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 주천면의 밤뒤마을과 미다리마을을 잇는 ‘판운리 섶다리’는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만나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설경이 특히 아름답다. /이신영 영상미디어기자

조선 6대 왕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열일곱의 나이에 유배 길에 올랐다. 강원도 영월 청령포는 어소(御所)가 자리했던 곳. 동·남·북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는 험준한 암벽이 가로막혀 섬 같다.

시끄러운 세상과 거리를 두어서일까. 단종 유배지였던 영월은 코로나 속 한적한 소도시 여행지를 찾는 이들에게 ‘언택트 여행지’로 주목 받고 있다. 이름하여 ‘셀프 유배지’. 스스로 거리 두며 유배 간 듯 한적하게 여행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젊은 층이 발길하면서 구석구석 숨은 매력이 재발견되고 있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를 오가는 배. 섬 아닌 섬 같은 청령포는 한파에 서강이 꽁꽁 얼면 걸어가볼 수도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소나무가 지키는 유배지, 청령포 숲

한겨울 청령포는 적막했다. 주변을 수놓았던 꽃과 풀들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무채색으로 변한 지 오래. 소나무 숲만 울창했다. 현란함을 뽐내던 것들이 힘을 발하지 못할 때 비로소 본질,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법. 영월군 문화해설사 1호인 이갑순(65)씨는 “겨울은 청령포 본래 지형과 단종 어소를 오롯이 둘러볼 수 있는 계절”이라고 했다.

매표소 선착장에서 청령포 선착장까지 고작 2분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지만, 한파가 몰아쳐 서강(西江)이 꽁꽁 얼지 않는 이상 청령포는 배를 타고 건너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씨는 “어떤 관광객들은 배 운행 구간이 짧다 보니 ‘뱃삯을 받으려고 일부러 다리를 안 놓는 것 아니냐’는 항의도 하는데, ‘유배지’라는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 앞으로도 청령포를 오가는 다리는 안 놓일 것 같다”고 했다. 요즘 하루 평균 이 배를 타고 청령포를 오가는 이들은 40~50명 수준. 같은 시간 청령포로 입장한 탐방객은 원주에서 온 김도은(24)씨밖에 없었다. “혼자 조용히 여행할 만한 곳을 찾다가 영월에 왔어요. 집콕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유배지에서 보낸 단종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공감 가네요.” 김씨가 웃었다.

청령포 단종 어소의 겨울 풍경. 단종을 향해 인사하듯 어소를 향해 굽은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청령포는 하얀 눈이 카펫처럼 깔렸다. 방문객이 뜸해져 발자국도 별로 없는 곳을 혼자 밟는 기분을 만끽하기 좋았지만, 배가 반대편으로 떠나고 나니 섬 아닌 섬에 덜컥 홀로 갇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요즘 같은 세상에 혼자라서 다행이라며 마음 비워본다.

소나무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청령포 수림지’는 2004년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한 숲이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소나무숲을 훑고 지나가자, 알싸한 공기가 밀려왔다. 단종도 이와 같았을까. 아무도 없는 숲에서 친구는 오직 소나무뿐이었다. 숲 한쪽엔 단종의 유배 생활을 보고 들었다 하여 이름 붙여진 600년 수령의 천연기념물 제349호 ‘관음송(觀音松)’이 지지대에 몸을 기대고 있다. 단종이 걸터앉아 외로움을 달랬다는 그 소나무다. 소나무 외 청령포 내 남아 있는 유적은 ‘단묘재본부시유지(단종이 기거했던 옛 집터)’와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표시한 ‘금표비’ 정도다.

단종 어소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눈높이로 마주한 송림이 한폭의 그림 같다. / 박근희 기자

소나무 숲 산책로와 망향탑, 노산대 등을 느리게 둘러보고 선착장으로 나가면 맞은편 배가 마중 온다. 배 승선 시간은 따로 없다. 호장(戶長)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묻었다는 장릉(단종 왕릉)도 가까이 있으니 간 김에 둘러볼 만하다. 장릉 내 단종역사관은 실내 시설이라 거리 두기 상향 기간 한시적으로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영월 주천면에 가서 '섶다리'를 지나치면 '섭하다'. 주천강 '쌍섶다리'가 유명하지만 낭만적인 운치는 평창강 '판운리 섶다리'가 한 수 위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평창강 ‘섶다리’ 건너 메타세쿼이아길

광주~원주 고속도로를 달려 영월군으로 진입한다면 주천면 섶다리를 지나칠 수 없다. 꽁꽁 언 평창강·주천강 바닥 위에 소복하게 쌓인 눈, 그 위로 만든 못 하나 쓰지 않고 솔잎가지와 ‘Y’자 모양의 물푸레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엮고 황토를 툭툭 덮어 만든 투박한 다리다. 주천면 겨울 설경의 백미로 꼽힌다. 해마다 강물의 수심이 얕아지는 늦가을에 주민들이 합심해 다리를 놓고 이듬해 장마가 지기 전 5월쯤 철거하기 때문에 가을부터 봄까지만 만날 수 있는 ‘한정판’ 풍경이다.

예부터 강원도 관찰사 등이 영월 장릉 참배 길에 건너다녔다는 주천교 술샘 부근 주천강의 ‘쌍섶다리’가 유명하지만 최근엔 판운리 섶다리가 인기다. 평창강을 사이에 두고 ‘밤뒤마을’과 건너편 ‘미다리마을’을 연결한다. 서정적인 풍경 덕분인지 겨울바람도 섶다리 위에선 민트 향처럼 상쾌하게 느껴진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구간도, 흙바닥이 살짝 꺼진 구간도 있어 아슬아슬하지만 100% 핸드메이드로 만들었다는 섶다리를 걷다 보면 콘크리트 바닥에 굳어진 두 다리가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다. 마을 안쪽으로 좀 더 가면 메타세쿼이아 숲이 기다린다. ‘보보스캇 캠핑장’ 내 사유지로 아직까지는 탐방객을 막지는 않는 분위기라 둘러볼 수 있다. 메타세쿼이아 숲과 함께 방절리 ‘영월 강변저류지수변공원'의 느티나무 언덕도 젊은층에게 인기다. 느티나무는 520여 년 수령으로 추정되는 보호수다. 방향에 따라 ‘나홀로 나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현재 주변 산책로의 데크 등이 파손돼 느티나무 언덕까지는 올라가볼 수 없다.

영월 주천면 '판운리 섶다리'를 건너 가면 '보보스캇 캠핑장' 내 메타세쿼이아 숲이 기다린다. 사유지지만 아직까지 방문객을 막지는 않는 분위기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판운리 섶다리에서 장릉 방향으로 달리다 만나는 하송리 선돌도 그냥 지나치기 아쉽다. 높이 70m 정도의 바위로 영월읍 방절리 서강쪽 절벽을 이룬 곳에 나란히 있어 마치 큰 칼로 절벽을 쪼개다 만 것처럼 생겼다. 녹음 우거진 봄·여름이나 단풍철에도 좋지만, 기암 사이로 눈 내린 서강 풍경은 한파가 와야 만날 수 있다. 문화해설사 이갑순씨는 “새해 들어 특히 한반도 지형 전망대를 찾아 안녕을 기원하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중”이라며 “시국이 어수선해서인지 한반도 지형 전망대에서 눈시울을 붉히거나 한참을 서서 기도하는 이들도 많더라”라고 했다. 별마로천문대는 코로나로 운영 중단 상태인데도 전망대로 향하는 ‘드라이브 스루’ 차들이 이어진다. 선돌, 한반도 지형 전망대와 함께 영월 전망 명소로 인기 끌고 있다. 단, 별마로천문대의 경우 겨울엔 날씨에 따라 결빙 구간이 있을 수 있으니 알고 가자.

영월 '선돌'의 겨울 풍경. 인구 4만의 조용한 고장 영월은 겨울 언택트 여행지로도 입소문 나고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영월 '한반도 지형'의 선암마을. 영월군 문화해설사 이갑순씨는 "우리나라 지형의 특성과 가장 비슷한 한반도 지형 마을"이라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부시장의 중심 ‘중부내륙’?

중부 내륙에 영월이 있다면, 영월 서부시장엔 카페 중부내륙이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영월이 마음에 들어서 1년 전 이곳에 어렵게 자리를 얻어 카페를 열었다”는 주인이 장인 정신으로 커피를 내려준다. 중부내륙이란 특이한 카페 이름은 “뉴스에 자주 노출되는 단어라서 붙였다”고 한다. 민방위 모자를 푹 눌러 쓴 주인이 칵테일 셰이커를 열정적으로 흔들어 만들어내는 ‘영월 미숫가루 음료’(5500~6500원)는 직접 개발한 레시피. ‘인생 미숫가루’로 기억될 맛이다.

영월 전통시장인 '서부시장'에 있는 카페 '중부내륙'.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의 감각 있는 주인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칵테일 셰이커로 만들어주는 영월 미숫가루도 별미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선술집을 어렵게 구해 꾸몄다는 카페는 이렇다 할 간판도 없다. 서부시장 안쪽 ‘영월맨션’ 1층 간판엔 달랑 테이크아웃 컵 하나만 달려 있을 뿐이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희귀템’으로 꼽히는 필립스 본사 공장 조명, 직접 디자인해 짠 테이블 등은 “아는 사람만 알아본다”고. 코로나 감염증에 관한 한 결벽증 수준으로 운영한다. 문 앞엔 ‘손잡이를 절대 잡지 말라, 노크 하면 주인이 문 열어 준다’는 살벌한 경고 문구가 쓰여 있다. 한정판으로 만드는 로열밀크티(6000~7000원) 등은 오후 늦게 가면 없을 확률이 높다. 공들여 크림을 만들어야 하는 커피 ‘아인슈페너’는 메뉴판에 아예 ‘정말 한가할 때만 (가능)’이라고 써 두었다.


영월읍 최초로 문 연 동네 서점 '인디문학1호점'. 서점의 역할뿐 아니라 문화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다. / 박근희 기자

영월 읍내 최초 동네 책방인 인디문학1호점도 요즘 영월의 변화 물결을 보여주는 곳. 영월 읍내 주변엔 재작년부터 청년 창업가들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 상점이 하나둘 자리 잡으며 즐길 거리가 더해지고 있다. ‘영월’ 하면 떠올랐던 영월역 앞 다슬기해장국 집, 읍내 ‘연당동치미국수’와 ‘상동막국수', 바로 부쳐주는 시장표 메밀 전병과 수수부꾸미, 반백 년 전통의 ‘김인수 할머니순두부’ 등 소문난 맛집과 함께 새로운 메뉴로 현지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곳도 있다.

영월 '살롱드림'의 양갈비스테이크. 영월 출신 임송이 오너 셰프가 귀향해 현지인들의 입맛에 맞춘 이탈리안 요리를 선보인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살롱드림(010-3117-2583)은 수도권에서 호텔 총괄 셰프로 4년 근무했던 임송이(32) 오너 셰프가 운영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영월 토박이 출신에 외지, 해외에서 요리 경험을 쌓은 임 셰프는 작년 대한민국 국제요리&제과 경연대회에서 세계요리부문 금상을 받은 실력파다. 들기름에 청양고추를 넣은 ‘영월 스타일’ 곤드레비프크림리조토(1만4000원)와 양갈비스테이크(2만1000원)가 유명하다.

덕포시장길에 있는 이달엔 영월(033-372-7173)은 매달 4·9일 영월 오일장에 맞춰 문 여는 빵집이다. 영월 감자로 만드는 감자 모양의 감자 빵, 자색 고구마 빵과 함께 한반도 지형 모양의 이색 스콘을 선보인다. 택배 판매도 한다. 이곳 대표인 파티셰 정미나(34)씨 역시 영월 출신으로 외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귀향해 빵집을 열었다. 인근 꽃과 차, 죽을 판매하는 ‘꽃·차·죽’은 정씨 어머니가, 감성적인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약국 ‘약사세요, 약방’은 동생이 운영하고 있다. 조만간 막냇동생까지 영월로 귀향해 함께할 예정이란다.

영월 오일장이 서는 날 문을 여는 '이달엔 영월' 빵집. 감자빵, 고구마빵, 한반도지형빵 3종이 인기다. / 박근희 기자


[군불이 뜨끈… 머물기 좋은 ‘영월 스타일’ 숙소]

지난 연말 영월군이 ‘핫한 영월’ 공식 인스타그램(@yeongwol_hot) 등을 통해 무료 배포한 원유리 작가 부부의 영월 한 달 살기 에세이집 ‘그 여름 젊은 달’은 배포 신청 시작 3일 만에 6000부가 마감됐다. 영화 ‘리틀포레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원 작가의 영월 한 달 살기 이야기는 코로나 시대 산골이나 시골 동네 소박한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무는 여행의 매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할머니 벽장을 휴식 공간으로 꾸민 영월 '이달엔 영월 스테이'. / 박근희 기자

책 속 한 달 살기의 주무대였던 숙소는 영월군 무릉도원면 꽃피는 무릉도원(010-7146-8679)과 북면 공기리 산골초가민박(010-6299-0395)이다. 그중 산골초가민박은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 감성의 시골집을 체험해볼 수 있는 숙소다. 아담한 마당 가마솥에 군불도 지펴보고 뜨끈뜨끈한 황토방 아랫목에 누워 시골 할머니 집의 추억을 나누기 좋다. 숙박객은 초가집 한 채를 통째로 대여(평일 7만원~주말 19만원)해 쓴다.

영월읍 덕포리 이달엔 영월 스테이(033-372-7173)는 ‘이달엔 영월’ 빵집 주인이 영월군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방치돼 있던 고모할머니 집을 고쳐 독채 숙소로 활용한 공간이다. 할머니 집에나 있던 안방 벽장을 휴식 공간으로 꾸며 ‘벽장 스테이’(평일 10만원부터)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