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는 한때 환호 속에서 살았다. 그가 기타에 손을 얹으면 수천 명이 열광했고, 숙소 앞에는 항상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홀로 택배 상자를 포장하고, 카페에서 손님이 주문한 커피를 탄다. 밤 열두 시 넘어 퇴근하면 컴컴한 6평 원룸에 간신히 몸을 눕힌다.

지난 11일, 서울 연희동 한 카페에서 만난 노민혁(38)의 손은 의외로 고왔다. 그는 “한창 기타를 칠 때는 손가락 마디마다 관절염과 굳은살을 달고 살았는데, 몇 년 쉬었더니 다 나았다”고 했다.

‘클릭비' 활동 3년 후 찾아온 긴 방황. 노민혁(38)은 아홉 살에 처음 잡은 기타를 서른넷에 놓아버렸다. 음악 대신 그가 택한 건 창업. 2018년 강아지 영양제를 만드는 기업 ‘아워테리토리’를 만든 노씨는 “클릭비 시절만큼 바쁘게 살고 있다”고 했다. 지난 11일 직접 운영하는 반려동물 동반 카페 ‘미미에토’에 앉아 그가 웃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25년. 인생의 절반보다 많은 시간 동안 그의 왼쪽 어깨에는 기타가 들려 있었다. 아홉 살에 처음 기타를 멘 노민혁은 열일곱에 아이돌 밴드 ‘클릭비’의 기타리스트로 데뷔했다. 그가 속한 그룹은 음악 방송에서 1위를 할 정도로 성공했지만, 그는 인기가 한창이던 2002년 돌연 소속사를 나왔다. 이후 밴드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계속했지만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그의 손엔 지금 반려동물 헬스케어 기업 ‘아워테리토리’ 대표 명함이 들려 있다. 2018년 반려견 영양제를 만드는 스타트업을 창업한 그는 올해부터 반려동물 동반 카페도 운영 중이다. 왕년의 아이돌은 왜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게 됐을까.

◇ Track 1 : ‘준비된 스타’에서 ‘록의 배신자’로

노민혁은 열 살 때 이미 부산 지역 신문에 ‘국내 최연소 로커’라 소개됐고, 열두 살 때는 MBC ‘신(新)인간시대’에 기타 신동으로 출연했다. 부산 록의 성지라던 클럽 ‘메탈 라이브’에서 정기 공연도 했다. 초등학생으로서는 이례적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부산 지역 축제에서 공연하는 노민혁. '국내 최연소 로커'라는 플랜카드 문구가 눈에 띈다. /노민혁

-어릴 때부터 재능이 남달랐나 보군요.

“글쎄요. 전 ‘만들어진 천재’예요. 기타리스트 노민혁을 만든 건 우리 아버지였죠. 평범한 삶을 사셨던 아버지는 제가 어느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길 바라셨어요. 제겐 그게 음악이었던 거죠. 전 아홉 살 때부터 학교가 끝나자마자 기타 학원으로 달려가 길게는 여덟 시간씩 기타만 쳤어요. 아버지는 엄한 분이셨어요. 조금만 반항해도 손찌검하셨으니까요. 매일 두려움에 떨면서 기타를 쳤던 것 같아요.”

-클릭비에 들어간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나요.

“중3 때 아버지가 대성기획(현 DSP미디어)과 SM엔터테인먼트 오디션을 동시에 잡아오셨어요. 갑작스러운 일이었죠. 이후 대성에서 먼저 제안이 와서 ‘클릭비’에 합류하며 서울 생활을 시작했어요.”

1999년 데뷔한 클릭비는 2001년 ‘백전무패'로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노민혁은 “한창 바쁠 때는 스케줄 때문에 잠을 두 시간만 자는 날도 있었고, 팬들이 숙소로 들어와 속옷을 훔쳐가는 일도 많았다”고 했다.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만큼 논란도 많았다고요.

“부산에서 같이 공연하던 형들은 저를 ‘배신자’라고 불렀습니다. 메탈 음악을 하던 애가 텔레비전에 나와 댄스 음악에 춤을 추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당시 공중파 음악 방송은 모두 ‘핸드싱크(녹음된 음원을 틀어놓고 악기를 연주하는 척하는 것)’였어요. 이 때문에 실력 논란도 있었죠.”

'원조 아이돌 밴드' 클릭비 시절의 노민혁(맨 왼쪽). /DSP미디어

-기타 녹음도 직접 못 하고 세션에 맡겼다면서요.

“당시 아이돌 업계 분위기가 그랬어요. ‘녹음실에 박혀 있을 시간에 잡지 한 번 더 나가고, 행사 한 번 더 뛰라’는 거죠. 밤늦게까지 방송 녹화를 하다 보면 잠도 차에서 자는데, 녹음실 갈 시간이 어디 있어요.”

-음원을 직접 프로듀싱하기도 하는 요즘 아이돌과는 많이 다르군요.

“제대로 된 육성 체계가 서기 전이니까요. 당시 멤버들은 쉴새없는 스케줄에 치여 자기 주장을 할 여유가 없었어요. 다 짜인 무대에 올라가 보여주기하는 배우였죠. 저희가 할 수 있던 거라곤 자작곡 몇 곡을 앨범에 넣는 정도였어요.”

-인기는 많았어도 행복하긴 어려웠겠군요.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와 갈등을 겪어 더 힘들었어요. 아버지는 제가 클릭비의 메인 보컬로 데뷔하는 줄 알고 계셨는데, 연습 중 다른 멤버가 메인 보컬이 됐거든요. 아버지가 화를 낼까 봐 데뷔하는 날까지 말 못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방송을 타자마자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셨어요. ‘내가 쟤들 뒤에서 기타나 치라고 너를 키웠냐’면서 ‘당장 나가라’고 회사 앞까지 찾아오셨죠. 소속사에서는 저를 계속 묶어두려 했고요. 그 사이에서 한참 괴로워하다 결국 2002년 클릭비를 나왔어요. 그때가 스무 살이었습니다.”

◇ Track 2 : 좌절, 홀로 서기 그리고 또 좌절

클릭비 탈퇴 직후, 그는 6년간 자취를 감췄다. 가끔 다른 뮤지션의 음원에 세션으로 참여한 이력을 빼면 공개 활동도 거의 없었다. 노민혁은 이 시기를 ‘암울한 기억’이라고 했다.

-남들은 갓 대학 입학할 나이에 혼자가 됐습니다.

“그때 저는 돈도, 계획도 없었어요. 음악은 계속하고 싶은데 불러주는 곳이 없었죠. 오버(상업 음악)에서는 ‘한물 간 아이돌’, 언더(인디 음악)에서는 ‘방송 나가 춤이나 추던 애’···. 원룸 구할 돈도 없어서 아는 형이 운영하던 복싱 체육관 안 쪽방에 자리 잡고 생활했어요. 낮에는 미친 듯이 운동하면서 울분을 풀고, 밤에는 술만 마셨어요.”

-그래도 나름대로 인기 많은 아이돌이었는데,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니요.

“제가 미성년자 때 데뷔했잖아요. 정산금은 모두 부모님 통장으로 들어갔어요. 클릭비를 나왔을 당시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부모님께 돈을 달라고 할 처지가 못 됐어요. 수년 동안 친구들 집을 전전했죠.”

‘연예계를 떠난 1세대 아이돌들은 어떤 길을 택했느냐’는 질문에 노민혁은 말을 아꼈다. 그와 초·중학교 동창이었고, 같은 해 클릭비에서 탈퇴했던 멤버 하현곤(38)은 대학 진학을 택했다. 하씨는 “지금이야 연기, 유튜브 등 진로가 다양하지만 당시는 회사도, 멤버들도 은퇴 후 어떤 일을 할지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됐던 주변 아이돌 상당수는 그간 못 했던 공부를 하려고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HOT 장우혁, NRG 문성훈 등 상당수는 개인 사업과 방송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태사자 출신 김형준은 평소 ‘쿠팡 플렉서’로 일하며 택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불미스러운 일로 논란을 겪은 경우도 있다. SES 슈는 해외에서 수억원대 원정 도박을 한 혐의로 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젝스키스 강성훈은 사기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다 2심에서 감형돼 출소했다. 노민혁은 “각자 삶의 방식이 워낙 천차만별이라 ‘아이돌 출신은 이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2008년 밴드 ‘애쉬그레이’로 다시 음악 생활을 시작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제 음악을 하기로 맘 먹었어요. 그런데 저희를 세워주는 무대가 한 군데도 없었어요. 기획사들은 ‘음악은 좋은데, 보컬을 잘생긴 애로 바꾸라’고 하면서 퇴짜를 놨죠. 그래서 결국 선택한 게 거리 공연이에요. 요즘에야 거리 공연하는 버스커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버스킹이란 말 자체가 없었어요. 저희는 어떻게든 노래를 하고 싶으니 신촌, 강남, 압구정, 인사동 심지어 지하철에서도 ‘생목'으로 공연을 했어요. 이후 고정 팬이 생기면서 홍대 클럽에서 공연도 꽤나 했지만, 끝까지 음악으로 큰돈을 벌진 못했어요.”

밴드 '애쉬그레이' 시절, 지하철 버스킹을 하면 노민혁씨(오른쪽). /노민혁

노민혁에게 다시 한번 시련이 찾아온 건 2013년이었다. 그해, 아버지는 간암 투병 중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노씨는 이 시기를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했다.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요.

“수척해진 아버지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병원비 낼 처지가 안 되는 제 모습이 너무 초라했어요. 항암 치료 한 번에 수백만원씩 깨지는데, 당시 제겐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그때까지 전 ‘내 음악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남들 다 하던 레슨 생각도 안 했거든요. 그게 철없는 자존심이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내 가족을 내가 못 지키는데, 여태 무엇 때문에 음악을 했나 싶었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상심이 컸겠습니다.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날, 집에서 병원까지 택시비가 아까워 택시를 못 잡았어요. 병원비 생각에 제 정신이 아니었던 거예요. 버스에서 내려 병실 앞까지 미친 듯이 뛰었는데, 결국 5분 늦어 임종을 못 봤어요. 그게 평생 한이에요. 그때 ‘어머니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제가 서른하나였는데, 딱 서른다섯까지만 음악을 해보고 돈을 못 벌면 깔끔하게 그만두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4년, 정말 빨리 가더군요(웃음).”

아버지가 간암 투병 중이던 2013년 6월, 노민혁이 목동야구장에서 시구 행사를 마친 뒤 아버지를 업고 경기장을 돌고 있다. 아버지는 그해 11월 별세했다. /조선일보 DB

◇ Track 3 : 기타를 내려놓고 책임감을 메다

노민혁은 서른다섯을 앞둔 2016년 겨울 결국 부산으로 돌아왔다. 서울에 짐을 푼 지 18년 만이었다. “서울을 떠나는 날, 이삿짐 차 부를 돈도 없어 친구 카니발에 짐을 실었어요. 트렁크가 반밖에 차지 않더군요. 깜깜한 새벽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는데, 그 어둑한 풍경이 내 인생과 너무 닮아있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 달 간 고민 끝에 그의 발은 해운대 1인 창조기업센터에 닿았다. “창업을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까요?” 대책 없는 그의 말에 담당자는 고개를 저었다. 기획서를 쓰고 퇴짜를 맞기 수십 번. 2년간 공부를 거쳐 그는 2018년 반려동물 영양제를 만드는 ‘아워테리토리’를 창업한다. 창업 3 년차인 올해 회사 매출은 연 1억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 그래도 지난 13일 농림축산식품부 등이 주최하는 ’2020 대한민국 반려동물 문화 대상'에서 스타트업 부문 대상을 받는 등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다고 했다.

-왜 반려견 영양제였나요.

“사실 연예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만만한 사업은 화장품 사업과 요식업이에요. 문제는 둘 다 제가 관심 없는 분야였다는 데 있죠(웃음). 비록 돈을 벌러 부산에 내려왔지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진 않았어요. 전 평생 강아지를 키우면서 살았기 때문에 강아지 건강에 관심이 많아요. 지금 키우는 반려견 ‘은비’는 유기견 출신인데, 에디슨병(부신 기능 저하증)을 앓아 10년째 치료를 받고 있어요. 당시만 해도 국내 반려동물 영양제 산업은 걸음마 단계였어요. ‘내가 직접 영양제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었죠.”

-‘홍보만 연예인이 하고,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법도 한데요.

“아니요, 아워테리토리는 사실상 1인 기업이에요. 영양제 제품 개발은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인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등과 협업했고 이외 샘플 제작, 판로 개척, 마케팅, 택배품 포장 등 모든 일을 저 혼자 다 하고 있어요.”

노민혁은 매일 아침 홀로 사무실에 나가 전날 주문받은 반려견 영양제를 포장한다. ‘왜 반려견 영양제 사업에 뛰어들었냐‘는 질문에 그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강아지를 키우며 살아왔기 때문에 강아지 건강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겠군요.

“처음엔 ‘OEM’ ‘B2B’ 같은 기초적인 단어도 몰랐어요. 그래서 중소벤처기업부가 운영하는 ‘K-스타트업’ 홈페이지에서 밤낮으로 공부했어요. 창업과 관련된 온갖 강연은 다 따라다녔죠. 각종 정부 지원 사업도 모두 신청했어요. 수십 번 탈락 끝에 먼저 신용보증기금에서 1억원 대출이 나왔고, 최근에는 중소벤처기업부 수출 바우처 사업에도 선정됐어요. 그 덕에 작년 2월 첫 영양제 ‘펫테리토리’를 출시했고, 올 5월에는 애견 카페도 차렸죠. 잘 찾아보면 자잘한 정부 지원 사업이 정말 많아요. 홈페이지 번역 지원 사업, 홍보 동영상 제작 지원 사업···. 이런 걸 잘 활용하면 혼자서도 창업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음악에 실패해 귀향한 지 2년 반, 노민혁은 작년 4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사업체 대표로서였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는 질문에 그는 스케줄을 줄줄 읊었다. 아침마다 회사 사무실로 출근해 전날 주문받은 택배 상자를 포장하고, 일주일에 나흘은 밤 열 시까지 카페를 운영한다. 나머지 사흘도 외부 업체 미팅, 서류 작업 등을 하느라 쉬는 날이 없다고 했다. 그는 “단시간에 성공할 수 없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천천히 신뢰를 쌓으면서 사업을 확장하겠다”고 했다.

-클릭비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사업에도 도움이 되나요.

“아직 저를 기억해주는 팬들이 있다는 게 고맙죠. 지난 8월에는 클릭비 데뷔 21주년 전시전을 제 카페에서 열었어요. 제가 클릭비에서 탈퇴한 지 18년이 지난 지금도 저를 찾아와 주시는 팬들이 계세요. 가족 말고 저를 막연히 응원해줄 사람이 있다는 건 남들이 쉽게 경험하지 못할 일이잖아요.”

-요즘도 기타를 치나요.

“가끔 지인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를 때 말고는, 아니요. 지금은 사업에 집중할 때니까요. 예전엔 내 음악이 팬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말을 들으면 가장 행복했어요. 이제 ‘당신이 만든 영양제를 먹고 내 반려견이 건강해졌다’는 후기를 보면 기분 좋아요. 비록 기타는 내려놨지만, 내 삶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