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아내 그레이스에게 줄 기념일 선물을 고르는 일이다. 선물을 준비해야 할 기념일들은 다음과 같다. 2월 밸런타인데이, 3월에 찾아오는 결혼 기념일, 5월 둘째 일요일인 어머니의 날, 9월에 있는 아내의 생일, 그리고 크리스마스. 살기 좋은 나의 모국 한국에서는 2월 14일에 여자들이 남자 친구나 남편에게 선물을 준다지만 미국에서는 서로 선물을 교환한다. 게다가 아내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초콜릿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궁리하다가 아내가 좋아하는 홈 데코레이션에 대한 책 3권으로 이번 달의 위기는 면했다.

아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비싼 것보다는 자신이 좋아할 만한 것을 오래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선물을 받고 싶다고. 왜냐하면 아내가 그런 것을 잘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년 6월 아버지의 날에 나는 디자인이 멋진 브래들리 타임피스 시계를 선물 받았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없앤 것으로 유명해진 한국인 기업가 김형수님이 개발한 이 시계는 시각 장애인들도 촉각으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정안자들도 차고 다닐 수 있는 훌륭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시계다. 또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는 앤티크 라디오를 선물 받았는데, 이것이야말로 아내가 생각하는 선물의 정의를 잘 대변한다. 골동품 라디오처럼 생긴 이 나무 상자는 FM 라디오 모드와 블루투스 모드, 그리고 케이블을 연결해서 다른 오디오 시스템의 소리를 출력하는 기능까지 갖고 있는 정말 ‘쿨’한 기계다. 옛스러운 모양은 옛것들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 딱 맞고, 거기다 요즘 쓰는 아이폰이나 오디오북 플레이어 등을 연결시킬 수도 있는 아주 완벽한 선물이었다.

일러스트=안병현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3월 결혼 기념 선물 아이디어에 더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올해는 더 좋아지든 나빠지든,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겠다는 언약을 많은 증인들과 하나님 앞에서 하며 결혼한 지 25년이 되는 해다. Serious pressure on(심각한 압력의 시작)!

선물 고민을 1월 중순부터 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25주년 결혼 기념일을 은혼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기억해냈다. 아, 은! 바로 그거다 싶었다. 은 동전을 25개 선물하면 되겠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은 동전을 판매하는 사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현물 가격과 가장 가까운 값으로 은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믿을 만한 딜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망칠 사건이 다가오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증권 분석 일을 하는 애널리스트다. 한 월가 회사의 자산운용 팀에서 회사채 분석을 하고 있는데, 이 커리어를 시작한 지도 벌써 26년이 넘었다. 기업이 발행하는 증권, 즉 주식과 회사채를 분석하여 매입과 매각 결정을 하는 일을 그렇게 오래 하면서 내가 얻게 된 노하우는 그리 복잡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중 하나, 너무 당연해서 꼭 기억할 필요도 없는 것은 투자는 오늘내일 일이 아니란 사실이다. 투자자들의 투자 기간은 몇 달도 아니고, 몇 주나 며칠은 더욱더 아니다. 적어도 몇 년 동안 그 기업의 성장률, 이윤율, 현금 흐름, 경영진의 능력과 정직함 등을 토대로 자금을 묶어놓을 수 있는 것이 투자 아닌가. 그래서 한 레딧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게임스톱 사건을 나는 투자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기억하게 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게임스톱은 비디오게임을 판매하는 소매 체인점 회사다. 몇 년 전 아들 데이비드가 50달러짜리 게임스톱 카드를 선물로 받았는데, 아직 20달러 이상의 잔액이 남아 있다. 비디오게임을 좋아하는 아들의 말로는 살 것이 별로 없는 가게란다. 코로나 사태 전에도 이런 평가를 받던 기업의 주가가 며칠 새 2억달러에서 300억달러까지 치솟은 이유는 쇼트 스퀴즈(공매도를 한 투자자가 주가 상승을 우려해 다시 그 주식을 매수하는 것)를 노린 개인 투자자들의 전략 때문이었다. 그들이 게임스톱 주식을 계속 매입하여 주가를 올리면, 대량의 게임스톱 주식을 공매도한 월가 헤지펀드들 역시 지속되는 손실을 막기 위해 주식을 매입해야 한다. 그러면 주가는 더욱더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옷을 전혀 입지 않은 임금의 옷차림에 대해 큰 무리가 계속 칭송을 한다면 임금의 벌거벗은 현실은 영원히 가려질 수도 있다. 임금님의 벌거벗은 사실을 말할 용감할 아이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쇼트 스퀴즈는 다르다. 공매도를 한 기관이 빠져나가면, 그 주식을 지원하는 무리가 아무리 크다 해도 기관의 매입 압력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성장 가능성은커녕 생존마저 위협받는 기업의 주식이 높은 가치를 계속 유지할 리 없다. 나는 언젠가는 게임스톱의 주가도 현실적인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 확신했고, 큰 손실을 경험하게 될 개인 투자자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들의 다음 쇼트 스퀴즈 대상이 은이 될 거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2월 초 은값이 약 10% 올랐다. 나는 값이 더 오를 것을 대비해 아내의 은혼식 선물을 빨리 사야 하나, 아니면 은값이 다시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좀 더 기다릴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내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내는 아주 단호하게 “난 은은 싫어”라고 말했다.

“아니 왜?” “은은 변하잖아. 색이 변하는 금속을 은혼식 선물로 받을 수는 없지.”

아내는 우리가 오래전 했던 언약, 영영 변치 않겠다는 언약을 나에게 다시 한번 상기해줬다. 투자가 장기라면, 사랑은 영원이다. 이런 가슴 뭉클한 말을 들으면서, 나는 하늘이 우리에게 정해준 삶이 꼭 40년만 더 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65주년 기념 선물은 블루 사파이어란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