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한 지 1분 만에 불륜 증거 발견, 2분도 안 돼 불륜녀의 뺨을 후려친다. ‘펜트하우스' ’부부의 세계' 등 막장 드라마의 계보를 거슬러 오르면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이 있었다.
7년 전 시즌2로 종영한 막장의 고전 ‘사랑과 전쟁’이 유튜브를 통해 부활했다. 1시간 분량의 ‘사랑과 전쟁’을 10~15분으로 편집한 유튜브 영상이 20~30대 젊은 층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조회 수 100만회를 넘긴 영상만 50여개에 채널 누적 조회 수는 2억6000만회에 이른다. 댓글엔 “시즌3도 제작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뜨거운 반응 덕에 연극 ‘러브 앤 전쟁’으로도 만들어져 지난달부터 대학로에서 공연 중이다.
재택근무를 하는 직장인 김모(33)씨는 지난해부터 혼자 밥을 먹을 때마다 유튜브로 ‘사랑과 전쟁’을 틀어놓는다. 김씨는 “답답한 코로나 시국에 매운맛을 넘은 ‘마라맛’ 전개가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했다. “어렸을 땐 그저 불륜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결혼할 나이가 돼서 그런지 은근히 공감하면서 보게 돼요. 서권순 배우님을 제일 좋아하는데, 그분이 표독한 시어머니로 나오면 믿고 봅니다.”
고등학생 김민지(16)씨는 ‘사랑과 전쟁’에 푹 빠져 ‘덕질(좋아하는 분야에 파고드는 것)’을 위한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계정까지 만들었다. 배우들의 젊은 시절 사진이나 최근 근황을 올리는 것은 물론, 배우별로 역대 출연횟수·출연한 회차까지 분석한다. 김씨는 “자꾸 보다 보니 배우들의 연기에 빠져 ‘도대체 저 배우는 누구지?’ 하며 찾아보게 됐다”고 했다. “처음엔 검색해도 정보가 거의 없어서 제가 직접 정리하기 시작했는데요. 최근 들어 제 블로그 조회 수가 점점 올라가더라고요. 주로 30대 여성 분들이 많아요.” ‘사랑과 전쟁’ 시즌2가 방영할 때쯤엔 유치원생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방영된 회차에선 식당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이 나와 깜짝 놀랐어요.”
인기 비결 중 하나는 배우들의 맛깔스러운 연기. 자주 출연한 배우들의 애칭도 생겼다. 간판 배우인 최영완·민지영·장가현씨는 ‘레전드 3대장’으로 불린다. 셋이 함께 나온 회차 ‘동서가 간다’는 “호날두·메시·네이마르가 모였다”며 조회 수 240만회를 기록했다. 세 배우는 연극 ‘러브 앤 전쟁’에 출연하며 최근 다시 뭉쳤다. 배우 최영완씨는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관객을 받고 있는데 꾸준히 찾아오는 팬들이 많다”면서 “쉬는 시간마다 ‘사랑과 전쟁’을 봤다며 수능 끝나고 찾아온 고등학생부터 모녀끼리 보러 오신 분들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고 했다. “요즘 나오는 지상파 드라마보다 통쾌하고 재밌대요. 배우들도 기억 못 하는 방송 날짜랑 회차, 대사까지 외우더라고요.”
근황이 궁금하다는 팬들의 성화에 최씨는 4개월 전 유튜브 채널도 개설했다. 귀에 쏙쏙 박히는 발음으로 시원하게 쏘아붙이는 역할을 많이 맡아 팬들 사이에선 “사이다 언니”로 불린다. 고구마 먹은 듯 답답한 캐릭터가 나오면 “영완 언니 불러와라”는 반응도 나온다. “촬영할 땐 감독님이 요구하시니까 일부러 악을 쓰고 액션도 과장했는데, 제가 봐도 그렇게 하니까 더 재밌더라고요. 예전엔 ‘사랑과 전쟁’ 이미지 때문에 다른 작품에 출연하기 어려우니까 배우들끼리 서로 한탄하기도 했는데 이젠 저희 숙명 같아요.”
‘사랑과 전쟁’ 편집 영상을 올리는 채널 ‘Kemi TV’에 따르면 주 시청자 층은 20~30대. 고부 갈등이나 남편의 불륜을 소재로 한 회차가 단연 인기다. “비혼 권장 드라마” ”오늘도 비혼을 결심합니다” 같은 댓글들이 달린다. ‘혼밥’을 하면서 사랑과 전쟁을 본다는 댓글도 많다. 수요에 맞춰 영상을 올리는 시간도 오전 11시로 바꿨다. 실제로 점심때쯤 영상이 올라오면 “점심 먹을 시간이네”, “이제 사랑과 전쟁 없으면 목구멍에 밥이 안 들어간다”는 댓글부터 달리기 시작해 “오늘은 어제 먹고 남은 킹크랩으로 볶음밥” ”오늘 점심은 등뼈찜” 등등 각자 점심 메뉴를 공유하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20대 편집자가 젊은 층의 취향에 맞게 늘어질 틈 없이 편집하고 B급 정서의 자막을 입힌 것도 인기에 한몫했다. ‘Kemi TV’ 채널을 운영하는 정성민 팀장은 “우리 편집자가 자막 재밌게 달기로 유명해져서 편집자 팬들까지 생겼다”면서 “지상파에 쓸 수 없는 젊은 층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공감대를 얻은 것 같다”고 했다.
정 팀장은 “해외 수출된 콘텐츠는 전송권 문제가 있어 활용하기 어렵다 보니 수출되지 않은 콘텐츠를 찾다가 ‘사랑과 전쟁’을 편집해 올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저작권 문제를 피해 찾은 ‘사랑과 전쟁’이 대박이 난 셈이다. 정 팀장은 “하도 인기라 사랑과 전쟁을 활용한 자체 콘텐츠 ‘사랑과 전쟁 톡’도 제작했다”면서 “요즘엔 대만에서도 보는 팬들이 늘어나 영어 자막도 달아볼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