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Saatchi Gallery)가 모든 걸 바꿨다. 2017년 가을, 영국 런던 첼시에 자리한 ‘현대미술의 메카’에서 3주 동안 선보인 전시로 그의 운명이 달라졌다. ‘사치’ 이전에는 교수직과 화업을 병행하느라 띄엄띄엄 개인전을 이어가던 중견 여성 화가였다. 스포츠 스타를 사위로 둬 미디어에 간혹 이름이 오르내렸을 뿐이다. 사치 전시는 그를 세계 무대로 격상시켰다. 내년 5월 ECC(유러피언컬처센터) 초대로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개인전을 연다. ‘세계 미술계 큰손’으로 불리는 카타르의 셰이카 알 마야사 공주에게서도 전시 제안을 받았다. 그 전초전으로 다음 달 3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연다. 국내에서는 근 10년 만에 여는 전람회다. 제목이 ‘다시, 봄(Spring Again)’. 오명희(65)는 “혹독한 겨울을 지내온 모든 분들에게 생명이 움트는 봄의 한복판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꿈의 갤러리가 준 선물
−사치 전시 반응이 뜨거웠나 보다.
“사치갤러리 회장이 개막을 며칠 앞두고 내 전시를 먼저 관람했는데, ‘이 작가의 작품 더 있느냐’고 묻더니 룸을 하나 늘리라고 지시했다더라. 전시 일정도 2주나 연장됐다. 그만큼 관객이 많았다. 작품 앞에서 사진 찍으려고 줄 선 사람들이 길게 이어졌고, BBC에서도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개막식엔 켄트궁의 마이클 왕자 등 영국 귀족과 귀빈들이 500명 넘게 왔다. 도록도 동이 났다. 왜 그렇게 큰 사랑을 받았는지 지금도 얼떨떨하다.”
−단색화가 대세인 와중에 흐드러진 꽃과 나비, 새 문양의 화려한 나전 장식들이 유럽 애호가들을 파고들었을까.
“사치 전시 무렵에 프리즈 런던 아트페어가 개막했다. 당연히 한국 부스엔 단색화 대작들이 걸렸다. 채색화가 대부분인 내 작품이 민망할 정도였는데 사치 큐레이터가 걱정하지 말라고, 아티스트로서 당신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용기를 주더라.”
세종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오명희는 일명 ‘스카프를 그리는 화가’로 1990년대 화단에서 주목받았다. 전통 화조화의 맥을 이으면서도 ‘바람에 떠도는 스카프’라는 소재를 더해 초현실주의 분위기 물씬한 조형 세계를 구축해왔다.
−애초 사치 전시의 시작은 2012년 홍콩 아트페어였다.
“내 부스를 외국인 여성 큐레이터가 찾아와 런던 사치 갤러리에 아시아관이 생기는데 당신 그림처럼 디테일이 강한 작품에 관심이 많다며 명함을 주더라. 믿기지 않았다. 여행 삼아 사치 갤러리에 갔을 때 어떤 작가쯤 돼야 이런 데서 전시를 할까 부러워했던 나였으니까.”
−2022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시는 어떻게 성사됐나.
“사치 전시를 관람한 ECC 관계자들이 꽃잎이 날리고 새가 날아다니는 내 3D 작품에 큰 관심을 보였다. 올해 베네치아 건축비엔날레에서 프리뷰 하고 내년 비엔날레에서 전시장 두 곳 규모로 개인전을 연다. 한국관이 아니라 유럽 큐레이터들이 만들어준 공간이라 더 의미 있다.”
◇삶의 덧없음, 그 화려한 애상
−전시 제목이 ‘다시, 봄’이다.
“내 작품은 ‘봄의 한복판’이다. 언제나 꽃피고 바람 부는 봄을 그려왔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도 ‘봄날은 간다’이다. 나이가 드니 봄이 또 새롭다. 얼마 전 ‘열봄’이란 말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봄을 앞으로 열 번은 더 볼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에서 나온 말이란다. 코로나까지 덮쳐 진짜 겨울을 지냈지만 다시 소생하는 봄의 경이로움을 그리고 싶었다.”
−능수버들과 매화가 화폭에 흐드러졌다. 새도 울고 나비도 난다.
“나는 아름다운 것들을 그린다. 우리 삶이 슬프고 비극투성이지만 찬란한 한순간을 보기 위해 사는 것 아닐까.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는 노랫말처럼 짧고 허망하지만 그래서 아름답다.”
−요즘 현대미술과는 결이 다르다.
“옛것, 옛 풍경, 옛 추억이 좋아서 ‘메모리' ‘노스탤지어' 같은 컨셉의 작업을 한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 경험하지 않은 것을 그리지 않는다. 난해한 건 못 그린다. 작품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니냐는 비판도 받는데 쥐스킨트 소설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위안을 얻었다(웃음).”
−70여 점이 나오는 대규모 전시다. 자개, 금박, 영상에 이어 조각까지 도전하셨다.
“사치 이후 신작들이다. 입체를 해보고 싶었다. 손에 잡히는 꽃잎, 휘영청 흐드러진 나뭇가지들을 실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베테랑 용접공과 작업하면서 불에도 많이 데였다. 베네치아에도 ‘메모리 트리’를 브론즈로 만들어 출품한다.”
미술평론가 전영백(홍익대 교수)은 오명희의 작업을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위한 서정시”라고 했다. 오명희는 ‘작가의 글’에 “내 작업은 여성적 그리기”라고 썼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란 말은 아름다움과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중적 시선을 대변한다. 아름답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을 억압해왔다. 나는 아름다움을 쫓는 것이 생(生)의 긍정이라고 믿는 쪽이다. 그래서 장식성을 극대화한다.”
−지극히 화사한데 슬프다. 전영백 교수도 ‘화려한 애상(哀想)’이라고 표현했다.
“유년기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밤에 잠이 안 와 툇마루로 나섰더니 달빛 눈부신 우물가에서 엄마가 손으로 가슴을 쥐어짜며 울고 있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설움 때문이었다. 엄마 따라 남대문시장에 미제 물건을 사러 갔을 때 보았던 ‘양색시’들도 잊을 수 없다. 내 작업의 시작인 ‘스카프'는 자화상이다. 여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바람 따라 자유롭게 들판을 날아다니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엄마, 나 박지성한테 시집갈래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인공인 박지성 선수가 둘째 사위다. 딸인 김민지 전 SBS 아나운서가 박 선수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놀라지 않았나.
“2002 월드컵이 한창일 때 고등학생이던 민지가 TV를 보다 말고 대뜸 ‘엄마, 나 박지성한테 시집갈래’ 그러더라. ‘가라~’ 그랬지, 어이가 없어서(웃음). 그때 박지성은 신인이었다. 사위도 ‘안정환이 지나가면 관중들이 막 환호하는데 자기가 지나가면 조용했다'고 하더라. 민지는 그 박지성이 좋았던 거다.”
−첫 상견례가 궁금하다.
“과일 바구니 들고 현관문을 들어오는데 나도 모르게 ‘어머, 어머!’ 하며 뒷걸음질쳤다. 우리 남편은 지금도 사위에게 말을 높이려고 한다. 반대? 착실한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한데 반대를 왜 하나?(웃음)”
−사위 사랑은 장모라던데.
“사사로운 감정 표현을 거의 안하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웃음). 속이 깊어서 그런 것 같다.”
−김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유튜브 ‘만두랑’도 인기더라. 엄마도 출연했다.
“처음엔 저런 걸 왜 만드나 했다. 막상 출연해보니 재밌더라. ‘엄마 아니라 언니 같다’는 댓글이 참 맘에 들었다(웃음).”
−며칠 전 런던으로 돌아갔다.
“코로나에 막혀 두 달을 우리 집에서 지냈는데 전시 준비하랴, 손주들 밥 해먹이랴 너무 힘들었다. 우리 세 아이 어릴 때 등에다 업고 그림 그리던 때가 생각나더라(웃음). 시원섭섭한데, 민지가 식탁 위에 써놓고 간 편지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런던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아이들은 한국에서 받은 가족의 탄탄한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씩씩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썼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