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안병현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 없지.”

온 국민이 다 아는 그 노래, ‘타타타’의 첫 소절이다.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1991년 첫선을 보인 이 노래는 같은 해 11월부터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통해 일약 국민 애창곡으로 거듭났다.

‘타타타’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 6월, TV조선의 예능 프로그램 ‘사랑의 콜센타’에서 ‘미스터트롯' 출신 가수 이찬원이 받은 신청곡 또한 ‘타타타’였다. 그 노래를 신청한 건 대구에 사는 23세의 여성 김모씨. 1991년에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이 ‘타타타’를 신청하고 불렀다. 그만큼 진한 감동과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 가락과 노랫말이라고 할 수 있다.

‘타타타(Tathātā)’는 산스크리트어로 ‘있는 그대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여여(如如)’라고 의역됐다. 사물도, 인생도, 있는 그대로 그러하는 것. 그러므로 결국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하다는 뜻이다.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3분 남짓한 노래에 담아낸 셈이다.

그 노랫말을 서양 철학의 관점에서 짚어볼 수는 없을까. 물론 가능하다. 독일에서 시작해 프랑스에서 꽃을 피운 실존주의의 핵심 개념인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그와 짝을 이루는 기투성(企投性, Antworfenheit)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피투성’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당할 피 자에 던질 투 자를 합쳐 만든 번역어다. 말 그대로 ‘던져짐 당했다’라는 뜻이다. 반대로 ‘기투성’은 꾀할 기 자에 던질 투 자를 쓴다. 무언가를 어딘가로 던진다는 뜻이다. 요즘은 어려운 한자어 대신 우리말로 ‘던져짐’과 ‘던짐’이라고 옮기기도 한다.

세상에는 사람뿐 아니라 온갖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기독교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자신의 모습을 본떠 사람을 만들었다고 가르친다. 서구의 계몽주의자들은 합리적인 과학과 이성을 통해 존재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굴러다니는 저 돌멩이처럼 ‘그냥’ 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다. 고대 인도의 작은 나라에서 왕자로 태어난 부처도, 가난한 성당 종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철학을 공부한 하이데거도, 1948년 미군정 시대에 태어나 전쟁을 겪은 김국환과 수많은 한국인들 모두가,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인 것이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 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그렇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세상 속에 던져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태어나 있고,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어, 정신없이 살다가 덧없이 죽는다. 고대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불교의 지혜와 서구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가, 이렇듯 뜻밖의 조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온 국민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 나왔다. 아동 학대를 겪었고 사망한 아이의 사건으로 애통해하는 국민 앞에서, 대통령은 마치 입양이 사건의 원인인 양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입양 부모의 경우에도 마음이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안에는 입양을 다시 취소한다든지 여전히 입양하고자 하는 마음은 강하지만 아이하고 맞지 않는다고 할 경우에 입양 아동을 바꾼다든지” 하는 것을 대책이라고 제시하고 있었다.

논란이 커지자 청와대와 여당이 나섰다. 문 대통령은 사전위탁보호제를 설명하고자 했는데 언론과 야당이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변명은 사실과 다르다. 문 대통령이 말한 내용은 이미 4년 전에 법무부에서 반대 의견을 냈던 사안이다. “임시인도 결정 후 입양 아동이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양하지 않는 등 소위 ‘아동 쇼핑’을 조장할 수 있다. 입양 아동에게는 큰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던 법무부의 당시 입장을 보면 마치 미래를 예견한 것만 같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사전위탁보호제가 시행되고 있으니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여당 및 일부 지지자들도 더러 보인다. 전문가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동방사회복지회 전 입양사업부장으로 37년간 근무한 김혜경씨에 따르면 대부분의 선진국은 입양할 때 남자아이, 여자아이를 선택조차 못 하게 한다. 성별도 못 고르는데 성격이 안 맞는다고 아이를 돌려보내는 게 가능한 일인가.

문 대통령의 발언은 사회 복지 정책 차원에서 실로 끔찍한 소리였다. 철학적으로 보더라도 황당하고 난폭한 언어인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다. 왕자로 태어나 어른이 될 때까지 고통과 근심을 몰랐던 싯다르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의 길을 택한 이유다. 스스로가 남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일 뿐임을 자각하고 있는 한, 사람은 한없이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우리나라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대통령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입양아와 입양 부모를 향해 사과하지 않는가. 세상을 향해 내던져진 것은 우리의 존재로 충분하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국민을 향해 아무 말이나 내던지는 그런 세상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 본인을 청와대 밖으로 내던질 날만 고대하는 국민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문 대통령은 자각할 필요가 있다.

답답한 마음, 다시 ‘타타타’를 듣는다.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그렇다. 우리는 세상 속에 던져졌지만, 어쩔 수 없다. 불안과 근심 모두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필연에서 우연으로의 전환. 미지의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기꺼이 던지는 것. 하이데거가 말한 기투, 혹은 ‘던짐’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입양아는 그중에서도 아프게 던져진 아이들이다. 입양 부모들은 마치 야구선수처럼 스스로의 몸을 던진다. 아이들을 받아내어 가정의 품에 안고 키워서 사회를 향해 송구한다. 던져진 존재, 던지는 존재. 입양 가정을 향한 지지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