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사태가 닥친 1990년대 후반, 배우 변희봉(78)은 방송사 PD에게 “출연료를 깎자”는 전화를 받았다. 나이 많은 배우부터 출연료를 덜 받는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출연료를 많이 받는 편이 아니었던 변희봉은 PD에게 “당신이 언제 내 사례를 준 적 있냐. 왜 당신이 그런 얘기를 꺼내냐”고 쏘아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아내에게는 “나는 힘을 잃었다”고 말한 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 무렵 봉준호라는 한 신인 영화감독의 조연출에게 전화가 몇 번씩 왔다. 영화 출연 제의였다. 계속 거절하자 감독이 직접 전화했고, 그 성화를 못 이겨 변희봉은 봉 감독을 마포구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봉 감독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수사반장에서 나온 모습을 보고 좋아했다. 당신을 생각하며 쓴 역할이다”라고 했다. 변희봉은 결국 ‘플란다스의 개’에 출연했고 이 영화는 서울 관객 5만명을 동원하며 매우 처참한 흥행 성적을 올렸다. 이를 인연으로 봉 감독과 함께한 두 번째 작품 ‘살인의 추억’은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고, 세 번째 작품 ‘괴물’은 1300만 관객을 동원했다. 함께 한 네 번째 작품 ‘옥자’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 변희봉은 70이 넘어 레드카펫을 밟았다. 당시 그는 “고목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2020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훈장을 받은 변희봉을 만났다. 그는 봉준호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어릴 때부터 날 좋아했다는 그 말은 안 믿었다. 나는 당시 수사반장이 아니라 도둑, 사기꾼 같은 잡범을 주로 연기했는데 그걸 좋아했겠냐”고 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봉준호 감독에게 조연으로만 나온 변희봉을 정말 좋아했는지 물었다. 여기에 대한 답을 음성 메시지로 보낸 봉 감독은 “수사반장에서 보고 좋아하게 된 게 맞는다”고 했다.
“수사반장에서 사이비 종교의 ‘할레루야 교주’로 나왔을 때의 독특했던 몸동작과 표정, 목소리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강렬한 인상 때문에 팬이 됐고, 나중에 개성 있는 신 스틸러 역할로 계속 나오셨어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강한 개성이 있어요. 강렬한 눈빛과 폐부를 울리는 특유의 목소리, 공채 성우를 했을 만큼 목소리가 좋죠.”
70대 후반에 접어든 변희봉 입에서 더 이상 봉 감독이 말한 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말투가 가진 리듬은 남아있어서 라디오 드라마나 오디오북을 듣는 기분이었다.
–배우를 하기 이전에 성우로 먼저 활동했습니다. 원래 목소리가 좋은 편이었나 봅니다.
“제 목소리가 뭐… 평범하지 않은가요. 어릴 때부터 목소리가 컸을 뿐이고, 화난 사람처럼 들린다고도 해요. 초등학교 때 6·25전쟁이 나면서 집안에서 저를 다른 동네에 보내서 누이랑 둘이 지내게 했어요. 형이랑 제가 같이 죽을 수도 있으니 떨어뜨려 놓은 거죠. 많이 외로울 때였는데, 유일한 낙이 극장에 가는 거였죠. 한번 본 영화도 보고 또 보고. 나중에 서울 올라와서 친척 소개로 한 제약 회사에 다니며 숙직실에서 살았는데, 그때 라디오 드라마를 처음 들었어요. 이렇게 재밌는 게 있다니, 이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쫓아가다 보니 MBC 공채 2기 성우가 됐습니다. 사실은 배우를 하고 싶었던 거죠.”
–어떻게 배우로 넘어왔나요.
“고향(장성) 사투리가 남아 있어서 다들 성우를 할 수 없다고 했어요. 당시 라디오 국장이었던 차범석 선생님이 저를 연극에 출연시켰어요. 돈이 없어서 못 먹는 바람에 몸이 빼빼 말랐는데, 너무 야위어서 구부정한 자세로 무대에 서있기만 해도 관객들이 보고 웃었어요. 차 선생님 덕분에 연기랑 발성 공부를 하면서 연극 열 몇 편에 출연하고 나니 방송국에서 조연, 단역을 시켜줬죠. 수사반장에서 온갖 잡범을 다하다가 ‘집’이란 드라마에서 최불암씨 옆집에 사는 복덕방 영감을 했는데, 그때 제 연기를 보던 연출이 한마디 했죠. ‘묘한 놈이야.’”
–청년이었을 텐데 영감 역할을 맡나요.
“그때는 그럴 때였어요. 내가 가난해서 잘 못 먹었더니 살이 빠져서 나이가 들어 보였거든요. 시골에서 자란 촌놈이라 노인을 많이 봐서 노인 따라 하는 연기는 자신이 있었고요.”
–조연이라도 TV에 나오기 시작하면 경제 사정은 나아지지 않나요.
“그땐 잘나가는 배우 몇 명 빼고는 돈을 제대로 벌 수가 없었죠. 돈도 돈이지만, 얼마나 괄시를 받고 살았던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묻자 손을 내저으며) 그건 지금 입에 담을 수가 없어. 말을 할 수가 없어요.”
–6남매 중 막내아들인데 집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나 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는 다 면장 출신이라 집안은 먹고살만 했는데,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이 배우를 하겠다고 하니 난리도 아니었어요. 제가 고향에 내려가면 서울로 못 가게 하려고 혁대로 때리고 문을 밖에서 잠가놨을 정도였으니까요. 공부 잘하는 형은 대학을 잘 갔으니 저는 고향에서 집안 농사 관리하기를 바란 거죠. 한번은 급행열차를 타고 새벽에 고향 갔는데 아버지가 눈길 한번 안 주고 담배만 태우다가 ‘가라. 너는 이제 내 자식이 아니니까’라고 했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힘들기만 했으면 계속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역할이 점점 좋아져서 누구한테든 제가 하는 일을 얘기할 수 있는 수준은 됐죠. 이완용의 인력거꾼 역할을 하다가 이완용 역할을 했고, 흥선대원군의 머슴 연기를 하다가 흥선대원군 역할을 맡았으니까요.”
1980년대 변희봉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역할이 ‘조선왕조 500년-설중매 편’에 나온 ‘유자광’이었다. ‘이 손안에 있소이다’라는 대사가 유행어가 되자 그는 감기약 광고까지 찍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이전에도 다른 배우들이 같은 대사를 했지만, 대중은 변희봉이 하는 그 대사만 기억했다. 그의 목소리가 갖는 힘일 것이다.
–그때부터 살림이 피었겠네요.
“네. 서울 갈현동에 마음에 드는 집도 하나 장만하긴 했지만 다른 배우들처럼 돈을 벌진 못했어요. 나이트클럽 같은 데서 노래 한 곡씩만 불러도 한 달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고 저를 그렇게들 꼬셨는데 업소 출연을 절대 안 했거든요. 그때 잘나가던 동료 배우가 업소 출연을 하기 시작하면서 술을 많이 마시더니 아침 촬영에 취한 채로 술병까지 갖고 온 걸 봤거든요. 정이 뚝 떨어져서.”
–목소리가 좋으니 노래도 잘했겠습니다.
“노래 못해요. 악단 없는 곳에 가면 노래로 인기를 좀 끄는 정도? 하도 거절하다 보니 나중에는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어요. 그때는 업소가 다 그런 주먹이랑 연결이 됐으니까요. 이선희, 홍민 등등 당시 잘나가던 사람들과 미국 공연을 갔는데 그때도 술집에선 공연을 안 한다는 게 제 조건이었어요. 미국에서 마지막 공연 장소가 술집이길래 그건 안 하고 바로 귀국했어요.”
–고집이 센 편인가요.
“원래도 그랬는데 딸 셋을 키우면서 더 꼬장쟁이가 됐죠. 한번 안 된다, 안 한다고 마음먹은 것은 꼭 지키려고 해요. 예를 들어 저한테 ‘딴따라’라고 하는 사람과는 인연을 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떨어진 경험이 있는 데다가 나중에 무시당하고 힘들게 살아서 그런가, 가끔 제 안에 포악성이 있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좋은 역할을 하고 나서도 돈을 못 벌었던 것 같아요.”
변희봉이 기자를 만나자마자 한 첫마디가 “무슨 ‘변’을 쓰냐”는 것이었다. 인터뷰를 하다가 “아버지 성격이 어떠시냐”고 묻더니 “변씨들은 성격이 좀 그래요, 고집도 세고”라고 자답했다. 기자의 별명이 ‘변희봉’이라고 하자 그는 껄껄 웃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마다 변희봉이 맡은 역할 이름을 ‘희봉’이라고 썼다. 그 이유에 대해 봉 감독은 “희봉은 희봉이다. 다른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며 “언제나 그 역할 자체가 되기 위한 열정을 보여준다. 첫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 장짜리 대사가 있었는데, 그걸 촬영 들어가기 한두 달 전에 술술 다 외운 걸 보고 놀랐다”고 했다. 변희봉의 본명은 변인철이다.
–변희봉이란 이름이 특이합니다. 왜 이런 예명을 쓰나요.
“원래는 배우 하면서도 본명을 썼어요. 당시 김인철, 백인철 같은 배우가 있었는데 그들의 세금 고지서가 계속 제 앞으로 날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인 희봉으로 바꾼 거죠.”
–연기하기 전에 준비를 많이 하는 편인가요.
“책(대본)을 받으면 아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줘요. 제가 어릴 때 공부를 안 해서 그런가 직접 읽는 것보다 들을 때 더 이해가 잘됩니다. 머릿속으로 장면도 떠오르고요. 목욕물 받아놓고 욕조에 들어가 있으면 아내가 욕실 앞에서 읽어줄 때도 있었어요. 나중에는 길을 걷거나 산에 다니면서 대사를 외우고 연습을 하죠. 대사를 종이쪽지에 써서 주머니에 넣어 갖고 다녀요.”
–노력파라고 할 수 있네요.
“예전에 드라마에서 점쟁이 역할을 맡았는데, 그걸 연기하려고 별별 점쟁이를 다 찾아다녔어요. 그 생각만 하고 사는데, 꿈에 이승만 대통령이 나온 거예요. 이승만 대통령 유해가 하와이에서 오는 걸 방송사에서 생중계했을 때, 제가 그분의 생전 어록을 내레이션하는 역할을 했어요. 그 특유의 목소리와 말투를 제가 기가 막히게 따라 했거든요. 꿈에 나타났기에 점쟁이 역할을 그 목소리로 해봤더니 대박이 났죠. 점쟁이를 많이 만나고 다닌 데다가 제가 잘하는 성대모사까지 더했으니까요. 문제는 애들이 학교에서 그 흉내를 너무 많이 내는 바람에 문광부, 문교부 나중에 청와대가 방송국에 압력을 넣었고, 저는 드라마에서 바로 하차했어요.”
–지난해까지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60년 동안 연기를 한 셈입니다. 연기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연기할 때마다 ‘이건 제2의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그걸 계속해왔으니 그냥 제 인생살이가 된 거죠. 연기가 뭔지 답이 있으면 좀 알려줘요.”
–요즘 배우와 비교했을 때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나요.
“요즘엔 연기를 자유분방하게 해요. 우리 땐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게 있었는데 이젠 ‘맞으나 마나’인 것 같아요.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고 대사를 하는 거죠. 선배들이 지적해도 ‘들으나 마나’. 그들도 자기들의 ‘제2 인생’을 만들고 있다는 건 똑같죠.”
변희봉은 지난 몇 년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가 최근에 회복했다. 그는 “여기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면서 “코로나 사태 때문에 힘들어진 영화계 사정이 나아지면 계속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 못 해본 역할이 무엇인지 묻자 “멜로는커녕 여자와 다정히 대화하는 역할도 한번 못해봤다”고 했다.
“그게 뭐 크게 아쉬운 건 아니지만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는 거죠. 괜찮은 여배우와 그런 연기를 함께한다면 좋겠지만, 저 같은 촌놈이 그런 걸 할 수 있으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