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차개는 안됩니다.”
세후 소득 월 550만원, 자산 0원이라는 30세 신혼부부가 경제 유튜버 강환국(37)씨에게 40세에 은퇴가 가능한지 물었다. 강씨는 요즘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2030세대에게 인기가 높은 유튜버. 구독자 5만명을 보유하고 있으며, ‘할 수 있다! 퀀트 투자’ 등의 경제 금융서를 썼다. 신혼부부에게 강씨가 내놓은 답은 이렇다. 부부가 월 150만원씩만 쓰고, 월급의 70% 이상을 저축하면 10년 안에 은퇴가 가능하다. 단, ‘애차개’는 안 된다. “아이와 자동차와 개, 즉 ‘애차개’가 있으면 월급 70%를 저축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강씨의 설명. 그는 “조기 은퇴를 하려면 최대한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야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살면서 어느 부분에 돈을 가장 많이 쓰는지 보니 애·차·개였다”고 했다.
‘가늘고 길게’가겠다던 다짐은 요즘 2030세대에겐 옛말이 됐다. 요즘 이들은 30세 신혼부부처럼 어떻게 하면 빨리 은퇴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른바 ‘파이어족’이다. 파이어(FIRE)는 ‘경제적 자유와 조기 퇴직(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첫 글자를 따 만든 말. 199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확산했으며 최근에는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국내에도 지난해 네이버에 ‘파이어족 카페’가 생겼다.
이들은 일반적 은퇴 나이인 50~60대가 아니라, 30대 후반이나 늦어도 40대 초반 은퇴를 목표로 삼는다. 이를 위해 소비를 줄이고 수입의 70~80% 이상을 저축하는 등 극단적 절약을 선택한다. 부업·이직 등으로 최대한 소득을 늘리고, 현명하게 투자하는 것도 이들의 실천 지침 중 하나. 은퇴 가능 목표액은 자신의 평소 생활비와 투자 수익률 등을 고려해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다.
◇ 나를 스스로 해고한다
패션 브랜드 매장을 운영했던 신현정(44)·영주(43) 자매는 4년 전 자신들을 스스로 해고했다. 신영주씨는 “서비스업이다 보니 인격 모욕 등 고객한테서 오는 스트레스가 정말 컸다”며 “‘돈 때문에 해야만 하는, 하기 싫은 일에서 은퇴하자'는 생각에 언니와 함께 파이어족을 준비했다”고 했다. 두 사람의 목표 금액은 자산 5억원.
이를 위해 자매는 크게 4가지를 끊었다. 집, 차, 비싼 취미, 해외여행. 자매는 집을 사는 대신 방 둘짜리 월세에 살았다. 당시 다른 매장의 점장은 대부분 외제차를 탔는데도, 자매는 대중교통을 고수했다. 최소 1년에 2~3회씩 가던 해외여행, 겨울철마다 가던 스키장도 끊었다. 미용실도 가지 않고, 앞머리 등은 직접 다듬었다. 업무 특성상 1회 10만원 상당인 네일 아트를 주기적으로 시술받아야 했는데, 고민 끝에 직접 기계를 사서 자매가 서로 해줬다. 가방, 옷 등의 쇼핑도 크게 줄였다.
동생 신씨는 “명품 가방과 내가 회사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바꿀 걸 생각하면 결코 물건이 중요하지 않았다”며 “본인의 지출을 큰 순서대로 써보고 위부터 네댓 가지를 끊으면 눈에 띄게 지출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자매는 30대 후반에 목표한 자산 5억원을 모으는 데 성공했고, 은퇴했다. 지난해부터는 자신들의 파이어 경험담을 담은 유튜브 ‘대퐈마’를 운영하고 있다. 스스로 해고했다(fire myself)는 뜻을 담았다. 최근엔 ‘파이어족의 재테크’라는 책도 냈다.
직업을 유튜버나 작가로 바꾼 건 아닐까. 동생 신씨는 “돈을 벌 목적이었다면 유튜브도 훨씬 더 자극적으로 했을 것”이라며 “이걸 해야 먹고살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했다.
공기업에 다니는 허준(31)씨는 신씨 자매 같은 파이어족을 꿈꾸는 ‘예비 파이어족’이다. 그의 목표는 마흔 살까지 15억원을 모아 은퇴하는 것. 허씨는 “평생 돈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나가는 삶을 살기는 싫다”며 “최대한 빨리 경제적 자유를 얻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허씨는 ‘소비 다이어트’와 ‘스리잡'도 마다하지 않는다. 유튜브와 블로그에 글을 쓰면 광고 수익을 받는 애드포스트를 운영하고, 좌담회 참석 등 단기 알바도 뛴다. 현재 관리비, 휴대전화 요금 등을 제외하고 허씨가 한 달에 쓰는 생활비는 40만원. 애·차·개는 없다. 허씨는 “공연이 보고 싶을 때는 지자체나 기업이 여는 무료 공연을 노리고, 쉬는 날에도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다”고 했다. 그는 회사 근처 4평짜리 원룸에서 전세로 산다. 전세 보증금은 서울시 청년 임차보증금 지원을 받아 1% 이자를 내고 빌렸다.
6년 차 직장인 이모(30)씨도 35세까지 3억원을 모아 은퇴하는 게 목표다. 이씨는 “해외 영업부라 출장과 야근이 잦아 언제까지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며 “올해부터 파이어족을 목표로 직장 생활 외에 번역 아르바이트, 블로그 운영 등을 한다”고 했다. 이씨는 “블로그 광고 수익 등 회사에 다니지 않더라도 얻을 수 있는 수익 모델을 함께 만들고 있기 때문에 (은퇴를 위한) 현금 자산은 적게 잡았다”고 했다.
그는 휴대전화는 알뜰폰의 최저 요금제로 바꿨고, 커피도 사 마시지 않는다. 타고 다니는 차는 ‘모닝 밴’. 뒷자리가 없는 소형차로, 중고로 500만원에 샀다. 이씨는 “모닝 밴은 경차인 만큼 세금도 저렴하고 기름 값도 거의 들지 않는다”고 했다.
◇ 파이어, 정말 가능할까?
그렇다면 실제 얼마를 모아야 파이어족이 될 수 있을까. 1999년 미국 트리니티대학 경제학과 교수 3명이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투자금(은퇴 자금)을 주식 100%나 주식 75%·채권 25%에 넣어두고 매년 4%만 인출했더니 30년 동안 은퇴 자금이 고갈되지 않을 확률이 98% 이상이었다. 4%를 찾는 것에는 해마다 물가 상승률도 반영했다.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돈이 다 사라졌거나, 다시 회사로 가야 할 상황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트리니티 연구대로라면,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 30년 동안 매년 4%씩 찾아 쓰고 싶다고 가정할 때 예상 연간 경비의 25배를 모으면 된다. 이를 근거로 미국인들은 매년 필요한 생활비를 4만달러(약 4400만원)로 잡고, 100만달러(약 11억원)를 목표 금액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명지대 최창규 경제학과 교수는 “기대 수명이 많이 늘어난 점이 변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실제 ‘the poor swiss’라는 개인이 트리니티 교수진의 연구와 같은 가정 아래, 기간을 30년에서 50년으로 늘렸더니 망하지 않을 확률이 80%대로 떨어졌다.
강환국씨는 “트리니티 연구는 국민연금은 물론 은퇴 후 한 푼도 벌지 않는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기간을 늘리거나 매년 자산의 5%를 빼 써도 자산이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본다”며 “지난 50년간 자산을 주식·채권·금·현금에 25%씩 배분했을 때 연평균 수익률은 8.8%였다. 생활비도 은퇴하고 나면 사회생활을 할 때보다 훨씬 적게 쓸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신현정씨도 “절대적 금액보다는 개인의 생활비나 투자 성향 등을 따져야 한다”고 했다. 신씨 자매는 종잣돈에 자신의 평균 투자 수익률을 곱했을 때 최소 생계비보다 크거나 같으면 파이어족이 될 기본 조건을 갖췄다고 본다. 만약 연간 생활비가 3000만원이고 자신의 평균 투자 수익률이 5%라면 최소 6억원을 모으면 파이어족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미국에선 원래 자산을 모으기 수월한 고학력·고소득자들이 결국 파이어족이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나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투자를 해서 투자 수익률을 같이 따지면, 고소득자가 아니더라도 상대적으로 적은 종잣돈으로 파이어족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신씨 자매는 미국 기준으로 따졌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5억원으로 은퇴했지만, 부동산과 주식 투자를 통해 현재는 자산을 오히려 10억원 이상으로 불렸다.
숙명여대 서용구 경영학부 교수는 “지금 한국은 어차피 45세에서 50세에 정년을 맞이하고 있다”며 “파이어족은 결단력이 강하고 자기 절제가 가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 준비 없이 은퇴를 맞이한 사람들보다 미래에 대한 위험성이 더 적을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최 교수는 “파이어족이 되기 위해 2030이 지나치게 투자에만 몰두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며 “주식을 통해 돈 버는 데만 익숙해지고, 생산적인 곳에는 사람이 안 몰리면 결국 나라가 망한다. 투자를 하더라도 건전한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지금 젊은 세대는 마치 복권 사는 것처럼 투자를 대해 걱정스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