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서울 강북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운영 중인 의사 조영신(가명)씨는 곤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병원 문을 연 지 2시간 만에 2명의 여성이 함께 와 낙태 시술을 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중 1명은 10대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올해부터 낙태가 합법 아니냐”며 “지금 바로 수술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조씨는 “낙태를 처벌하는 법이 없어진 거지 완전히 합법이 된 건 아니다”라며 “일단 전문상담센터에서 상담받은 후 거기서 수술을 받으라고 하면 다시 와달라”고 답한 뒤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5일 경기도 부천의 한 산부인과에서는 20대 여성이 병원에 찾아와 임신 테스트 검사를 받은 뒤 임신했다는 결과가 나오자 그 자리에서 낙태 수술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원장과 간호사들은 “너무 임신 초기라 아기집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낙태 수술을 하기 어렵다”며 “3~4주 뒤에 다시 오라”고 설득했다. 이 여성은 1시간 동안 버티다가 “다른 곳에 가보겠다”며 돌아가 버렸다.

지난 1일 0시부터 낙태를 한 여성과 이를 도운 의료인을 처벌하는 형법 조항이 효력을 잃었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해당 조항이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 금지하는 내용이라서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이유에서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헌재는 혼란을 막기 위해 원래 형법 조항 효력을 2020년 12월 31일까지 유지하면서 대체입법을 마련하라고 했지만, 정부와 국회는 이 시한을 지키지 못했다. 관련 규정이 전무한 ‘법적 공백’ 상태에서 낙태가 허용된 것이다. 여성계는 대체로 “2021년은 낙태죄 폐지 원년”이라며 반기고 있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임신부 및 태아 생명과 관련한 민감한 의료 문제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17년 기준 한 해 5만여 건의 낙태 수술이 이뤄지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고 이 수치는 지금도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일러스트= 김영석
일러스트= 김영석

낙태 수술비는 부르는 게 값

실제로 낙태죄는 헌재 판결 이후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다. 검찰이 2019년 6월 임신 12주 이내에 낙태를 한 경우엔 기소 유예처분을 내리기로 내부 지침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기소유예 처분이란 범죄 혐의는 인정되지만 여러 상황을 감안해 피의자를 재판에 넘기지 않는 처분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그 후 지금까지 12주 이내에 낙태 수술을 혐의로 기소된 사례는 0건이었다.

문제는 1일부터 낙태죄가 사라지면서 상황이 거꾸로 됐다는 점이다. 이전까진 의사가 낙태 수술을 할 경우 처벌을 받았지만, 이젠 의사가 낙태 수술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게 돼버렸다. 의사가 낙태수술을 안 하면 현행 의료법상 진료 거부 행위에 해당된다. 따라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고 의사면허도 일정 기간 정지된다. 낙태를 해달라고 찾아온 여성들에게 사실상 진료 거부를 했던 산부인과 의사 조씨는 “돌려보낸 여성들이 보건복지부에 신고라도 하면 진료 거부로 조사받고 자격 정지를 받을까 봐 두렵다”며 “뭐든 좋으니 의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법적 기준이 어서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등 의사단체에선 “의사 개인의 상황이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낙태 수술을 거부할 수 있는 진료 거부권을 허용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조씨와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낙태 상담을 받고 수술해주는 병원들도 생겨나고 있다. 기자가 포털로 검색한 수도권 산부인과 병원 5곳에 낙태 수술 상담을 한 결과 5곳 모두 “수술 가능하다”고 답했다. 카카오톡으로 24시간 상담이 가능한 곳도 있었고, 임신 기간이 20주 이내라면 낙태가 가능하니 내원해서 진찰을 받아보라고 권한 병원도 있었다. 수술 비용은 천차만별이었는데, 서울에 있는 병원은 통상 임신 기간이 10주 내외라면 100만원가량이었고 경기도 소재 병원들은 70만~80만원 수준이었다. 임신 주수에 따라 5주인 경우 50만원이고 1주일씩 늘어날 때마다 10만원씩 더 받는 곳도 있었다. 한 산부인과 의사는 “임신 주수가 20주 정도 되면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수술비만 1000만원 넘게 부르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성폭행 등 피치 못할 사유를 제외한 낙태 수술엔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으니 병원이 부르는 게 값인 셈이다.

지난달 31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불법 낙태 약물 브로커 여전히 활개

법적 공백 상태에서 의료계는 현장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체 지침을 마련했다. 지난달 28일 대한산부인과학회 등 산부인과 관련 4개 단체는 공동으로 일선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아무 조건 없는 낙태 수술은 임신 10주 미만일 경우만 시행하도록 권고했다. 또 태아가 22주 이상이면 엄마의 배 밖으로 나온 뒤에 생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낙태를 해선 안 된다고도 권고했다. 하지만 이는 강제력이 없는 지침이기 때문에 일선 의사들이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다.

작년 10월 법무부가 내놓은 개정안은 좀 더 느슨하다. 임신 14주 이내라면 조건 없이 낙태를 허용하고, 15~24주 이내엔 조건부로 허용하도록 했다. 이외에도 국회에 계류된 10여 개의 낙태죄 개정안들 역시 낙태 허용 기준이 중구난방이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김동석 회장은 “의학이 발달해서 이젠 22주 정도 되는 태아면 얼마든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조산(早産)이라고 봐야 한다”며 “수술방에서 22주 된 태아를 꺼냈는데 울음을 터뜨리면 그 아이는 살아있는 생명인데 의사로서 어떻게 그 아이를 죽일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4월 임신 34주 차였던 임신부를 상대로 낙태 수술을 해줬던 의사가 살인죄로 기소돼 징역형을 받은 사건도 있었다. 재판부는 “태아가 숨 쉬는 상태였는데도 아무 조치 없이 사망에 이르게 했다”며 살인죄를 인정했다.

낙태 수술 외에 임신 초기에 약물을 이용한 낙태 역시 아무런 법적 기준 없이 방치된 상태다. 낙태죄가 있을 땐 미프진 같은 유산(流産) 유도제는 국내에선 불법이었다. 하지만 해외 직구 등을 통해 암암리에 미프진을 국내에 들여오는 사례가 많았고 아예 낙태 약물만 전문적으로 밀수해 유통하는 브로커도 많았다. 낙태죄가 위헌 판결을 받은 뒤에도 유산 유도제 합법화 관련 규정이 마련되지 않아서 아직 합법적으로 처방받고 구하는 게 불가능한 반면, 브로커들은 여전히 활동 중이다. 기자가 지난 4~5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미프진 판매 브로커 2명과 접촉해 문의해보니 임신 주수와 유산 경험 등 간단한 질문을 받은 뒤 곧바로 구매가 가능했고 배송은 1~2일 정도 걸린다는 안내를 받았다. 한 브로커는 “국내 허가를 받으려면 최소 반년은 걸릴 것”이라며 “임신 7~10주면 원래 60만원인데 우리도 정식 수입 전에 재고를 처리해야 하니 49만원으로 할인해주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렇게 브로커를 통해 구매한 미프진이 진품인지 여부를 알 수 없단 점이다. 기자가 문의한 브로커들은 “미국 FDA 인증을 받은 정품”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세관에서 걸릴 수 있기 때문에 겉포장은 뜯은 제품”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유산 유도제가 100% 안전한 것도 아니다. 해외에선 유산 유도제를 먹은 뒤 패혈증 등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고 사망 사례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산부인과 의사의 처방 또는 복약 지도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유산 유도제 허가 신청을 원하는 몇몇 제약사와 협의 중”이라며 “일반 의약품은 심사를 거쳐 시중 유통까지 5~6개월 정도 걸리지만, 이 경우엔 시급성을 고려해 최대한 신속하게 허가 절차를 처리할 수 있도록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낙태죄 시작부터 폐지까지]

1953 형법에서 낙태죄 규정

1973 모자보건법에서 예외적 낙태 허용 사유 규정

1985 대법원 “낙태 시술 사회 상규 아니다”

2010 낙태 시술한 조산사가 헌법소원 청구

2012 헌법재판소 낙태죄 합헌 판결

2017 낙태시술 혐의 의사가 헌법소원 제기

2018.3 여성가족부, 헌재에 낙태죄 폐지 의견서 제출

2018.8 낙태죄 폐지 헌법소원 재판 시작

2019.2 인권위 “낙태죄, 여성 기본권 침해”

2019.4 헌재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2020년까지 법개정 요구)

2021.1.1 대체입법 없이 낙태죄 소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