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세계적인 부호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억만장자들을 초대해 비공식 만찬을 열었다는 소식으로 미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록펠러 가문의 장손 데이비드 록펠러가 주최한 이 자리에는 당시 뉴욕 시장 마이클 블룸버그와 오프라 윈프리, CNN 창립자 테드 터너 등이 참석했다고 알려졌다. 이 저녁 식사는 억만장자들이 재산의 상당액을 기부하기로 서약하는 캠페인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의 시작이 됐다.
‘배달의 민족’을 만든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이 한국인 최초 가입자가 되면서 게이츠와 버핏이 함께 설립한 ‘기빙 플레지’가 주목을 받았다. 기빙 플레지는 10억달러 이상의 자산가가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약속해야 회원이 될 수 있는 기부 클럽이다. 2010년 40명으로 출발해 2021년 현재까지 25국 219명이 가입했다. 가난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단돈 50위안에 부잣집으로 팔려가야 했던 멍니우(중국 유제품 기업) 창립자 뉴건셩, 버스 기사였던 아버지의 해고 수당으로 사업을 시작해 영국 운수회사 스테이지코치를 설립한 앤 글로그 등 가입자 75%가 자수성가형 억만장자다.
연령대도 30~90대까지 다양하다.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36)와 더스틴 모스코비츠(36), 암호화폐 거래 플랫폼 비트멕스의 공동창업자로 영국 최연소 억만장자가 된 벤 델로(36) 등이 대표적인 30대 가입자다. 세계 1위 부자인 아마존 최고경영자(CEO) 제프 베이조스의 전처인 소설가 매켄지 스콧도 2019년 이혼 후 기빙 플레지에 동참했다. 이혼 위자료로 350억달러(약 39조원)어치 아마존 주식을 받은 스콧은 지난해에만 60억달러 이상을 기부하며 미국 고액 기부자 2위에 올랐다. 테슬라 CEO 엘런 머스크, 영화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 래리 앨리슨 오라클 회장,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등이 기부 서약에 동참했다.
워런 버핏은 기빙 플레지에 영감을 준 롤 모델이 척 피니라고 밝혔다. 면세점 그룹 DFS(Duty Free Shoppers)를 창립한 피니는 인생의 목표였던 ‘전 재산 기부’를 지난해 드디어 이뤘다. 노후의 생활 자금만을 남겨놓고 40년간 전 재산인 80억달러(약 9조)를 기부한 그는 자신이 운영해온 자선 재단까지 해체하며 “빈털터리가 됐지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억만장자의 마지막이 모두 척 피니처럼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기빙 플레지 회원이었던 영화제작자 스티브 빙은 지난해 6월 고층 아파트 발코니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국 언론은 빙이 코로나 봉쇄령이 내려진 이후 우울감을 호소했다고 보도했다.
기빙 플레지를 향한 비판적 시선도 있다. 서약 이후에 이행 과정은 제대로 점검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지 블룸버그는 가입자들이 얼마나 기부 약속을 지켰는지 사망한 10명의 재산을 추적했고, 이 중 단 두 명만이 10억달러 이상을 기부했다고 보도했다. 사망한 뒤 각종 세금과 빚을 정리하고 나면 실제 기부액은 재산의 절반에 못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의 기부도 만만치는 않다. 재산이 늘면서 기부해야 할 금액도 가파르게 올라가기 때문이다. 미국 싱크탱크 정책연구소(IPS)가 최근 기빙플레지 가입자 62명의 재산 변화를 조사한 결과, 물가상승분을 제외하고도 지난 10년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마크 저커버그·레이 달리오 등 9명은 재산이 3배 이상 늘었다. 정책연구소는 “기부 서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도 있지만, 재산이 너무 빨리 불어나 (재산 절반 기부라는) 약속을 지키기 어려운 상태”라며 “서약을 지키고 싶다면, 자산 증가율을 따라잡기 위해 기부 속도를 더 높여야 한다”고 했다.
검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들의 불어나는 재산만큼 실제 기부액도 늘고 있다. 비영리 매체 ‘크로니클 오브 필랜트로피’에 따르면 지난해 제프 베이조스·일론 머스크 등 고액 기부자 50인의 총 기부액은 247억달러(약 27조 7000억원)로 2019년에 비해 56% 증가했다.
반면, 국내에선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나 김봉진 의장처럼 거액 기부자 사례도 흔치 않은 수준이다. 기부단체 평가기관인 한국가이드스타의 박두준 사무총장은 “자수성가해 쌓은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인이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변화”라면서도 “다만 기부의 선순환이 이뤄지려면, 따뜻한 격려와 함께 기부 약속을 어떻게 실천해가는지도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제도적인 뒷받침도 필요하다. 김봉진 의장은 과거 인터뷰에서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같은 거액 기부자가 국내에서 안 나오는 이유는 한국 기업가의 탐욕보다 ‘세금 폭탄’ 같은 기부 환경 탓이 더 크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박 사무총장은 “주식을 기부해도 경영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차등의결권을 도입하거나, 현행 5%인 주식 기부 비과세 기준을 미국처럼 20%까지 늘리거나 상한선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손원익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객원교수는 “기부 시 세제 혜택이나 주식·부동산·건물 등 현물 기부를 위한 제도를 세법에 반영한다면 기부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