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휠체어를 타야 할 겁니다.”
1998년 대구에서 택시를 잡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고 하루 반나절 만에 깨어난 청년에게 의사가 말했다. 배꼽 아래로는 돌덩이처럼 감각이 없었다. 하반신 완전 마비. 날벼락 같은 불행이 닥쳤을 때 김병욱(46·지체장애 1급)씨는 스물네 살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KAIST 기계공학과 공경철(39) 교수는 어릴 적부터 로봇을 만드는 게 꿈이었다. 보행 장애가 있는 친구와 가깝게 지내며 자연스럽게 의공학(醫工學)에 끌렸다. 2015년 하지 마비 장애인이 입을 수 있는 웨어러블(wearable) 로봇을 개발했지만 실제로 착용하고 성능을 검증해줄 자원자가 필요했다. 두 남자는 그렇게 만났다.
11월 중순 열린 국제 재활 로봇 올림픽 ‘사이배슬론 2020’에서 김병욱씨가 한국에 첫 금메달을 안겼다. 공 교수가 개발한 ‘워크온 슈트4’를 입고 착용형 외골격 로봇 종목에 출전한 그는 “가자!”는 우렁찬 기합으로 출발해 계단 오르내리기, 지그재그 걷기 등 6가지 임무를 3분 47초 만에 마쳤다. 8국 참가자 12명 중 가장 빨랐다. 사이배슬론(Cybathlon)은 인조인간을 뜻하는 ‘사이보그’와 경기를 의미하는 ‘애슬론’의 합성어. 장애인들이 보조 로봇을 활용해 겨루는 대회로 4년마다 열린다. 사이보그 올림픽, 아이언맨 올림픽이라고도 한다.
서울 성수역 근처 엔젤로보틱스에는 웨어러블 로봇이 즐비했다. SF 영화 속 사무 공간 같았다. ‘로봇으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공유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비전이 벽에 적혀 있었다. 김병욱씨는 공 교수가 2017년 초 창업한 이 회사에서 책임 연구원으로 일한다. 그는 “뺑소니 사고 후 휠체어를 탈 땐 ‘나는 왜 이렇게 불운한가’ 하며 하늘을 원망했지만 로봇을 만나고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가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겐 ‘희망’이다.
◇로봇을 입고 일어서다
22년 전 김병욱씨는 하반신 마비 판정보다 돈이 더 무서웠다. 광부이던 아버지는 폐광으로 실직 상태였다. “병원비 1억원을 감당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했다.
-당시 직업이 있었나요.
“제가 덤프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때였어요. (테니스 선수 출신으로 들었다고 하자) 어릴 적부터 육상, 탁구, 테니스 등 운동을 잘했고 군대도 테니스병으로 다녀왔습니다. 처음부터 구급대원들이 옮겼다면 마비가 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을 들었어요.”
-병원비도 그렇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겠습니다.
“남편은 직장을 잃고 아들은 크게 다쳤으니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저는 철이 없어 몹쓸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없어지는 게 낫겠다.’ 병원에서 극단적 시도를 몇 번 했는데 하늘이 살렸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어요.”
-뭐라고 하셨나요.
“네 얼굴을 볼 수 있고 너를 만질 수 있고 네게 맛있는 걸 해줄 수 있다면 엄마는 족하다. 평생 휠체어를 타도 괜찮으니 제발 딴 생각 좀 하지 마라. 그냥 옆에만 있어줘도 엄마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다···. 그날 무릎 꿇은 어머니를 보고 ‘아, 이래 살면 안 되겠다’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라디오 ‘여성시대’에 그 사연을 보냈더니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그 뒤로는 좌절 안 하고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재활도 힘들었을 텐데요.
“어머니가 추진력이 강해요. 손을 못 쓰는 사람들이 운전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하는 TV 다큐멘터리를 보시곤 국립재활원으로 저를 데려갔어요. 재활하는 동안 기술을 익혀 귀금속 세공 자격증을 땄습니다. 직장을 구했고 결혼도 했어요. 제가 경북공고에선 용접을 배웠고 미싱도 잘해요. 장애인들에게 휠체어와 시트를 맞춤형으로 만들어주는 작은 공방을 차렸습니다. 소아마비 같은 경우는 두 다리 길이가 다르고 골반이 틀어지는데 방석으로 다 커버할 수 있어요.”
-공경철 교수는 어떻게 만났나요.
“2015년 초였습니다. 이듬해 10월 스위스에서 열릴 사이배슬론 1회 대회에 로봇을 착용하고 출전할 선수를 모집한다는 거예요. 자격 요건 중 하나가 하반신 완전 마비였습니다.”
-그때 첫인상은.
“교수가 왜 이렇게 젊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웃음). 개발 중인 로봇을 보여줬는데 믿고 싶으면서도 솔직히 의심했어요. 저것이 과연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로봇을 입고 처음 일어선 순간은 어땠습니까.
“2016년 초였는데 공포와 흥분이 뒤범벅된 날로 기억합니다. 로봇을 입고 1~2초 만에 일어섰는데 현기증이 왔어요. 18년 동안 휠체어에 앉아만 있었으니까요. ‘이러다 넘어지면 어떡하나’ 싶고 무서웠습니다. 한 걸음도 못 떼고 10초도 안 돼 ‘나 그냥 앉을래요’ 소리가 절로 나왔지요. 하지만 점차 적응됐어요.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웠는데 뜨거운 게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아침에 거울을 보니 얼굴에 하얀 눈물 자국이 보였어요. 나한테 온 이 행운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구원자
공경철 교수에게도 그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세브란스 재활병원 나동욱 교수와 2014년부터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장애인을 물색했다. 조건이 까다로웠다. 하반신 완전 마비라야 하고 성격이 적극적이어야 하고 시간이 많아야 하는데 김병욱씨는 부합했다.
-김병욱씨 첫인상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이 강렬했어요. 장애인은 제가 모르는 상처가 있고 어떤 편견과 싸워 온 분들이잖아요. ‘내가 절대 실망시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 김병욱씨는 걷고자 하는 욕망과 파이팅이 좋았어요. 일주일에 사흘을 연습에 몰두할 만큼 웨어러블 로봇을 개척해보겠다는 의지가 강했지요.”
-로봇을 처음 입힌 날 기억하나요.
“일어나는 것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중심을 잡기가 어려우니까요. 오랫동안 휠체어 생활을 한 사람은 ‘눈높이가 달라지는 게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그 공포를 이겨내셨어요.”
-과학이 인간을 배신하는 일도 가끔 일어나는데.
“저희가 넘어야 할 첫 번째 허들이 그것이었습니다. 작동하지 않는 신체 조직을 교체할 수 있는 줄기세포 연구가 어떤 희망 고문을 줬잖아요. 가수 강원래도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기사도 나왔고.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또 ‘웨어러블 로봇 분야는 사업성도 투자가치도 없다’는 강한 선입견과 싸워야 했습니다. 1회 사이배슬론 대회를 준비할 땐 정부에서 지원을 한 푼도 못 받았어요.”
-2016년 1회 대회에선 동메달을 땄지요.
“저희는 기술과 가능성을 증명하러 그 대회에 나간 거예요. 맨 땅에 신용 대출까지 받았으니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겠지요. 뭐라도 얻어와야 했는데 김병욱씨가 저를 살렸어요.”
-서로 상대를 구원자처럼 말하는군요.
“로봇을 만든다 한들 유능한 파일럿(조종사)이 없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김병욱씨는 로봇을 입어 보곤 ‘이건 좋은데 저건 나쁘다’는 피드백을 엄청 쏟아냈어요. 곧장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그 선순환도 저희 연구팀이 누린 행운이에요.”
-지난 4년은 큰 시련 없이 순탄했나요.
“은막 뒤의 공허라는 표현 있잖아요. 1회 대회를 마치고 제가 절감했습니다. ‘작은 성공은 이뤘는데 앞으론 어떡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어요. 그만하고 평범한 교수로 돌아갈까, 웨어러블 로봇 상용화에만 집중할까, 병행한다면 과연 체력적으로 버틸 수 있을까···. 제가 흔들리고 있을 때 김병욱씨가 붙잡았습니다.”
-어떻게요?
“어느 맥줏집에 연구원들이 다 모인 자리였어요. 고민을 털어놓고 ‘여러분이 원한다면 내가 큰일을 벌여보겠는데 진짜 자신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다른 연구원들은 주저했는데 김병욱씨가 특유의 에너지로 말했습니다. ‘지금 이 로봇을 기다리는 장애인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이 엔젤로보틱스 창업을 결심한 계기가 됐어요. 돌아보면 제가 김병욱씨를 이끌고 세계 1위까지 온 게 아녜요. 집념이 강한 그가 엔진 역할을 하고 저는 따라온 셈입니다.”
-창업은 큰 자본이 필요했을 텐데요.
“1회 대회 때 받은 동메달로 저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어요. 웨어러블 로봇이 SF 영화가 아니라 곧 현실이 될 수 있다고들 생각한 거예요. 과거에는 만나기도 어려웠는데 산업부 공무원이 제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LG전자는 ‘의미도 있고 기술력도 좋다’며 20억원을 기꺼이 투자했어요. 1회 대회 땐 로봇 한 대(워크온 슈트1) 만들어 참가했는데 이번 대회까지는 계속 업그레이드하며 기술을 대부분 국산화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원 없이 했습니다. 저희에겐 오늘이 있게 한 밑천이 된 거예요.”
◇다음 도전은 상용화
공경철 교수팀은 이번 사이배슬론에서 김병욱씨가 금메달, 이주현(20·이화여대)씨가 동메달을 수확했다. ‘워크온 슈트4’는 무게가 27㎏이고 시속 2.6㎞로 걸을 수 있다. 허리 부분에 있는 배터리로 최장 3시간 구동한다. 지팡이에 있는 조작 버튼으로 앉기·걷기·오르기 등 모드를 선택할 수 있고 센서가 힘과 무게중심을 감지해 개인 특성에 맞게 보행한다. 김병욱씨에게 물었다.
-로봇과 한 몸이 돼 바라보는 세상은 저희가 보는 세상과는 다를 것 같습니다만.
“하지 마비 장애인에게 기동성으로 보면 휠체어가 나아요. 하지만 ‘위쪽 공기’를 마시면서 걷는 한 걸음, 자신이 파일럿이 돼 의지대로 오르는 한 계단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비장애인과 같은 눈높이로 대화할 수도 있고요(그는 휠체어에선 ‘아래쪽 공기’만 마셨는데 로봇 덕에 경험한 ‘위쪽 공기’는 훨씬 맑더라고 뼈 있는 농담을 했다).”
-어떤 생각으로 이 일을 하나요.
“제가 1호라는 사명감이 있어요. 마비 환자나 장애인, 노인보다 먼저 로봇을 타면서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합니다. 개발자이면서 장애인 대표, 최초의 소비자인 셈이에요. 제 테스트가 안 끝나면 아무도 안 태웁니다. 이렇게 특별한 기회를 잡았으니 이 일에 인생을 걸었어요.”
-방금 ‘로봇을 탄다’고 표현했는데 웨어러블 로봇은 입는 겁니까 타는 겁니까.
“아, 저도 잘 안 쓰는 말인데 무심결에 튀어나왔네요. 운전과 비슷한 측면이 있어서 그렇습니다.”(김병욱)
“그 표현이 사람마다 달라요. 이 지팡이가 자동차에 있는 기어 같은 기능을 해요. 웨어러블 로봇이 일상 속으로 들어가 옷처럼 입을 수 있으려면 아직 할 일이 많아요. 가방처럼 들고 다니기 편하게 더 가벼워져야 하고 입는 것도 더 간편해져야죠.”(공경철)
-공 교수에게 이 로봇 기술의 가장 큰 희망이라면.
“오늘은 제가 렌즈를 꼈지만 여기 있는 저희 셋 다 안경을 쓰네요. 안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각장애인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김병욱씨는 22년 전에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보행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닌 세상이 오고 있어요. 그 희망이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완전 마비 환자를 위한 웨어러블 로봇 몇 개는 의료 기기 인증을 받아서 이미 병원에 들어가 있습니다.”
-회사 홈페이지에 ‘기적’이라는 단어가 있더군요.
“저 같은 장애인들은 걷는 즐거움을 잊고 살았어요. 웨어러블 로봇이 그 꿈을 현실로 바꿔줬으니 기적이지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같은 높이에서 같은 속도로 세 시간 산책할 수 있게 됐습니다.”
-대회 현장에 어머니도 오셨나요.
“어머니는 ‘위험하다’며 오랫동안 이 일을 반대했어요. 하지 마비 장애인은 뼈가 약해 넘어지면 쉽게 부러집니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 사태로 세계 33지역에서 대회를 따로 진행하고 경기 영상을 스위스에 보내는 방식으로 순위를 매겼어요. 덕분에 어머니가 관중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어느 임무를 수행하면서 ‘엄마, 보고 있나?’ 크게 외쳤어요. 엄마가 응답했습니다. ‘보고 있지! 우리 아들 잘한다!’ 로봇을 입은 아들을 실물로는 처음 보신 날이었어요.”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던 어머니와는 어떤 말을 주고받았나요.
“엄마는 계속 울기만 했어요. ‘좋은 일만 있을 건데 왜 자꾸 울어?’ 제가 물었더니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연구실 밖의 장애인들이 이 로봇을 사용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요.
“뭔가를 개발하는 단계는 거의 끝났어요. 상용화로 가는 길은 저희가 확보한 기술 중에 무엇을 빼 가격을 낮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100세 시대라지만 건강 수명이 100세는 아녜요. 마지막 20~30년은 누구나 보행 장애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면 가장 적극적인 해법이 웨어러블 로봇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부가 더 관심을 기울이고 로봇을 바라보는 시선, 충전소 등 인프라가 좋아지면 상용화는 2~3년 뒤로 앞당길 수 있어요.”(공경철)
겁쟁이들은 시작조차 않고, 약자들은 끝까지 해내는 법이 없으며, 승자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명대사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던 김병욱씨는 이제 “행운 부자가 된 기분”이라고 말한다. 오늘도 그는 로봇을 입고 성큼성큼 걷고 있다. ‘엄마, 보고 있나?’를 외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