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고맙습니다.”
지난달 28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트윈스와 한화이글스 간 정규시즌 홈 마지막 경기. 경기 직전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60대 남성이 서울 잠실야구장 마운드에 올랐다. 홈플레이트에 있는 LG트윈스 유지현(49) 감독(당시 수석코치)을 향해 공을 힘껏 던지자, 2020시즌 LG 트윈스 최고참 선수인 박용택(41)씨가 나와서 그를 안았다.
강영훈(63)씨는 LG트윈스 구단 버스 기사다. 1989년 LG 트윈스의 전신인 MBC 청룡 시절부터 야구 선수들을 경기장으로 실어날랐다. 그 기간 거쳐 간 감독(대행 포함)만 13명이다. 강씨가 32년 만에 운전대를 내려놓게 되자, 구단은 2020년 정규 리그 마지막 홈경기에 그를 시구(始球)자로 정했다.
현재 한국프로야구 10팀은 대부분 팀당 4명씩, 모두 40여 명의 버스 기사가 있다. 강씨는 이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다. 물론 경력도 가장 길다. 각 구단에 따르면 우리나라 프로야구 버스 기사의 평균 재직 기간은 보통 15~20년 정도다. 그런데 그는 평균을 한참이나 넘긴 32년 동안 한 팀 버스만을 몰았다. 지난 17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강씨를 만났다.
◇'아버지'라 불린 버스 기사
LG트윈스 선수들은 강씨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박용택씨는 “컨디션 안 좋을 때 쉬는 것을 권유하실 정도로 인생의 멘토 같은 편안한 분이라 선수들이 그렇게 부른다”고 말했다. 1997년에 입단한 이병규(47) 코치도 “버스 기사시지만, 선수들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평소 자기관리도 철저하게 했기 때문에 32년간 한 직장에 계길 수 있었던 거 같다”고 했다.
-32년간 사고를 한 번도 안 냈나요.
“아뇨. 작은 사고는 3~4번 정도 났어요. ‘LG트윈스’라는 마크가 새겨진 버스를 보면 끼어드는 승용차가 꽤 많습니다. 쓸데없이 앞질러서 브레이크 밟거나, 깜빡이도 켜지 않고 들어오는 식이죠. 특히 자기가 응원하는 프로야구팀 스티커가 붙은 차량도 있어요. 우리 팀 선수들을 피곤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이겠죠. 그래도 그냥 양보할 수밖에 없어요. 구단 버스는 첫째도 둘째도 선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사고들은 모두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보도됐다면 팬들이 걱정 많이 했겠죠.”
-어떻게 버스 기사가 됐나요.
“제 어릴 적, 1960년대 버스는 운전사 오른편에 차 엔진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위에 엉덩이를 대고 올라가면 따뜻해서 참 기분이 좋았죠. 기사 아저씨들이 저에게 ‘너는 커서 뭐 되고 싶니’라고 물으면, ‘버스 운전사요'라고 답했던 기억이 있어요. 20대 초중반에 저는 술 마시고 사람을 때리는 등 사고를 좀 쳤습니다. 제 부모님께서 저에게 ‘중장비 면허를 따서 돈을 벌어라’며 돈을 주셨어요. 그 돈으로 면허시험을 준비하라는 거죠. 그런데 제가 술 마시고 노는 데 돈을 쓰다 보니, 도저히 중장비 면허 학원비 등을 감당할 돈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중장비보다는 저렴하게 딸 수 있는 버스 면허를 따게 된 겁니다. 어릴 적 제 기억을 떠올려보면 직업에 대해서는 소원을 푼 거죠.”
-그래도 프로야구단 버스 기사가 되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요.
“하루는 신문을 보는데, 자동차학원이 대형버스 운전면허 강사를 뽑는다는 광고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곧바로 지원해서 자동차학원 강사가 됐습니다. 최대한 핸들을 덜 꺾고 버스 주차하는 방법 등을 연구해서 가르쳤어요.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방송중계차가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는데요, 그러자 정부가 방송중계차 기사들은 모두 대형버스 운전면허를 따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어요. 그렇게 수강생이 불어났고, 제가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났어요. 강원도 태백이나 속초, 경남 합천, 전북 군산 등에서도 저한테 배우려고 사람들이 왔어요. 한날은 제 친척 가운데 MBC 수송부에서 일하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MBC 운전사가 돼 보지 않겠느냐고 권했죠. MBC 셔틀버스도 운전했고, MBC 관리감독기구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님 운전사도 했어요. 그러다가 1989년에는 MBC청룡 버스를 몰게됐습니다. 다음해 MBC청룡이 LG로 넘어가면서 LG트윈스 버스기사가 돼 32년을 하게 됐죠.””
-야구단 버스 기사의 매력은 뭔가요.
“중요한 경기나 LG그룹 행사에 버스를 운전해 갑니다. 그러면 돌아가신 구본무 LG그룹 회장님 같은 그룹 최고위 간부님들도 뵙는 기회가 있어요. 마중을 나가서 인사드리면 ‘나 때문에 고생이 많습니다’라고 따뜻하게 한마디 해주십니다. 버스 기사님들 다 열심히 일하시지만, 야구단 버스 기사를 하면 자부심이 생깁니다. 화려함 같은 게 느껴지죠. 내가 모는 버스 안에 연봉 수십억원이 넘는 선수도 타잖아요. 그 자산이 어마어마합니다. 또 관중이 저를 알아봐 주는 것도 좋죠. 그러다 보니 공인(公人)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남들한테 손가락질받는 행동을 하지 않았어요. 어린 시절 사고를 친 뒤, 지금까지 물의 일으키지 않고 살아온 거 같아요. 32년 동안 돈을 보고 직장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는 있었지만, 꾸준히 자부심 갖고 일할 수 있는 이 직업이 좋았어요.”
-프로야구 기사로 살아남은 비결이 있다면.
“프로야구 버스 기사는 단순히 버스 기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늘 선수의 심기를 읽고 선수들을 위해 뭘 하나라도 더 해줄까 고민해야 합니다. 시합이 끝나 무거운 야구 장비를 차에 실어야 할 때면 제가 나서서 옮겼습니다. 사실 가방 싣는 것은 제 임무는 아니죠. 그런데 하루는 선수가 옷핀에 찔려서 피가 나는 것을 봤어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만약 짐을 싣다가 다치더라도 선수가 아닌 제가 다치는 게 낫습니다. 저는 붕대를 감고 운전하면 되지만, 선수가 다치면 시합을 못 뛰잖아요.”
◇“우승하고 한턱내고 싶었는데”
강씨는 선수들이 경기하는 동안, 버스에서 TV를 통해 경기를 본다. 각 방송사 야구 해설위원들이 특정 선수에게 조언하면 그것을 받아 적는다. 경기가 끝나고, 버스에 올라타면 그에게 그 말을 전달해 준다. 그 때문에 제3의 코치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32년간 야구 선수들을 봤으니, 야구 많이 알겠네요.
“아뇨. 다만 현장에서 보고 있으면 생각나는 건 있죠. 타격 코치님들께 건방진 얘기지만, 과거 두산 포수 양의지나, SK 포수 조인성 같은 선수 보면 투수에게 바깥쪽 공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타자들은 당연히 타석에서 좀더 안으로 들어와서 타격하는 게 유리하죠. 그런데 일부 타자는 멀찍이 원래 자리에 서서, 상대 투수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실투(失投)만 기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좀 더 타석 안쪽에 들어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언했어요. 또 어떤 선수는 주야장천 공을 당겨칩니다. 그럴 때면 선수들에게 ‘야 너는 몸쪽이 강하다고 상대 투수가 아는데, 몸쪽으로 던져주겠나. 밀어칠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나. 허구한 날 당겨치니까 안타가 안 나오잖아’라고요.”
-그러면 선수들은 뭐라고 하나요.
“웃으면서 그러죠. ‘아버지가 타격코치 하세요’라고요. 저는 그냥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조언해요. 그래도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늘 얘기합니다. 너희는 ‘프로’라고요. 같은 팀에서 같은 유니폼을 입은 동료도, 심하게 말하면 적이라고 합니다. 쟤를 이기고 넘어서야 네가 올라간다고요. 투수들에게는 그랬습니다. ‘평범하게 볼넷으로 내보내느니 차라리 맞춰서 내보내는 게 낫다’고요. 물론 그렇게 하면 안 되지만, 그만큼 좀 치열하게, 야구가 직업이라는 생각으로 덤비라고 했습니다. 라이벌 두산 선수들 보면 악착같이 하는 게 보이잖아요. 두산 오재원이나 롯데 손아섭 같은 선수 보면 눈매가 매섭잖아요. 그런데 냉정하게 말해 과거 우리 LG트윈스에는 그런 게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배가 불러서, 배고픔을 모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죠. ‘도련님’들이 야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거죠. 그래도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트레이드되거나 2군으로 내려가는 선수들이 버스에서 안 보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예전에 LG에 있다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된 일부 선수가 운동장에서 저를 만나면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아이고 아버지, 저 좀 다시 불러주세요’라고. 다시 LG로 오고 싶다고 팀에 말 좀 해달라는 거죠. 그러면 제가 ‘야 버스 기사인 내가 무슨 힘이 있냐. 있을 때 좀 잘하지’라고 해요. 또 1군 벤치에서 대기하다 대타로 나가 삼진 당하면 2군으로 내려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2군 가려고 짐 싸는 모습을 보이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대신 악착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남들이 10바퀴를 뛰면, 20바퀴를 뛰라고요.”
-LG트윈스가 26년 동안 우승하지 못했습니다.
“팔구회(八球會)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10구단 버스 기사 40여 명이 회원인데요, 8팀으로 프로야구가 운영되던 시절인 1990년대 만들어져서 팔구회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매년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가려지고, 한 해 모든 행사가 끝나면 12월쯤 이 모임에서 회식하는데, 회식비를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한 구단이 냅니다. 그런데 LG는 한 번도 못 냈어요. LG가 마지막 우승한 게 1994년인데, 그때는 팔구회가 없었어요. 언젠가 우리도 우승해서 한턱 쏘겠지라고 했는데, 결국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은퇴하네요. 삼성이나 두산, SK가 거의 돌아가면서 냈죠. 우승도 돌아가며 해야 야구 발전이 있는데, 아쉽네요.”
◇원정팬에게 주먹맞아 안대쓰기도
1986년 10월22일, 대구시민운동장에서 한국시리즈 3차전, 원정팀 해태타이거즈가 역전승을 거두자 흥분한 2000여 명의 대구 관중들은 해태타이거즈 구단 버스를 파손하며 불을 질렀다. 바로 며칠 전, 광주 해태팬의 삼성 선수 폭행으로 시비가 일었던 시절이다. 이처럼 구단 버스기사들은 자동차 사고 외에도, 일부 야구팬으로부터 폭행당할 수 있는 위험에도 노출돼 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나요.
“1990년대 후반쯤인데요, 한 지방에 원정을 갔는데, LG가 이겼습니다. 그러자 상대팀 관중 몇 명이 우리 버스 밑으로 들어가고, 버스 백미러를 뒤로 제껴버렸습니다. 제가 백미러를 원위치 시키려고 했는데, 팬 한명이 저 눈을 정면으로 때리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소위 눈탱이가 반탱이가 돼서 안대를 찼습니다. 운전하는데 길이 이중으로 보이더라고요. LG가 잘 하던 시절, 상대팀 팬 가운데 한명은 하도 LG에게 진다면서 자기 팀이 이길 수 있도록 직접 돼지머리와 떡을 갖고 왔습니다. 그것을 못하게 하려고 막았는데, 그 분이 가져온 박스 안에는 커다란 식칼을 들고, 쓰레기통을 치면서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생명 위협을 많이 느꼈죠.”
-32년 동안 가장 안타깝던 기억이 있나요.
“2002년 11월에 있었던 한국시리즈입니다. 삼성라이온즈를 꺾고 우승을 할 줄 알았어요. 당시 6차전에서 8회까지 9대6으로 삼성에 앞서고 있었죠. 그때 저는 최종전인 7차전을 간다고 좋아라 하고 대구 시민운동장 바깥에 버스 시동을 켜놓고, 있었어요. 날이 너무 추워서 선수들이 버스에 들어오면 곧바로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싶었죠. 그런데 9회에 삼성 이승엽·마해영 선수가 홈런을 치고 역전이 되면서 우승하지 못했어요. 볼·스트라이크 판정하던 심판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죠. 정말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그날 돌아오는 버스 안은 정말 침묵만 흘렀습니다. 당시 감독이던 김성근 감독님도 한말씀도 안하셨어요. 뒤늦게 들었는데, 저희가 묵던 숙소에서 그날 삼성이 축하연을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말이 맞다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꽤 나빴습니다.”
-요즘 프로야구선수들과 예전 선수들을 보면 느끼는 차이는 뭔가요.
“옛날 선수들에 비해 직업 의식이 좀 부족한 거 같습니다. 물론 프로는 ‘돈’이 중요하지만, 너무 돈에만 집착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매년 연봉 협상할 때를 보면, 자기실력에 비해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저는 될 수 잇으면 연봉 갖고, 너무 싸우지 마라고 말해줍니다. 구단도 살림살이가 있는데, 자꾸 구단을 적으로 만들면 안된다고요. 적이 되면 ‘에이 이 친구는 연봉싸움만 한다’는 이미지가 심어집니다. 그러다보면 괜히 트레이드 되기도 하죠.”
-내가 한번 지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나요.
“훌륭한 지도자가 많은데, 그렇게 하면 월권이죠. 다만 꿈은 가질 수 있죠. 옛날 유럽에서는 트레이너가 감독했다고 하던데요, 많은 감독님을 보다 보면 ‘아, 나도 야구감독 해봤으면 좋겠다’ 하는 꿈은 있었죠.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그래도 언론이 가만히 있겠어요. 유명 선수가 아니라 프런트에서 일하는 사람이 감독 됐다고, 언론이 그렇게 비판하는데요. 운전사가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