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김기덕(60)씨가 11일(현지 시각) 체류 중이던 라트비아의 병원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악화돼 숨졌다고 한국 외교부가 확인했다.
주(駐)라트비아 한국 대사관은 “11일 새벽 1시 30분 수도 리가의 스트라딘스 대학병원에서 코로나 양성 확진을 받고 입원 중 사망했다”고 밝혔다.
(12월 12일 자 A1면)
김 감독은 지난 2004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감독상), 2011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 2012년 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는 등 유럽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수상했다. 2018년 ‘미투’로 더 이상 한국에서 영화 작업이 어려워진 그는 해외로 나갔다. 영화를 연출하면서 배우들에게 성희롱, 강제 추행 등 성폭력을 행사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김 감독은 왜 자신을 인정해준 서유럽이 아니라 구(舊) 소련이었던 라트비아에 가 있었던 걸까?
김 감독은 30대에 프랑스로 건너가 3년간 유랑 생활을 했다. 서유럽에서의 생활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러시아를 비롯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라트비아 등 구 소련으로 간 것은 그의 인기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구 소련에서는 김 감독을 ‘거장 감독’으로 대우하며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김 감독은 미투가 터진 뒤 카자흐스탄에 갔다가 바로 키르기스스탄으로 건너갔다. 키르기스스탄에선 현지 영화평론가인 굴바라 톨로무쇼바씨가 그에게 숙소와 생활비를 제공했다.
그 후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 최소 영화 두 편을 연출했다. 영화 제작비는 모두 카자흐스탄 정부와 영화계에서 지원했다. 국내 영화제 관계자는 “카자흐스탄에서 만든 영화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영화제에서 상영됐지만 작품이 좋진 않아서 유명 국제영화제에는 출품되지 못했다. 국내에선 여론 때문에 영화제 상영을 피하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카자흐스탄을 떠난 뒤엔 러시아로 건너갔고, 지난해엔 제41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러시아에서 에스토니아로 간 뒤, 최근 라트비아로 옮겼다.
2003년 나온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그의 팬이 늘긴 했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아니었다. 예술 영화 관객의 일부에 가까웠다. 러시아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였는데, 반응은 훨씬 더 뜨거웠다. ‘러시아 문학 강의’의 저자 이현우(필명 로쟈) 문학평론가는 “2004년 김기덕 감독은 러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이었다. 대중과 평단이 모두 높이 평가했고, TV에선 그의 영화를 연속 방영했다. 김기덕 영화제도 열렸고, 박사학위 논문도 여러 편 나왔다”고 했다. 당시 러시아에선 김 감독이 라스 폰 트리에, 왕카이웨이(王凱韋), 허우샤오셴(侯孝賢) 등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 감독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평론가 톨로무쇼바씨는 “‘수취인 불명’(2001)이 TV로 방영됐을 때 영화가 선정적이란 이유로 이 지역 한인들은 창피해했다. 구 소련권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다”라고 했다.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톨로무쇼바씨에게 구 소련권 국가의 영화계와 관객들이 김기덕 감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김 감독은 구 소련권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인기를 얻었다”며 “영화계에 친구도 매우 많다”고 했다. 그의 영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에 대해선 “(경제적·사회적으로) 어려웠지만 낭만적(romantic)이었던 90년대를 상기시킨다”며 “그 낭만이란 건 엄혹한 낭만(tough romance)이다”라고 설명했다. 이현우 평론가는 “러시아에서는 김 감독이 추방자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며 “극단적인 걸 선호하는 러시아의 대중적인 정서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폭력과 부조리를 많이 다루는 러시아 예술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이 비슷한 성향의 김 감독 영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크다.
주라트비아 한국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내가 아는 한 러시아 영화 감독은 김 감독의 영화가 러시아인의 사고 방식과 정서를 너무나 흡사하게 반영한다고 했다. 그의 영화철학이 러시아인의 심성을 자극한다. 김기덕의 전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라고 했다.
이 지역에 김 감독의 미투 사건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톨로무쇼바씨는 “김 감독의 미투 사건은 대중, 관객은 모르고, 영화계 사람들만 알고 있을 것이다. 폭행에 대해선 5000달러의 벌금을 냈고, 성폭력 혐의는 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안 나왔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라트비아의 휴양도시 유르말라에서 정착할 계획이었다. 이미 집을 샀고, 영주권을 얻으려고 하던 중 사망한 것이다. 톨로무쇼바씨는 “12월 21일부터 25일까지 키르기스스탄에서 김기덕 감독의 회고전이 열릴 예정인데 이제는 추모전이 돼버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