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캐슬 그림

“엄마가 꼭 너 청아예고 보내줄게.”

현재 방영 중인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 속 오윤희(유진)는 딸과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한다. 이 드라마는 청아예고 입시를 둘러싼 학부모들의 치열한 경쟁을 다룬다. 지난해 초 종영된 JTBC ‘SKY캐슬’이 서울대 의대 입학을 향한 학부모들의 욕망을 담았다면, 이번엔 중학생으로 그 나이가 내려간 것이다.

현실은 어떨까. 지난달 23일 서울 서초구의 유아를 대상으로 한 영어 학원, 이른바 ‘영어 유치원’은 초 단위로 입학이 갈렸다. 해당 영어 유치원의 경우 입학금을 빨리 보낸 순서대로 입학이 확정된다. 워낙 보내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초 단위까지 따지는 것이다. 1초라도 돈을 더 빨리 보내기 위해서 해당 유치원과 같은 은행 계좌를 만드는 것은 기본. 학부모들은 모바일 계좌이체 시 지문 인식과 얼굴 인식 중 어떤 게 빠른지 비교하고, 가족과 지인을 총동원해 일단 중복이더라도 여러 건 송금을 해놓는다. 아는 은행 직원에게 해당 시간에 딱 맞춰 입금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현실의 입학 전쟁은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반 유치원에 갈지 영어 유치원에 갈지, 일반 유치원에 간다면 1·2·3 희망에는 어떤 유치원을 적을지. 11월의 영·유아 학부모는 고3 수험생처럼 고민에 빠진다. 생애 첫 입시(入試)도 이 시기에 이뤄진다. 2020년 대한민국 유치원 입학을 둘러싼 유치원판 펜트하우스, 여기 ‘유치원 캐슬’이 있다.

◇수학 잘하기 위해 영유 간다

사실 대한민국에 ‘영어 유치원’은 없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영유’는 유아교육법을 따르는 정식 유치원이 아니다. 유아를 대상으로 한 영어 학원으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원아 선발 역시 교육부 규정이 아닌 자체 내규에 따른다. 대다수의 영유는 입학금을 빨리 내는 순서에 따라 등록이 결정된다. 일부 유명 영어 유치원의 경우 1초 차이로 당락이 갈리기도 한다.

대치동에서 9세, 6세 두 아이를 키우는 박선영(39·가명)씨는 “10시 입금 기준이라고 했을 때, 9시 59분 59초에 입금해서 무효가 된 분도 봤다”며 “예전엔 (한국식 나이로) 5세 때부터 영유 가는 것도 빠르지 않느냐고 생각해서 대부분 6세부터 갔으나, 지금은 5세도 늦었다고 생각해 4세로 내려가는 추세”라고 했다.

최근에는 만 3세부터 시험을 보고 선발하는 곳도 많아졌다. 아이 생애 처음 맞이하는 입시다. 서울 강남의 G 어학원은 1차 영재 판별 테스트에서 상위 5% 안에 들고, 2차 레벨 테스트에서 영어 말하기·쓰기 등을 통과한 아이들에게 입학 자격을 준다. 만 3세의 경우 기초 회화, 알파벳 쓰기 등이 문제로 나온다. 일부 유아의 경우 이 시험을 대비해서 과외를 받기도 한다.

특히 아직 어린아이들은 그날의 기분이 결과에 영향을 많이 미치기 때문에 일부 학부모는 ‘낮잠 시간을 피하라’ ‘평소 못 먹게 했던 젤리나 사탕을 사주면서 기분 좋게 들어가서 시험 보게 하라’는 팁을 커뮤니티에 소개하기도 한다.

유아대상 영어학원 현황

시민단체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사걱세)이 지난달 14일 서울 지역 내 유아 대상 영어학원을 전수조사한 결과, 이 학원들의 월평균 학원비는 106만5000원으로 집계됐다. 1년을 다닌다고 가정하면 연간 1278만원을 내는 셈. 올해 4년제 대학의 연평균 등록금 672만원의 1.9배에 이른다. 수업비가 가장 비싼 학원은 월 224만원을 받았다. 서울 내 유아 영어학원 중 일반 유치원처럼 ‘반일제(하루 3시간 이상)’로 운영하는 곳은 288개로, 그중 84개(29.1%)가 강남·서초구에 집중돼 있었다. 이어 강동·송파구가 52개, 은평·서대문·마포구가 29개 순이었다.

사걱세 양신영 선임연구원은 "대부분의 영어 유치원은 영어만 사용하도록 하는데, 이 경우 아이들은 모국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 낮은 수준의 표현과 대화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며 “특히 이 시기 아이들의 경우 뇌과학적으로 감정적·정서적인 뇌가 발달하는 시기라서, 학습적으로 큰 효과를 가져오지 못할 수 있다. 학습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뇌가 발달하기 시작하고 추상적인 사고가 시작되는 만 7세 이후에 외국어 교육을 하는 게 효과 측면에서도 더 크다”고 했다.

학부모들은 비싼 학비와 높은 경쟁률에도 왜 영어 유치원에 보낼까.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6세 딸을 키우는 이나연(가명·37)씨는 “‘수학을 잘하기 위해서'라는 게 이 동네 엄마들의 생각”이라고 했다. “결국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수학에서 판가름이 난다고 보는 거죠. 초등학교 이전에 영어를 마스터해놓고 중학교부터는 수학에만 매진하기 위해 영유를 보낸다는 사람이 많아요.”

박씨는 “(일각의 편견과 달리) 영유 다닌다고 해서 아이들 성격이나 발달에 문제가 있거나 영어만 시키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영유를 다니는 아이라고 해서 독서나 국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요. 또 주관적일 수 있지만 우리 애나 주변을 봐도 굉장히 즐겁게 다니고 있고요. 일반 유치원 다니는 친구라고 해서 놀기만 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만3~5세 아이들의 유치원 지원을 위한 '처음 학교로' 홈페이지 첫 화면. /처음학교로 캡처

◇여전한 ‘로또 추첨식’ 유치원 선발

영어 유치원만 치열한 경쟁을 거치는 걸까. 일반 유치원에 보내기로 결정하더라도, 전장은 남아있다.

지난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 사립 유치원 입학 설명회. 미리 준비된 20여 개 의자에 학부모들이 가득 찼다. 이날 설명회는 코로나로 인해 사전 신청한 사람에 한해, 부모 중 한 명만 참석 가능했는데도 그랬다. 이 유치원은 이날 하루에만 이런 설명회를 5차례 가졌다.

국공립 유치원과 사립유치원 등 유치원의 99%는 교육부의 ‘처음 학교로’ 사이트를 통해 오는 16일부터 지원 신청을 받는다. 대학 입시처럼 1·2·3 희망 순위에 따라 유치원에 지원하면, 추첨을 통해 원아를 선발한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사는 신모(32)씨는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곳에 1 희망을 쓰고자, 유치원별 입학 설명회를 부지런히 다니면서 정보를 모으고 있다”며 “설명회 듣는 것도 경쟁률이 치열해서, 사전 접수 첫날 시작하자마자 전화를 걸어 설명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고 했다.

구기동 인근에는 아이들이 도보나 차량으로 10분 이내 갈 수 있는 유치원이 단 두 곳 있다. 그중 A 유치원의 내년도 만 4세 입학 정원은 총 2명. 인근 B 유치원의 경우에는 만 4세 남자아이 3명, 여자아이 2명만 입학이 가능하다. 학부모마다 최대 5~6자리를 놓고 극심한 눈치 보기를 해야 한다. 만약 3곳 모두 탈락할 경우 대기번호를 받고 빈자리를 기다려야 한다. 끝내 순번이 돌아오지 않을 경우 자리가 남아있는 다른 유치원을 다시 알아보거나, 학원이나 어린이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교육부는 ‘처음 학교로’ 도입 이후 유치원 서열화 등을 이유로 경쟁률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과거 인기 유치원의 경우 경쟁률이 61대1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미달인 유치원도 있다. 올해 교육부의 시도별·설립유형별 유치원 정원충족률 자료를 보면 서울 지역의 국공립 유치원 정원충족률(정원 대비 입학 유아 비율)은 81.7%, 사립은 85.1%였다. 인기 유치원과 반대로 일부 유치원은 정원을 채우지 못하면서 생긴 일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수도권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선호하는 유치원이 달라 편차가 크다"며 전국적으로 봤을 때는 강원도의 경우 정원충족률이 68.9%까지 떨어지는 등, 미달이라 문제인 곳도 있다”고 했다. 교육부는 “일부 인구 과밀 지역에서 유치원 입학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서도 “다만 정원 대비 아이들이 계속 주는 상황에서, 무작정 새 유치원을 늘리는 데는 여러 가지 부담이 있어 수요 조사를 통해 신중하게 결정하고 있다"고 했다.

온라인 쌍방향 강의 시스템인 '아웃스쿨'로 수업을 듣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 /아웃스쿨

◇30분 6000원 영어 수업···어린이 비대면 교육 인기

코로나는 우리 일상의 많은 것을 바꿨다. 교육도 그중 하나. 학생들의 등교가 중지됐고, ‘온라인 개학’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벌어졌다. 코로나 시대, 유치원도 달라질까.

서울 마포구에 사는 장모(35)씨의 일곱 살 아이는 지난 6월부터 캐나다, 미국, 멕시코 친구와 함께 수업을 듣는다. ‘아웃스쿨(outschool)’이라는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서다. 아웃스쿨은 강사들이 영상 강의를 통해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플랫폼이다. 미국의 한 벤처기업이 시작했는데, 지난 3월 중순 미국 내 대부분의 학교가 코로나로 문을 닫으면서 강의 수요가 폭발했다. 기존 동영상 강의와 달리, 실시간으로 수업이 진행된다는 점이 큰 장점. 강사가 오프라인 수업에서처럼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고, 피드백도 해준다. 나이에 맞는 다양한 수업을 직접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 강의료는 유아 제빵 수업의 경우 30분에 6000원 정도.

국내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미국 문센(문화센터)’으로 불리며 소문을 타고 있다. 백화점 문화센터는 영유아를 대상으로 다양한 수업을 진행해,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장씨는 “원래는 일주일에 1번 30분씩 5만원을 내고 원어민이 진행하는 놀이식 영어학원에 보냈다”며 “코로나로 인해 못 가게 되면서 아웃스쿨을 시작하게 됐는데, 저렴한 비용에 아이가 생각보다 잘 따라 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 외에 아이토키, VIPKID, 캠블리키즈 등도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이를 유아 대상 영어 학원(영어 유치원)에 보낸 이모(37)씨는 “코로나로 인해 두 달 정도 아이 유치원에서 화상으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부모 걱정과 달리 아이가 집중력 있게 잘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때와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를 느꼈다”며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온라인 수업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