까지 왔어요. 이후 다른 급식소들이 다시 문 열면서 줄었지만 여전히 650명으로 과거보다 100명 더 많지요. 게다가 실내 배식을 할 수 없어서 도시락으로 바꾸고 길 건너 성남동성당 마당에서 나눠 줘요. 도시락을 싸고, 성당 마당으로 옮기고, 나눠 주려니 과거 식당에서 배식할 때보다 인력이 더 필요해요. 전에는 봉사자 20명 있으면 잘 돌아갔어요. 요즘은 30명 필요해요.”
―주변에서 ‘폐쇄하라’는 민원도 들어올 텐데요.
“자주 들어왔어요. 시청 직원들이 찾아와 ‘폐쇄해달라는 민원이 많다’며 ‘닫을 계획 없느냐’고 계속 물어요. ‘너 때문에 우리 동네에 바이러스 들어온다’며 손가락질하며 욕하는 분도 계세요. 동네 사람들이 저를 불러다가 계속 닫으라고 해요. 도시락 받으러 오는 노숙인과 주민이 싸워서 경찰이 출동한 적도 많아요.”
―코로나는 감염병입니다. 그분들 두려움도 어느 정도 일리 있지 않은가요.
“두려움은 정상입니다. 두려워서 공격하고 욕하는 거, 이해합니다. 감염될까 두려워서 자원봉사 취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도 두려워요.”
―스트레스 때문에 좋아하는 에스프레소 커피도 끊으셨다면서요.
“고향이 그립고 돌아가고 싶을까 봐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이탈리아 음식을 일부러 피했어요. 지금은 한식이 더 맛있어서 먹지만요(웃음). 에스프레소 커피만큼은 끊지 못했는데, 지난 9월부터 마시지 않아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병원에 가서 검사받았어요.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운동·휴식하고 커피(카페인)를 끊으라더군요. 지난 2~3월에는 새벽 3시면 잠에서 깨어났어요. 악몽을 꾸어서 온몸이 땀으로 젖을 때가 많았어요. 아주 아주 피곤해서 쉬려고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침대가 많이 있었어요. 누우려 했더니 안 된다는 거예요. 맨 끝에 있는 작은 침대에 누워 쉬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가지 못하는 꿈이었지요. 큰 책임감이 두 어깨에 느껴졌어요.”
―그렇게 하면서까지 노숙인 급식을 계속해야 했나요.
“폐쇄하라는 시청 직원과 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쇄하지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이 사람들은 제 가족입니다. 선생님 가족 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버립니까? 아니죠? 더 많이 신경 쓰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이분들한테 식사 드리면 건강해져서 바이러스에 덜 걸립니다. 사회에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닫지 못합니다.’ 두려워서 그만두면 안 됩니다. 의사 선생님이 바이러스가 위험하다고 근무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잖아요. 하지 않으면 노숙인 친구들이 굶으니까 하는 거예요. 안나의 집에서 받은 도시락이 하루 유일한 끼니인 노숙인이 전체의 70%입니다. 놀랍게도 이제까지 저와 우리 직원들, 자원봉사자들, 노숙인 친구들까지 한 명도 바이러스 걸리지 않았어요. 이거 기적이에요. 다른 말 없어요.”
김하종 신부는 올해로 한국 생활 30년을 맞았다. 그는 “1990년 5월 12일 한국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김포공항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숨을 깊이 쉬고 ‘내 나라다’ ‘내 민족이다’ 결정했지요.”
―왜 한국을 택했습니까.
“열여덟 살 때 친구가 인도 시인이자 아시아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타고르(Tagore)의 책을 선물로 줬어요.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읽었는데 너무 좋아서 타고르의 책을 다 읽었어요. 그러다가 간디를 알게 됐고, 간디를 공부하다 부처님 알게 됐고, 부처님을 공부하다 극동 한·중·일을 알게 됐어요. 한국 가톨릭교회 역사와 김대건 신부님을 알게 됐고 한국으로 가야겠다 결심했어요.”
―점심이 아니라 저녁을 주는 이유가 있나요.
“1992년 성남 달동네에서 빈민 사목을, 1993년부터 급식을 했어요. 1998년부터 IMF로 많아진 노숙자들을 위한 급식소를 시작했죠. 점심을 주는 곳은 많으니 우리는 저녁을 하자 했죠.”
오후 3시, 안나의 집 맞은편 성남동성당 입구와 성당 안마당에는 이미 노숙자 수백 명이 길게 줄 서 있었다. 김하종 신부는 “안나의 집이 맛집으로 소문 나서 서울에서도 찾아온다”며 웃었다. 도시락은 푸짐하고 맛있어 보였다. 매일 오후 1시부터 김 신부와 직원 3명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도시락을 준비한다.
김 신부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인사를 거듭했다. “오늘 노숙인들에게 도시락 나눠드릴 수 있는 건 기적입니다. 원래 봉사자 세 분만 오시기로 약속됐거든요. 도시락 준비할 수 있을까 걱정했어요. 하지만 예정에 없던 분들이 돕겠다며 나타나셨어요. 놀라운 일이에요.”
도시락 550개가 성당 앞에 친 흰색 텐트 아래 놓였다. 음식이 남아 버리는 낭비를 막기 위해 도시락은 550개 준비하고, 빵과 달걀 등을 100인분 준비했다가 도시락이 떨어지면 오후 5시 30분까지 나눠준다. 토요일에는 일요일 먹을 것까지 도시락 2개를 준다. 화요일과 토요일에는 방역 마스크를 함께 준다.
노숙인들은 성당에 들어가기 전 체온을 확인한다. 고온 등 코로나 의심 증상이 있으면 입장하지 못하고 문밖에서 기다리면 도시락을 가져다 주고 “병원에 가보고 내일은 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는다.
김 신부는 성당 마당에서 배식을 기다리는 노숙인들 앞으로 갔다. 그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사랑합니다! 건강하세요!” 이렇게 외친 김 신부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김 신부는 성당 밖에 줄 선 노숙자들에게 가서 인사와 하트 만들기를 반복했다.
도시락을 나눠 주는 봉사자들은 노숙인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맛있게 드세요. 건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일부 노숙인도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세요”라고 화답했다.
―음식을 나눠 주면서 눈 맞추고 인사 나누는 이유가 있나요.
“코로나 이전에는 배식할 때 눈을 맞추며 하이파이브(손 들어 손바닥 마주치기)를 했어요. 요즘은 하이파이브 하면 위험해서 안 되지만. ‘당신, 나와 같은 인간이다. 당신이 불쌍해서 밥 주는 게 아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밥 준다’는 표현이에요. 한 심리학과 교수님이 ‘사람이 40일 못 먹어도 죽지 않지만, 나흘을 사랑과 인정 못 받으면 자살을 선택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어요. 인간에게는 음식보다 인정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길에서 마주치면 노숙인이라고 알지 못할 만큼 말끔한 분이 많아 놀랐습니다.
“'왜 멀쩡한 사람한테 밥을 나눠 주느냐'는 민원이 반복해서 들어와요. 노숙인들은 겉으로는 정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정신적·육체적·경제적·심리적 문제에 성격적 결함, 사회성 결여까지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어릴 때부터 학대와 방임으로 정서가 불안한 이가 대부분입니다. 겉모습이 아닌 마음으로 사람을 보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 신부는 “이것 좀 보라”며 휴대전화를 꺼내 화려한 색감의 그림이 끼워진 액자를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액자처럼 보이지만 종이 상자를 잘라 만든 거예요. 그림도 직접 그렸고요. 미술을 너무 잘하는 노숙인이 있어요. 기타를 너무 잘 치는 젊은 친구(노숙인)도 있고, 오르간을 치는 할아버지도 있고요. ‘책을 달라’는 노숙인도 있고요. 노숙인도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노숙인에 대한 편견, 나쁜 이미지를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도시락 배급이 문제 없이 끝나가자 김 신부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힘든 구간은 넘겼다고 보세요.
“이제부터가 더 힘들 것 같아요. 코로나가 가을이면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내년 봄, 여름까지는 간다잖아요. 모두 불안하고 지친 것 같아요. 직장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분도 늘고 있고요. 내일 도시락을 나눠 줄 수 있을지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예수님이 ‘하늘을 나는 새가 내일 먹을 걸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너희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오늘도 자원봉사자가 3명 예정돼 있었지만 22명으로 늘었잖아요. 어둠의 터널이 끝이 없을 것 같지만 분명히 끝이 있어요. 희망의 빛이 있다고 분명히 느낍니다.”
―무엇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가요.
“마음을 담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도와주시면 어려움이 있어도 넘어갈 수 있어요. 반대로 돈만 있으면 사람끼리 질투가 생기고 서로 싸워요.”
―신부님은 절망했을 때 뭐라고 기도하세요.
“저를 나쁘게 하려고 도둑질하고 횡령했다고 거짓된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있었어요. 그때 가장 힘들고 슬펐어요. ‘예수님,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기도하다가 ‘나, 바보야’ 깨달았어요. 사회생활 하면서 당연히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고 앞으로도 생길 거예요. 그 후로 기도 바뀌었어요. ‘예수님, 어려움이 생길 때 이겨낼 힘 주세요.’ 핵심은 ‘너’가 아니고 ‘나’예요. 내가 바뀌어야 된다, 이런 기도 했어요.”
내일 당장 노숙인 급식을 할 수 있을지 몰라 불안해하고 걱정하면서도, 매일매일이 놀랍고 경이롭고 기적이라는 김하종 신부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궁금했다.
―행복이 뭘까요.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면서 사랑하는 거예요. 행복은 값비싼 물건이나 아름다운 외모에 있지 않아요.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 안에서 찾아야 돼요.”
김하종 신부가 환하게 웃었다. 진짜 행복을 찾은 이의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