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양구 ‘철학의 집’에는 김종호 사백이 기증한 <동행>이라는 구름 사진이 있다. 넓은 창공에 같은 모습의 구름 둘이 머문 듯이 흘러가는 작품이다. 두 구름이 나와 안병욱 선생의 생애를 연상케 한다면서 기증한 작품이다. 두 구름 사이에 잠시 머물다 간 또 한 구름 얘기가 있다.
우리가 80을 바라볼 때, 안 선생이 만성 기관지염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날 밤에 내가 휠체어를 탄 안 선생을 밀어주면서 언덕을 넘는 꿈을 꾸었다.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36년 전에 한우근 교수와 셋이서 한 달 동안 유럽 여행을 한 기억이 떠올랐다. 1년 미국 생활을 끝내고 귀국하는 정말 즐거운 여행이었다.
서울대학 사학과를 통해 알게 된 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셋이 모여 보자는 상의를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기꺼이 동참해 주었다.
안 선생 집 부근의 워커힐호텔 카페에서 사계절에 한 번씩 모여 커피도 마시고 점심을 같이하기로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얼마 동안의 만남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세 가족도 그날은 남편과 아버지가 잔칫집에라도 가는 듯이 기다려 주곤 했다. 한 교수는 우리보다 다섯 살 위지만 순박한 면이 있어 놀려주는 재미도 있었다. 한번은 내가 “한 선생을 모시러 직접 가야 하는데, 여자 손님과 약속이 있어 기사만 보내서 미안해”라고 했다. 한 선생은 “물론 그래야지 잘했어” 하면서 약간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기다리던 안 선생을 만나자마자 “김 교수는 우리와는 달라. 여자 친구를 만나느라 호텔에서 기다렸다가 나왔다니까…” 하면서 부러워했다. 안 교수는 내 표정을 보면서 진실인지 아닌지 살피는 눈치였다.
셋이 만나면 약속했던 3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른다. 여행 중에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고, 고등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도 느꼈다. 건강, 취미, 주변 사람들 이야기, 1년간 미국서 겪었던 일, 담배 습관 때문에 부인에게 쫓겨났다는 한 교수의 걱정과 우리의 말 못 하는 위로담 등. 안 교수는 건강이 좋아져 요가를 즐긴다면서 실험해 보여주기도 했다. 안 선생이 주례를 맡아 주기로 한 아가씨가 친구들과 같이 와 우리가 오는 날에는 자기네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우리 책의 애독자들이었다.
1999년 겨울 모임이 끝났다. 우리는 새해 2000년 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내가 한 교수의 아파트 정문에서 악수하고 헤어질 때는 즐거웠다는 듯이 한 교수도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인생은 가고 세월은 남는 법. 그것이 우리 셋의 마지막 모임이 되었다. 얼마 후에 한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조간신문에서 보고 놀랐다.
나는 두 구름이 잠시 셋이 되었다가 다시 둘이 되었는데 지금은 ‘혼자 남은 구름이 어디로 가지?’라고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