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겨울, 수습기자 시절 매주 수요일이면 서울 종로구 옛 일본 대사관 앞에 갔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이른바 수요집회 취재를 위해서였다. 그 무렵 수요집회는 1000회를 돌파해 국내외 관심이 뜨거웠다. 취재 요령이 부족한 수습인지라,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칠까 봐 윤미향 당시 정대협(정의기억연대 전신) 대표 발언을 비롯해 시민들 이야기까지 수첩에 빼곡히 받아 적었다. 한 달이 안 돼 노트 한 권을 다 채웠지만, 정작 그 안에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들은 이야기는 없었다. 윤미향 당시 대표에게 번번이 가로막혀서다. 그는 “조선일보와는 인터뷰 안 한다” “조선일보가 왜 이 문제에 관심 가지느냐”고 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도 좌우(左右) 진영 논리가 작동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과연 할머니들도 같은 생각인지 궁금했지만, 그것조차 물어볼 수 없었다.
작년 5월 이용수(93) 할머니의 기자회견은 그 궁금증에 대한 10년 만의 대답이 됐다. 이 할머니는 정의연과 윤 대표의 기부금 회계 부정 등을 지적하면서 “증오 키우는 수요집회에 더는 참석하지 않겠다. 자기들과 함께하는 할머니는 피해자라며 챙기지만, 단체에 없으면 피해 할머니라도 신경 안 쓰는 걸 봤다. 30년간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후 이용수 할머니에게는 “냄새가 난다”는 배후설부터 ‘친일파’라는 혐오 발언까지 쏟아졌다. 할머니 주변에선 지인, 관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쏟아냈다. 할머니 얘기를 직접 들으러 지난 11일 대구로 갔다. 할머니가 임시로 생활하는 대구 시내 한 2성급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집회 현장에서처럼 비장하지도, 기자 회견장에서처럼 화난 모습도 아니었다. 로비에 공사 소음이 발생하자 “내 방으로 가자”고 이끌었고, 인터뷰가 길어져 2시간을 넘어섰는데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괜찮다”고 했다. 살아온 세월이 60년 넘게 차이 나는 기자에게 할머니는 마지막 답변까지 존칭을 썼다. 미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고, 옅게 화장한 모습이 구순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고왔다.
◇재판 연기돼 걱정… 이젠 믿을 곳이 없다
지난 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정곤)는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국은 배 할머니 등 12명에게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의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법원 판결은 이번이 처음이다. 13일에는 이용수 할머니의 손해배상 소송 최종 판결도 내려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인터뷰 한 시간 전, 이 재판이 연기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13일 재판이 연기됐다고 합니다.
“내일 서울 가려고 짐을 다 챙겨놓았는데…. 또 연기가 됐다니 걱정이지요. 이제는 아무 데도 믿을 곳이 없으니까요. 절박한 마음으로 법에다 호소하고 있는 건데, 잘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세월이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8일 판결 내용을 듣고 많이 우셨다고요.
“저 하늘에 계시는 할머니들한테 가서 할 말이 없었는데 이제 말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울었어요. 기쁨의 눈물이지요. 정초부터 선물 같은 소식, 좋은 소식 선물로 주시는구나 하고요.”
–코로나에 건강은 어떠신가요.
“나이가 있으니 여러 가지 병이 있잖아요. 혈압이 높고, 심장도 나쁘고 당뇨도 있어서 조심하며 지냈죠. ‘아이 캔 스피크(이용수 할머니를 모티프로 삼은 영화)’에서 200년 살면서 일본과 싸우겠다고 했는데, 지금 같아선 100년 살기도 어렵겠어요(웃음).”
이날 할머니는 오후 1시로 잡힌 인터뷰 시간을 맞추려고 점심을 미숫가루와 계란 한 알로 간단히 먹었다고 했다. 안경은 썼지만, 보청기는 끼지 않았다. 할머니를 돌보는 시민단체 관계자가 “속닥거리는 얘기까지 다 들으실 정도로 귀가 밝으시다”고 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보셨나요.
“그럼요. 나문희씨가 연기를 참 잘하더군요. 나문희씨 대사 중에 실제 제가 한 얘기가 많아요. 그 영화를 찍고 나서 제가 후편도 찍으라고 했는데, 한 편 찍고 안 하네요(웃음).”
–후편을 찍는다면 어떤 내용을 담으면 좋을까요.
“미국 가서 우리가 어떤 활동 했는지를 담으면 좋겠어요. 1992년부터 미국이고 일본이고 전 세계를 다니면서 일본을 고발한다고 외쳤어요. 비행기 탄 횟수를 따져보니 110번이 넘더군요.”
이 할머니는 1992년 정대협에 자신의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알렸다. 16세 때인 1943년 10월 고향 대구에서 “이웃이 불러 외출했다가 다른 여성 4명과 함께 일본군에 끌려갔다”고 했다. 기차와 트럭, 배 등을 옮겨 탄 끝에 도착한 곳이 대만이었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린 뒤 이 할머니는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증언했다. 2007년 2월에는 미 의회에서 처음 열린 위안부 피해 관련 청문회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알렸고, 미 하원은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왜 호텔 생활을 하십니까.
“작년 5월에 왔으니 벌써 8개월째예요. (정의연 비리 관련) 기자회견 이후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옮겼는데, 이렇게 길어지게 됐네요.”
이 할머니의 숙소 비용은 대구 지역 시민단체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 후원하고 있다. 호텔로 오기 전에는 거실 딸린 방 한 칸짜리 39.6㎡(약 12평) 임대 아파트에서 28년간 혼자 살았다. 시민모임 서혁수 대표는 “5월 기자회견 이후 심리적 압박이 커서 할머니가 혼자 주무시길 어려워하셨다”며 “기존에 사시던 아파트는 두 사람이 살기엔 너무 좁아서 일단 호텔로 모셨고 요양보호사와 함께 지낸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대구시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주거 지원 항목으로 예산 4억원을 편성했지만, 아직 할머니의 새 거처는 구하지 못했다. 전·월세난으로 매물 구하기가 어려운 데다 행정적인 문제까지 겹치면서다.
◇김어준 ‘배후설'이 무혐의?
지난 8일 승소 판결 이후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수요 시위를 언급하며 “일본 정부에 반인도적 전쟁 범죄인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수요시위는 분쟁과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정의로운 외침이자 평화의 여정이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윤 의원은 이 할머니 기자회견 이후 정의연 이사장 시절 후원금 유용 등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 중이다.
–윤 의원이 쓴 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뻔뻔하죠. 죄를 모르고…. (윤 의원 얘기는) 입 밖에 내기가 싫어요. 법에서 처리할 거예요. 30년 같이 운동을 했지만,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여러 차례 윤 의원에 대한 언급을 피하던 이 할머니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줄 몰랐다’는 말을 반복하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짚었다.
–정의연의 문제는 뭐였습니까.
“모금을 시작할 때 나하고 길원옥 할머니가 참여했는데, 끝끝내 (모금 내용이) 간 곳이 없어요. 내가 재주 넘고 돈은 되놈이 받아먹었는데 나는 몰랐습니다.”
–기자회견에 대해 할머니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써 준 내용을 그대로 읽은 거란 말도 있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누가 써줘서 말하기는요. 내 기억에 있는 걸 그대로 말했지요. 코로나라서 사람들이랑 만날 수도 없었고…. 누가 (배후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기자회견 관련해서 이 사람은 이 말 하고 저 사람은 저 말 하는데, 내가 한 얘기 말고는 다 거짓말입니다.”
인터뷰 후, 경찰이 이 할머니의 기자회견에 ‘배후설’을 제기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당한 방송인 김어준(53)씨를 ‘혐의 없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 소식을 들은 할머니가 전화 통화에서 반문했다. “없는 걸 모함하는 건 벌을 받아야 하는 일 아닙니까. 죄를 밝히는 게 법이 해야 하는 일인데, 법이 그걸 따끔하게 나무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기자회견 이후 악성 댓글에도 시달리셨지요? 집을 떠나 호텔 생활까지 하게 되셨고요. 기자 회견을 후회하진 않으시나요.
“후회 안 해요. 그것 참 잘 밝혔지요. 그냥 놔뒀으면 어떻게 될 뻔했어요. 진짜 큰일 날 뻔했잖아요. 잘 밝혀줬다 싶어요. 지금 그 사람(윤미향 의원)은 자기 할 거 다 하고 있잖아요. 그 사람은 후회 없이 할 거 다 하는 사람입니다.”
–정의연과는 화해하셨나요?
“화해는 무슨.”
–정의연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대중들이 아직 많습니다.
“이번에도 (13일에) 법정에 갔다면 정의연을 만나게 될 텐데,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왜 거기랑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 운동을) 같이 하느냐고요. 그런데 같이해야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함께 운동할) 상대가 거기니까. 그 사람들과 같이해야, 밝힐 건 밝히고 하잖아요. 나는 보통 사람이에요. (회계 부정은) 이건 아니니까 아니라고 한 것이지, 문제를 해결하거나 끝을 내려면 일단 정의연과 (같이)해야죠.”
비리를 고발했지만, 정의연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전화 한 통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인터뷰 도중 정의연 관계자에게서 걸려 온 전화. 스피커폰으로 들리는 정의연 측 목소리는 살가웠지만, 이 할머니의 응대는 짧고 무뚝뚝했다. 그만큼 신뢰가 사라진 듯했다.
–수요집회는 계속 지지하시는 건가요?
“이제 수요일이라고 하는 날짜는 세계가 다 알아요. 30년 동안 해왔잖아요. 이건 세계가 아는 것이기 때문에 못 없애요. 그러나 더는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교육관을 만들어서 한 사람이라도 올바른 역사를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위안부 문제’ 이렇게만 하면 모르잖아요. 한국과 일본이 교류하며 서로 역사를 알아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역사관 안에 교육 공간을 만들어 한 사람도 좋고, 두 사람도 좋으니 이를 가르쳐야죠.”
이용수 할머니 말에 주변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친일파 소리 듣는다’는 진담 섞인 농담이 나왔다.
–요즘엔 말 한번 잘못하면 친일이니 토착왜구니 하며 몰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공연하게 일본 편을 드는 사람들이 친일파지, 사이좋게 지내자는 게 왜 친일인가요?”
◇말장난식 사과는 진짜 사죄 아냐
한국 법원이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배상하라”고 내린 판결에 대해, 일본 정부는 “재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이번 판결로 어느 정도 봉합되던 한·일 관계가 다시 악화할까 봐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할머니도 ‘한·일 젊은이들이 친하게 지내면서 대화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했는데, 이러다 반대로 가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일본이 얼른 사죄해야지요. 일본하고 우리가 이웃 나라잖아요. 이 문제만 해결하면 두 나라가 얼마나 평화로워지겠어요. 그러면 세계도 편해집니다. 지금 이걸 일본이 가로막고 있어요. 저는 일본 국민이 안됐어요. 그 국민이 세계에서 버림받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지금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을 때 사죄하라는 겁니다. 제가 있을 때 해결을 해야 이 무거운 짐을 후손들이 떠안지 않게 됩니다.”
–일각에서는 이제 그만 한·일 관계를 위해 대승적으로 해결하자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얘기하면서요.
“1965년 한·일 협정에서는 위안부 문제는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그때 해결됐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때 그 돈 받아서 포항제철 세우고, 고속도로 닦았지요. 2015년 합의는 텔레비전 보고서야 알았어요. 당사자 없는 합의가 어딨나요. 지금까지 제가 이러는 건, 돈(때문)이 아닙니다. 사죄받아야 해요. 사죄를 받아야 명예 회복을 합니다. 우리 나이로 열여섯에 조선의 딸로 끌려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93세까지 이렇게 싸우고 있잖아요.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제가 있을 때, (피해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을 때, 사죄만 받고 싶습니다. 1991년에 김학순 할머니가 시작했고, 이용수가 끝내고 싶은 게 아닙니다. 올바르게 하고 싶어요. 사죄를 못 받고 가면 내가 다음에 (돌아가신) 할머니들 만나 뭐라고 합니까.”
할머니는 2015년 합의에 따라 일본이 10억엔(약100억원)을 출연했을 때도 “보상은 너희가 돈 벌러 갔으니까 불쌍하니까 조금 주는 것이 보상이고, 죄에 대한 것이 배상”이라며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 외무상이 아베 총리의 이름으로 책임을 통감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건 사죄가 아닌가요. 할머니가 생각하는 사죄는 무엇입니까.
“그게 사죄인가요? 말장난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 사과는 백번 해도 필요 없습니다. 진정성 있는 진짜 사과를 해야지요. 일본 총리가 공개된 장소에 나와 세계가 다 듣도록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해야죠. 그렇게만 한다면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돈 얘기 한 적도 없어요. 지금이라도 사과한다면 재판(손해배상 소송)도 취하할 겁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이 할머니에게 “사진이 소녀처럼 예쁘게 나왔다”고 했다. “사진을 잘 찍어서 그렇지예” 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열여섯 꽃 같은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았다면, 그는 자식과 손주들 재롱이 낙인 여느 평범한 할머니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전 세계에 증언하려 비행기를 110번 타는 대신 아들딸이 보내주는 효도 관광을 하면서. 그래서 물었다. “결혼해 자식 낳고, 손주들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한 아쉬움은 없느냐”고. “천만에요. 나는 여기까지 싸워 온 나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