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 누구나 한 번쯤 유튜버(유튜브용 영상 제작자)를 꿈꾸는 세상이다. 유치원생부터 운전기사, 요리사, 변호사, 정치인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유튜브에서 백가쟁명을 벌인다. 그중에서도 ‘스펙’만 놓고 보면 단연 최고급으로 보이는 신인 유튜버가 있다.
윤순봉(64) 전 삼성서울병원 사장 얘기다. 윤 전 사장은 1979년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해 그룹 비서실에서 고(故) 이병철 전 회장과 고(故) 이건희 전 회장을 보좌하며 경력을 쌓았다. 이후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실장, 삼성그룹 브랜드전략 부사장을 거쳐 2009년부터 삼성석유화학 사장, 삼성서울병원 지원총괄 사장을 역임한 뒤 작년 7월, 39년 8개월 동안 일한 삼성을 떠났다.
한국에서 성공한 은퇴자의 삶은 대동소이하다. 사외 이사나 고문 같은 명예직을 맡거나 등산, 여행 등 소일거리를 찾는 식이다. 윤 전 사장은 조금 다른 길을 택했다. 지난 1월부터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윤순봉의 서재’) 본격 유튜버 활동에 나섰다. 10개월간 올린 영상 콘텐츠만 243건. 주말을 제외하면 거의 하루에 하나꼴로 만들어 올린 셈이다. 다루는 내용도 만만찮다. 코로나 방역 대책이나 미국 대선 같은 현안부터 인공지능, 복잡계 이론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분량도 짧게는 3~5분짜리도 있지만, 보통 20~30분 길이의 대작(大作)이다. 은퇴 후 소일거리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성실(?)해 보였다. 이 대한민국 최고 스펙 유튜버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지난 18일 서울 청담동에 있는 개인 사무실에서 윤 전 사장을 만났다. 문을 열자 힙합 음악이 흘러나왔다. 10~20대가 즐겨보는 힙합 경연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래퍼 원슈타인의 노래였다. 윤 전 사장은 “시즌 1부터 ‘쇼미더머니’를 모두 챙겨 본 열혈 시청자”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삼성그룹 사장 출신인데 유튜버 세상에 뛰어든 게 이례적입니다.
“처음부터 유튜버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삼성에서 일하며 개인적으로 축적한 연구 자료나 데이터가 20만 페이지 정도 됩니다. 그걸 인터넷에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서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나눌 생각이었죠. 그 작업을 하던 중에 코로나 사태가 터졌습니다. 제가 2015년 삼성서울병원 사장으로 일할 때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터졌습니다. 그때 삼성서울병원이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메르스 최전선에 있으면서 제 나름대로 배운 게 있어요. 그 지식을 공유해서 미력이나마 코로나 사태 극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의미 있겠다 싶어 방법을 찾다가 유튜브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어떤 점에서 본인의 지식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코로나 사태 초기에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이 너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에 대한 입국 금지 조처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 사실보다 이념에 기반한 주장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관련 논문도 찾아보고, 방역 전문가들 이야기도 취재해서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제 경험만으로는 한계가 있거든요. 그렇게 만든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반응이 괜찮았어요.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거죠.”
-영상 제작은 혼자 하시는 건가요.
“도와주는 스태프가 있습니다. 신송희 ‘프로'라고, 영상 제작을 도맡는 젊은 친구인데 사실 그 친구가 다 만들죠. 저는 거들 뿐입니다(실제로는 영상 구성 및 편집 작업은 신 프로가 하지만, 콘텐츠에 들어가는 자료 조사부터 내용 구성은 모두 윤 전 사장이 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었다).”
-유튜브 영상을 보니 좀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일단 글자가 너무 많았고(웃음). 보통 유튜브엔 본인이 직접 출연하는데, 사장님은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목소리 출연만 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유튜브 시작하면서 정한 원칙이 동영상에 제 얼굴을 집어넣지 않겠단 거였습니다(웃음). 얼굴 팔겠다고 시작한 게 아니거든요. 사실 유튜브에서도 유튜버 얼굴이 나오면 클릭 수도 휠씬 많이 나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직 유튜브 계정 등록도 안 했어요. 등록을 해야 광고 수익도 들어온다고 하더라고요. 돈 벌려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일종의 사회 공헌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공헌 활동치곤 너무 많은 공을 들인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어떤 동영상을 보니 참조한 논문만 10여 편이고, 외신도 많이 인용하더군요.
“중요한 건 팩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이념이나 정파적 관점 때문에 사실마저 왜곡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기 의견과 다른 상대방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마냥 비난하면서 조회 수를 올리는 영상도 많고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팩트를 기반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병철 회장님 밑에서 하드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배운 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하드 트레이닝이었습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5 WHY’입니다. 이병철 회장님 특유의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제가 ‘보험 시장은 상황이 어렵습니다’ 하고 보고하면 회장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왜 어렵지?’ 거기에 제가 ‘이러저러해서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하죠. 그러면 또 질문이 날아옵니다. ‘왜 그렇지?’ 이런 식으로 문답이 5번만 계속되면 결국 근본적 문제에 닿게 됩니다. 그렇게 몇 년 치른 트레이닝이 제 인생의 근본이 됐습니다.”
윤 전 사장이 말하는 팩트는 단편적 사실을 나열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정보를 종합적 시각에서 조망하는 것이다. 지난 9월 공공 의대 신설과 의사 정원 확대 논쟁이 한창일 때 윤 전 사장이 올린 ‘현재 우리나라는 의사가 부족한가'라는 영상이 좋은 예다. 당시 공공 의대 신설을 찬성하는 쪽에선 ‘한국의 의사 숫자는 OECD 평균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을 주요 근거로 내세웠다. 영상에서 윤 전 사장은 “OECD 통계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다른 자료까지 찾아봐야 진실이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IMF, WHO 통계까지 뒤져서 한국에선 의사 한 사람이 진료하는 환자 숫자가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숫자는 적어도 의사 1인당 진료 환자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보면 한국 사람들은 다른 OECD 국가보다 훨씬 더 쉽게 의사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유튜브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선 논쟁을 할 때 자기 입맛에 맞는 근거만 골라서 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논쟁이 산으로 갑니다. 입장 차이와 상관없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팩트를 찾는 게 우선이란 걸 알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사장님처럼 훈련도 많이 받고,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만 유튜브에서 좋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단 얘기로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삼성석유화학에서 일할 때 송유관이 부식되거나 막힌 곳을 기가 막히게 찾는 현장 직원이 있었어요. 그분은 망치로 파이프 여기저기 두들겨서 소리만 듣고도 기가 막히게 문제가 된 부분을 찾았습니다. 단순히 지식만 있는 게 아니라 몇 십 년의 경험이 있으니 가능한 능력이죠. 수십 년간 일한 사람들은 저마다 그런 암묵지(暗默知)가 있습니다. 저는 그걸 지혜라고 부릅니다. 누구나 자기 일에 충실했던 사람이라면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 지혜가 사장(死藏)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의 직업인이 가진 지혜가 최고조에 달하는 나이에 은퇴를 하는 게 현실입니다. 송유관 전문가들이 반강제로 은퇴한 뒤에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업합니다. 그런 곳에선 자신이 쌓은 지혜를 써먹을 수조차 없어요. 저처럼 혜택 받은 사람도 유튜브 안 했으면 아마 술자리 같은 데서 ‘썰’이나 풀다가 꼰대 소리 듣거나 ‘라떼는 말이야’ 이야기 그만하란 구박이나 받았겠죠. 그렇게 허공으로 사라지는 지혜가 너무 많습니다.”
-사장님 같은 경륜을 가진 분들이 은퇴 후에 책을 쓰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출판 권유도 많이 받으셨을 텐데요.
“은퇴하고 나니 주변에서 많이 듣는 얘기 중 하나가 ‘책 안 내세요'라는 겁니다. 물론 책을 내는 것도 의미가 있죠. 하지만 지금 출판 환경에선 소설이나 자기 계발서가 아닌 이상 아무리 잘 팔아봐야 수천 부가 고작입니다. 수천 부를 팔아도 그중에서 책을 다 읽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어요. 하지만 유튜브에서는 구독자가 1만명만 넘어도 영상 하나당 조회 수가 수천씩 나옵니다. 지혜를 공유한다는 점에선 책보단 영상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지혜를 영상으로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특히 온갖 자극적 콘텐츠가 득세하는 지금 유튜브 환경에서는요.
“저도 압니다. 남을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콘텐츠가 주목받죠. 그런 자극적인 콘텐츠에 끌리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저까지 거기 올라타고 싶진 않아요. 지금 인기를 끄는 자극적 콘텐츠 중에 1년 뒤에도 꺼내 보고 싶은 게 얼마나 있을 거 같습니까? 전 10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보고 참고할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싶어요. 비유하자면, 곰탕을 끓인다는 생각으로 만듭니다. 여러 재료를 푹 끓여서 깊은 맛을 내는 곰탕은 허기질 때마다 생각나죠. 제가 수집한 다양한 지식들을 푹 우려내서, 영혼이 허기질 때마다 보고 싶어지는 콘텐츠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그게 바로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몇몇 동영상은 너무 길고 설명조 같기도 했습니다. 20~30대 반응은 어떻습니까.
“동영상을 만들면 제일 먼저 자식들에게 보여주는데, ‘꼰대’ 같대요(웃음). 너무 길고 가르치려 든다는 거죠.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도 압니다. 유튜브에서 히트 치는 동영상을 만드는 건 쉽습니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반대로 가고 싶습니다. 1년 뒤든, 10년 뒤든 언제 봐도 영감을 얻을 수 있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스테디셀러’가 목표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윤 전 사장은 종종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때마다 본인이 ‘작업복’처럼 입는다는 카디건의 오른쪽 소매에 크게 난 구멍이 눈에 띄었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니 책상에 닿는 부분이 닳아 버린 자국이었다. 그 옷소매 구멍이, 윤 전 사장의 진심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